# 105
105화 슈퍼 계약 1
“성낙기 선수를 대타로 기용하는 알렉스 비토 감독입니다. 승부수를 띄운 것 같은데요.”
“아마, 대타로 쓴 후 대주자로 2루수 백업을 쓸 생각인 것 같네요. 야디엘 리베라의 본래 포지션이 2루니까요.”
마이애미 팬들은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성낙기의 등장을 반겼다.
관중석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성낙기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드는 팬들도 보였다.
성낙기는 타석에 들어서면서 내심 긴장했다.
지금까지 100마일이 넘는 공은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KBO에서 가장 빠르다는 공성진이나 연준후 등도 157km를 넘지 않았다.
하물며 100마일의 투심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와의 승부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초구에 배트를 휘둘렀지만 98(158km)마일의 투심패스트볼은 성낙기의 생각보다 더 가라앉았다. 포심패스트볼처럼 직선으로 바깥쪽을 향하다가 몸 쪽으로 꺾이면서 가라앉는 공.
스피드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변화까지 있으니 더 힘들다.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은 조단 힉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하긴, 100마일을 넘게 던지는 투수가 자신만만하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할 것이다.
“초구를 투심패스트볼로 던져 헛스윙을 유도하는 조단 힉스입니다.”
“무지막지한 공을 꽂아 넣네요. 칠 테면 쳐보라는 거겠죠. 하지만 성낙기를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이 대타로 낸 이유가 뭐겠어요. 잘 치니까 내보낸 겁니다. 규정 타석을 한참이나 미달했지만 시즌 타율 0.299에 11홈런 30타점으로 만약 전 경기를 뛰었다면 45홈런 120타점 페이스입니다.”
따악.
해설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단 힉스는 101(162,5km)마일의 싱킹패스트볼을 뿌렸고 공은 성낙기의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성낙기는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허리를 회전하며 배트를 돌렸다.
배트에 맞은 공이 3루수 키를 넘기고 파울라인 선상에 떨어졌고 3루심은 페어를 선언했다.
좌익수가 페어지역에 맞고 파울라인 밖으로 구르는 공을 잡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주자 두 명이 홈을 밟았다.
성낙기는 2루까지 진출한 뒤, 더그아웃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경기 스코어 4:2로 따라붙는 순간이었다.
***
경기는 재미있어졌다.
난공불락이던 조단 힉스를 두들겨 2타점을 올린 성낙기에 찬사가 쏟아졌다.
조단 힉스는 7회 초에 2실점을 하고는 성낙기를 2루에 두고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워 이닝을 끝냈다.
아직 투구 수도 83개에 불과해서 완투의 가능성이 충분했다.
마이애미의 문제는 지금까지 성낙기를 제외하고는 조단 힉스의 강속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찬스가 와도 이어지지 않는다.
7회 말에 불펜으로 올라온 좌완 투수 딜런 피터스가 2루타 2개를 맞고 1실점, 5:2로 스코어가 벌어지면서 마이애미는 점점 희망을 잃어갔다.
그 뒤를 이어 팬 파일러가 올라와 이닝을 잘 막았으나, 9회 초에도 마운드에 선 조단 힉스의 공을 끝내 공략하지 못하면서 경기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마이애미의 마지막 타자를 중견수 플라이 볼로 잡은 조단 힉스는 마운드에서 껑충껑충 뛰었고 선수들은 모두 마운드 근처에 모여 와일드카드 획득을 자축했다.
“모두 잘했다. 경기 졌다고 실망할 것 없어. 시즌 마무리 경기에 2위까지 치고 올라갔고 와일드카드 경쟁까지 했으니 우릴 할 일은 다 한 거다. 마이애미 말린스가 만만치 않은 팀이라는 걸 보여준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좋은 시즌을 보냈다. 오늘 경기 아쉬움은 잊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알렉스 비토 감독의 말을 끝으로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나가 팬들에게 그동안의 응원에 대해 감사를 전했고 사인을 해주느라 비행기를 타기까지 2시간이 걸렸다.
성낙기는 마이애미의 숙소로 돌아오면서 이제 정말 시즌이 끝났구나, 싶은 생각에 아쉬웠다. 선수들은 호텔에 도착해서 술을 나누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
“와일드카드로 나가 월드시리즈까지 우승하는 전통을 이어가지 못했어. 좀 아쉽지만 팬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시즌이었다고 생각해. 2017년 이후로 2위까지 치고 올라간 건 4년 만이니까. 더구나 리빌딩 기간이었던 걸 감안하면 내년이 더 기대되기도 하지. 그런데 말이야.”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이애미 구단 사무실에서 오스틴 단장과 구단주 데릭은 이번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스틴 단장으로서는 데릭이 만족해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고민이 있네. 밖에서 보면 리빌딩이 잘된 것 같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한 선수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 그가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혹시, 선나키 말씀이십니까?”
“아는군. 그 선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고비마다 해주는 바람에 연패가 길어지지 않았고 강팀을 상대로도 버텨냈다고 보네만.”
“사실은, 그렇습니다. 지구 2위는 선나키가 이끌었죠.”
“그 친구 계약이 어떻게 된다고 했지? 1+1인가?”
“내년 시즌까지는 활용 가능합니다.”
“내년 시즌이 끝난 후엔? 다른 팀에 빼앗기거나 붙잡는다 해도 가격이 폭등한 후가 되겠지.”
“그 말씀은…….”
“오스틴 단장이 빠른 시일 내에 장기 계약 추진해 봐. 난 뉴욕 메츠와의 와일드카드 도전권 경쟁에서 확신했네. 이 선수가 있으면 월드시리즈를 노릴 수 있다고.”
오스틴 단장은 일처리를 서둘렀고 일주일 후, 마이애미 말린스 단장실에서는 모종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아경과 정진수가 앉았고 맞은편엔 오스틴 단장과 윌슨 스카우트가 자리했다.
성낙기는 김아경이 온 줄도 모르고 말린스파크에 나가 채드왈라치와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2020년 뉴욕 메츠와 디그롬은 5년에 2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죠. 5년 후는 만 36세이고요. 올해 FA로 풀리는 신더가드 또한 그 이상의 계약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낙기는 시즌 중의 맞대결에서 두 투수를 이겨왔어요.”
“대단히 열정적이십니다만, 아직 본격적인 협상은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협상이랄 게 뭐 있나요. 마이애미 구단의 요청에 의해서 저희는 왔을 뿐입니다. 디그롬과 같은 액수면 생각을 해보겠어요.”
“하하, 디그롬과 성낙기는 시작점이 다릅니다. 디그롬은 팀에 다년간 공헌했고 내구성 등에서 보여준 게 많죠. 솔직히 말하면 선나키는 이제 햇병아리 2년 차에 접어드는 겁니다. 그리고 내구성은 검증되지 않았지요. 저희도 사실 위험 부담을 안고 베팅하는 거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그럼, 그쪽 생각은요?”
“7년 1억 1000달러입니다.”
“그러시다면 내년 시즌 이후에 대박을 노려보겠어요. 내년엔 성적이 더 좋아질 텐데 그땐 잡을 엄두를 못 낼 만큼 몸값이 폭등할 겁니다.”
“무슨 근거로 내년 성적이 나아진다는 겁니까.”
“늘 발전하는 투수이기 때문이죠. KBO 2군에 있을 땐 130km를 던지던 투수가 이제 150km대의 공을 던지고 있어요. 그 공도 내구성을 염려해서 경기 후반에만 던지기로 했었죠.”
“그렇다면… 가끔 던지는 96(155km)마일의 공을 일부러 던지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걸 뭐라고 하실 순 없을 텐데요. 140km대 공으로도 2점대의 평균 자책점을 유지했죠. 승계 주자를 불펜에서 말아먹지 않았다면 ERA 2.5는 찍었을 겁니다. 그리고 올해 211이닝을 던졌고, 3할에 근접한 타율과 두 자리 수 홈런까지, 역대 어느 투수도 하지 못한 걸 성낙기 선수는 해냈어요. 제구력 또한 계속 예리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가 에이전트를 맡고 있지만 이 선수의 정확한 능력은 측정이 안 될 정도예요. 아마, 다년간 지켜본 저의 추측대로라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괴물 투수’가 될 겁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그런 투수 말이죠.”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 투수에게 그렇게 많은 금액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데리고 있는 선수가 수십 명이 넘어요. 협상을 아예 안 하겠다면 몰라도 하시겠다면 제가 제시한 금액에서 조금 더한 액수를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오스틴 단장은 깐깐했다. 김아경은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갭이 너무 크고 기나긴 협상을 하자는 뜻인데 성낙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
1년 동안 실력을 보여준 후라면 3억 달러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4일 휴식이라는 투수 로테이션을 전혀 거르지 않으면서 타격으로도 팀에 여러 번의 승리를 가져다준 성낙기다. 김아경과 정진수는 아쉬울 게 없었다.
오스틴 단장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이제 협상 시작인데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니.
하지만, 김아경은 자신이 제시한 금액을 줄 생각이 아니라면 협상은 없다고 못을 박고 구단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여러모로 우리가 유리한 환경이 아니에요. 그쪽은 내년에 대박을 터트리겠다는 거고 이미 이쪽 의도를 파악하고 협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면서?”
“그것도 협상 전략이겠죠. 생각이 바뀌면 다시 연락 달라는 말은 더 좋은 조건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렇군. 2억 달러라…….”
“너무 과합니다. 2022년에 더 나은 활약을 펼친다 해도 2억 달러를 지급할 구단이 있을까요?”
“디그롬을 들먹였단 말이지.”
“주제넘게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런 협상은 결과가 뻔합니다. 결렬이죠. 서로 원하는 조건이 너무 다르니까요.”
“그런데 디그롬은 옵션이 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 5년 동안 3천만 달러가 옵션입니다. 190이닝 18승의 조건인데 결코 만만한 수치는 아니죠.”
“보장액을 낮추는 방법은 어디까지 먹힐까?”
“글쎄요. 만약 정말 성낙기의 활약을 확신한다면 1억 2천만 불 정도는 수용하겠지만, 그마저도 심한 액수입니다.”
“좋아, 그럼 1억 달러로 매듭을 짓도록 해. 옵션은 디그롬과 같은 조건이야.”
***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떨어진 뉴욕 메츠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미키 켈러웨이 감독을 경질했다. 그리고 2천년 대 초반까지 마무리로 이름을 떨쳤던 잭 스나이프 감독을 영입했다.
강속구 삼총사에 스티븐 마츠라는 수준급 투수진을 가지고도 와일드카드 경쟁에 실패한 대가였다.
시즌 초, 많은 전문가들이 뉴욕 메츠를 월드시리즈 우승권 전력으로 분류하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역시,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밀려난 마이애미 말린스는 시즌 종료 후, 일찌감치 개인 훈련에 들어갔다.
내년 스프링 캠프 소집 때까지 자율 훈련을 하는 것인데 개인 코치를 영입하여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구단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개인 훈련을 하는 선수도 있다.
성낙기는 채드왈라치와 팬 파일러 등과 함께 구단의 클럽하우스에서 훈련을 하기로 했다.
채드 왈라치는 다음 시즌 좀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기 위해서,
팬 파일러는 성낙기의 원 포인트 레슨 같은 조언과 시즌 중의 훈련으로 어느 때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성낙기와 함께하길 원했다.
또 채드왈라치는 포수 출신의 개인 코치를 사비로 쓰기로 했는데 210만 달러를 받는 채드왈라치의 연봉으로는 상당한 지출이었다.
그 코치가 바로 90년대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던 찰스 존슨이었다.
돈을 벌려는 목적보다는 후배 포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셈이다.
왈라치는 올해 백업 포수로서 그마나 경기 출전을 제법 했고 포수라는 포지션에 눈을 조금 떴다. 지난 시즌보다 모든 지표가 좋아졌다.
성낙기와 짝을 이룬 경기가 여러 경기 있었고 내년에도 함께할 것이 분명하니 기량을 더 향상시켜야겠다는 열망이 있었다.
말하자면, 성낙기가 좋은 동기부여를 해준 거였다.
어느새 10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월드시리즈는 뉴욕 양키스와 워싱턴 내셔널스가 맞붙어 시리즈 전적 4:1, 양키스의 승리로 끝났다.
워싱턴은 스트라스버그가 1승을 올렸고 타격에서는 브라이스 하퍼가 2홈런을 때리며 분전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양키스는 루이스 시크릿의 완투로 1차전을 수월하게 잡고 월드시리즈를 쉽게 풀어나갔다. 아론저지와 스탠튼은 7홈런을 합작하며 워싱턴의 마운드를 폭격했다.
탄탄한 선발과 불펜, 그리고 기공할 만한 타선이 어우러진 양키스는 예전에 불렸던 악의 제국을 재현하고 있었다.
비교적 젊은 선수들로 이루어진 라인업을 보면 다음 시즌 역시 강력한 우승 후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스타급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이 항상 우승하는 건 아니다.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약하다고 평가받는 팀에 덜미를 잡힌 예는 무수히 많다.
마이애미 같은 경우만 봐도 와일드카드로 올라가 두 번이나 우승을 했고 2002년엔 애너하임에인절스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맞붙어 와일드카드끼리의 월드시리즈라는 진귀한 기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