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099화 와일드카드를 위한 2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푸이그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커브에 엉덩이가 빠진 채 배트를 휘둘렀다. 그가 생각했던 공은 패스트볼 계열이었는데 커브에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았다.
‘아, 씨… 뭐야. 지가 커쇼야? 커브 각이 장난 아니네.’
성낙기는 2번 타자 크리스 테일러에게는 몸 쪽 체인지업을 초구로 던졌고 투수 앞 땅볼로 잡아냈다.
3번 타자 코디 벨린저에게는 다시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다음,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연속으로 던져 스윙 아웃으로 돌려세웠다.
“출발이 아주 좋은 성낙기 투수입니다. 1회 말 3삼진으로 다저스 타자들을 모조리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냅니다.”
“변화구 위주의 투구네요. 평소의 패턴과는 조금 달라요. 아마 의도하지 않았나 싶은데 빠른 공에 강점이 있는 다저스 타자들을 잡아내기 위한 맞춤형 전략이에요. 마이애미의 배터리가 타자들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와, 오빠 잘 던진다. 공이 춤을 추는 것 같아.”
“허헛… 내가 보고 있으니까 더 잘 던지는 거다.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소싯적에 동네에서 알아주는 투수였어. 저놈이 내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네.”
“아유, 또 시작이다. 오늘은 술도 안 먹은 양반이 헛소리를 하네. 미국까지 와서 막걸리 꾼 티를 내요.”
“흐음… 무슨 말을 못 하게 하고 그래. 그나저나 시장 사람들 우리가 TV 나온 거 봤는가 모르겠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멍청이 순댓집 서 사장은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내가 어디 자기하고 어울릴 군번인가… 버젓이 미국 텔레비에 나왔는데 말여. 앞으로는 나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여.”
“하이고, 고만 좀 하라니까 더하네. 서 사장하고 막걸리 안마시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대?”
더그아웃에서 성낙기와 채드 왈라치가 경기의 플랜을 짜는 동안, 엄마와 아버지는 티격태격하면서 시장 사람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성낙기야, 오늘은 변화구로만 계속 생각하는 거야? 1회는 잘 먹혔지만 금방 적응해 버릴 거야.”
“변화구마다 속도가 다 달라서 괜찮을 거다. 라이징패스트볼하고 퀘이크볼은 되도록 쓰지 않을 거야. 오늘은 체력을 아껴서 완투를 해야 하는 날이거든.”
“가족이 와서 그러는 거야?”
“뭐, 그런 것도 있고.”
***
커쇼는 커쇼였다. 7회까지 4안타 8삼진으로 무실점 행진 중이다.
성낙기도 만만치 않았다. 역시 7회 말까지 6안타 9삼진으로 투수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성낙기는 4회에 1실점을 했는데 안타 하나와 에러, 도루까지 허용한 결과였다.
채드 왈라치는 도루를 내주고는 마운드에 올라와서 성낙기에게 말했다.
“봐, 내가 포심패스트볼 던지라고 했지. 느린 변화구를 던지니까 도루는 당연한 거야.”
어쨌거나 7회 1실점이면 준수함을 넘어 대단한 수치다. 방어율로 따지면 1.28일 뿐이니까.
다만, 오늘은 상황이 다르다.
상대 투수가 사이영 상을 밥 먹듯이 타는 커쇼니까.
커쇼는 8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는데 7회까지 83구만을 던져서 완봉승을 할 기세였다.
하지만, 8회 초에 선두 타자로 나선 8번 타자 채드 왈라치가 유격수가 잡기 힘든 땅볼을 때려냈고 1루에서 경합이 벌어졌다.
1루심이 아웃을 선언하자 알렉스 비토 감독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간발의 차이입니다. 느린 화면상으로는 세이프 같지 않습니까?”
“애매하긴 한데 타자의 발이 빠른 것 같군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심판의 권한입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경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야 하죠.”
“그런… 가요?”
“세이프!”
4심 합의를 통해 나온 결론은 세이프였고 성낙기 앞에 주자가 생겼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성낙기는 커브와 체인지업에 연속 삼진을 당했었다.
가족들이 와 있고 서희 친구 장하연도 있는데 또 삼진을 당하면 체면 구기는 거다.
성낙기는 배트를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타석에 들어서서 커쇼를 보았다.
여전히 자신 있는 표정이 읽힌다.
노아웃에 1루를 허용했지만 커쇼에게는 전혀 위기로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다.
다저스 팬들 또한 커쇼가 위기를 벗어난 뒤, 주먹을 쥐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차분하게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팡.
“스트라이크.”
특유의 낙차 큰 커브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커쇼의 무실점 행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2구로 던진 바깥쪽 높은 포심패스트볼에 성낙기의 배트가 휘둘러졌을 때 다저스의 팬들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따악!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관중들은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일제히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눈을 의심했다.
***
커쇼가 던진 공이 바깥쪽으로 정교하게 제구된 건 아니었지만 워낙 공의 회전이 좋아서 볼 끝이 살아 있었다.
그런 공을 때린 타자는 마이애미의 투수였고 타구는 우익수 키를 넘기며 쭉쭉 뻗었다.
“성낙기 선수가 날린 타구가 푸이그의 키를 넘어 관중석으로 날아갑니다. 홈-런! 아, 믿기 어렵습니다. 커쇼의 공을 그대로 받아쳐 투런 홈런을 만들었습니다.”
“포심패스트볼이었죠. 약간 가운데로 몰리긴 했지만 볼 끝이 살아 있는 공이었는데 그걸 넘겨 버리네요. 이로서 역전 모드로 가는 마이애미인데요. 요즘 팀 성적이 좋은데 전반기보다 전투력이 더 강해졌다는 걸 이 홈런으로 보여줍니다.”
“성낙기 선수는 타자로도 상당한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그 성적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채드 왈라치는 홈을 먼저 밟고 나서 성낙기를 기다렸다. 성낙기가 홈플레이트를 밟자, 웃으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더그아웃에서는 흥분한 선수들이 성낙기의 헬멧을 마구 때렸다.
성낙기의 아버지와 엄마, 여동생 서희와 장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치켜들었다.
서희와 장하연은 홈런을 치는 순간, 서로를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저럴 줄 알았어. 저놈이 어릴 때부터 몽둥이질을 잘하더니 여기서 실력이 나오네. 거 왜, 6살인가 먹었을 적에 옆집 똘똘이랑 한판 붙었잖어. 그 사나운 개랑 일대일로 붙어서 이겼었지. 낙기도 몇 군데 물렸지만 똘똘이 새끼도 낙기가 휘두른 몽둥이에 여러 대 맞았다고 수의사가 그랬단 말이야. 그길로 낙기도 입원하고 똘똘이도 동물 병원에 입원했었지. 허허, 내가 그때부터 야구시키려고 딱 마음을 먹었단 말이야.”
“누가 들으면 똘똘이가 어미 개인 줄 알겠네. 강아지였잖아요. 성깔이 사납긴 했지만. 그리고 낙기가 뭔 몽둥이를 휘둘러요. 나뭇가지로 코를 쑤셔서 동물 병원에 간 거지. 낙기는 약국에서 연고 사다 바른 게 다잖아요.”
“허어… 이 사람이 가장이 말하면 그런 줄 알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어. 오늘 밤에는 필히 술 한 잔 걸쳐야겠구만.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낳아 놨어. 사람이 뭐니 해도 유전자가 좋아야 하는 거야.”
커쇼는 2실점을 한 뒤, 나머지 타자들을 삼자범퇴 시켰다.
그러고는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shit! shit!’을 연속으로 내뱉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더그아웃에 들어가자마자 의자에 글러브를 집어 던졌다.
경기 스코어는 2:1로 마이애미가 역전에 성공했고 팬들은 성낙기를 연호했다.
성낙기는 8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1안타 무실점으로 다저스 타선을 막아냈다.
8회까지 투구 수 93개였다.
[체력이 11남았습니다]
성낙기가 8회 말 수비를 마치고 더그아웃을 향할 때 눈앞에 글귀가 떠올랐다.
변화구 위주의 투구를 했는데도 체력이 달리는 걸 보면 8회 초 홈런을 친 타석의 체력 소모가 많았던 게 틀림없다.
‘shit! 9회에 던지지 못하는 건가?’
성낙기는 더그아웃에 오면서 갈등했다.
일반적이라면 투구 수에 여유가 있으니 선수의 의향에 따라 9회를 맡길 수도, 아니면 마무리로 갈 수도 있다.
성낙기가 의자에 앉자 셜리번 코치가 다가왔다.
“어때, 9회도 던질 수 있겠어?”
“던지겠습니다.”
성낙기는 일단 그렇게 말해 놓고 생각에 잠겼다.
어떤 공을 던져야 체력 11 안에서 이닝을 끝낼 수 있을 것인가.
9회엔 타자들의 집중력이 더 높아지는 만큼 끈질긴 승부가 예상된다.
그걸 이겨내려면 무조건 이른 볼카운트에 배트가 나오도록 유도하는 피칭이 필요하다.
채드 왈라치가 성낙기에게 왔다.
“9회에도 비슷한 패턴으로 가는 게 낫겠지?”
“아니, 최대한 빠른 카운트를 잡아나갈 거야. 그러려면 스트라이크만 던져야 하고.”
“그러다간 맞을 텐데? 1점으로 잘 막았지만 상대는 다저스야.”
“알아, 그러니까 더 그렇게 해야 돼.”
“히유… 또 고집을 피우는군. 넌 꼭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게 가는 습관이 있어.”
9회 초에 커쇼는 올라오지 않았고 유리아스가 마운드에 올라 마이애미의 타선을 삼진 하나를 곁들여 돌려세웠다.
성낙기는 9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랐고 관중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마이애미 말린스의 팬들은 성낙기가 9회까지 던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강팀인 다저스를 상대로 완투승에 도전하는 투수를 축하해 주는 것이다.
물론, 무실점으로 막아내야 온전히 성낙기를 위한 축하가 완성되는 것이겠지만.
***
다저스의 선두 타자는 작 피더슨이었다.
시즌 0.267의 타율에 27홈런을 때려낸 거포다. 외야수치고는 타율이 약한 편이지만 언제든 한 방을 칠 수 있는 능력과 결정적인 타점을 올리는데 능한 선수였다.
성낙기는 채드 왈라치에게 사인을 냈다.
9회는 오로지 자신이 사인을 내야만 체력에 맞춰 이닝을 끝낼 것이기 때문이다.
유인구는 없다.
따악.
파울.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노려 외야 관중석으로 보내는 피더슨의 타격이 날카롭다.
오늘 안타를 치지 못했으니 1점 차인 9회에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을 것이다.
성낙기가 2구를 던졌다.
따악.
파울.
역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는 투심패스트볼이었는데 하마터면 페어지역으로 들어갈 뻔한 타구였다.
타구는 우익수 루이스 브린슨이 잡기 힘든 라이너성으로 날아가 파울라인 근처에 바운드 된 뒤, 펜스 쪽까지 굴러갔다.
다저스 관중들이 아까운 듯 탄성을 질렀고 성낙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좋아, 승부다.’
성낙기는 왈라치와 사인을 교환한 뒤, 피더슨의 몸 쪽으로 공을 뿌렸다.
타자가 보기에 다소 높아 보이는 코스로 들어가는 공이었고 피더슨은 배트를 낼 듯 말 듯 망설이다가 내지 않았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성낙기가 3구로 던진 공은 체인지업이었고 타자의 가슴 높이로 가다가 아래로 꺼졌다.
피더슨이 주심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양손을 벌리며 항의했고 다저스 팬들이 우우, 하는 야유를 보냈다.
배팅 포인트에선 다소 높아 보였지만 포수 미트에 들어갈 땐 완벽한 스트라이크였다.
피더슨은 배팅 포인트에서의 높이에 대해 말했고 주심은 더그아웃을 가리키며 피더슨을 물리쳤다.
피더슨이 투덜대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자, 성낙기는 한숨을 돌렸다.
“피더슨이 어이없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주심의 존에 불만이 있었던 피더슨입니다.”
“주심의 존엔 이상이 없었죠. 체인지업이 드롭처럼 아래로 꺾이면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어요. 성낙기 투수의 체인지업은 정말 예리하네요.”
“네, 다음 타자 카일 파머가 등장합니다. 수비 형 포수라기보다는 공격형 포수겠지요? 0.278의 타율에 14홈런을 기록 중입니다. 공을 맞추는 능력이 있는 포수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역시 만만치 않은 타자다. 성낙기는 타자의 몸 쪽으로 투심패스트볼을 전력투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