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098화 와일드카드를 위한 1
“오늘 널 다시 봤어. 내가 생각하던 성낙기와는 차이가 있어. 방어율이 2점대 후반인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공의 위력이 뛰어나.”
“고맙다. 네가 잘 받아줘서 그래.”
“솔직히 네가 던지는 퀘이크볼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돼. 그립을 어떻게 잡길래 그런 궤적이 나오는 거지?”
“너클볼이 거의 무회전이잖아. 공기의 저항에 따라 춤을 추지. 퀘이크볼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해.”
“이건 너클볼하고 다르니까 하는 말이야.”
“너무 세세하게 알려고 들지 마.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알았다. 비밀을 캐다가 다치고 싶지 않아.”
역시, 이래서 왈라치가 좋다. 전력투구를 하고 체력을 모두 소모한 다음의 기분 좋은 욱신거림이 팔에 남았다.
***
성낙기는 며칠 후 벌어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의 역투로 시즌 13승째를 낚았다.
마이애미는 필라델피아와의 3연전을 모두 스윕했고 LA다저스와 루징시리즈를 기록한 뉴욕 메츠와의 격차를 3경기 차로 좁혔다.
-이러다가 뉴욕 메츠 누르고 와일드카드 가는 거 아니야?
-승률이 5할이 넘으니 가능성은 충분하지. 근데 뉴욕 메츠가 곤두박질할 팀이 아니야.
-그렇지, 마이애미가 계속 승승장구할 팀도 아니고.
-왜 그리 비관적이야. 두고 봐. 디비전 시리즈는 꼭 갈 거니까.
-이왕이면 월드시리즈가 낫겠지.
-이렇게라도 된 건 성낙기 덕분이야. 최고의 선수야.
-부인할 수 없지. 어느새 1선발 급 활약을 하고 있으니까.
-이번 시즌 끝나면 계약을 다시 해야만 해. 10년에 5천만 불 정도로.
-그 정도로 잡기 힘든 레벨에 올라섰어. 다른 팀들의 입질이 올 거야.
-알렉스 비토 감독이 선수단을 바꿔 놓았어. 다들 의욕이 넘쳐.
-맞아, 내년이 기대되는 팀이지.
마이애미 말린스 팬들의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졌다.
와일드카드로 진출만 하면 1997,2003년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재현할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도 있었다.
특이하게 와일드카드로만 두 번 진출해서 두 번 모두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마이애미였기에 결코 헛된 희망은 아니었다.
마이애미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스윕한 날, ESPN에서는 야구 전문가들이 모여 디비전시리즈를 예측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에일 라몬 캐스터는 중계를 같이해 왔던 듀크 카바니에게 먼저 물었다.
“마이애미가 최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와일드카드를 바라는 팬들이 많아졌습니다.”
“최근 기세가 놀랍긴 하죠. 뉴욕 메츠를 상대로 위닝시리즈를 만들었고 이어서 벌어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3연전을 스윕 했으니까요. 시즌 초반에 흔들리던 선발진과 불펜이 자리를 잡았고 성낙기라는 한국 투수도 아주 잘해주고 있습니다. 알렉스 비토 감독으로 수장이 바뀐 뒤에 팀에 에너지도 넘칩니다. 그러나, 라인업을 보면 뉴욕 메츠를 뛰어넘어 와일드카드를 받아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역시 뉴욕 메츠를 넘어서기는 힘들다고 보시는군요. 토마스 씨는 마이애미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흠… 요즘 마이애미는 상승세고 뉴욕 메츠는 좋은 투수들을 가지고도 어딘지 삐걱대는 모습인데요. 아마 디비전시리즈가 다가올수록 역량을 발휘할 겁니다. 가을 야구의 경험이 마이애미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와일드카드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면 뉴욕 메츠가 유력한 후보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디비전시리즈를 위해서 변칙적인 투수 기용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한 경기에 선발을 두 명 넣을 수도 있는 여력이 뉴욕 메츠에게는 있습니다. 반면, 마이애미는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할 정도로 시즌 초의 예상보다 더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전문가의 예상대로라면 마이애미의 와일드카드는 힘들겠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예상은 예상일뿐입니다. 마이애미가 힘을 내서 더 흥미진진한 경기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팬들이 원하는 것도 치열한 경기입니다. 이상, 내셔널리그 동부지구를 분석해 봤는데 서부지구도 순위권 다툼이 대단하죠?”
***
마이애미의 팬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이애미의 와일드카드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다.
하긴, 뚜렷한 스타가 없는 라인업에 2위를 넘볼 정도면 선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이애미의 오스틴 단장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앞으론 무조건 와일드카드에 초점을 맞추어 주십시오. 하는데 까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결코 우리 팀이 약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야구는 스타 몇이 하는 경기가 아니라 팀워크이니까요.”
살이 찐 얼굴에 안경을 낀 그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마이애미 단장실에 모인 알렉스 비토 감독과 워마린 타격 코치, 셜리번 투수 코치 등에게 오스틴 단장의 이런 말은 압박과 다름없었다.
아니, 협박일 수도 있겠다.
조금 시원찮다고 레인피터 감독을 시즌 중에 경질한 인물 아닌가.
“저도 마이애미 말린스가 약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뉴욕 메츠가 그리 만만한 팀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요. 저번의 위닝 시리즈도 한 선수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팀워크를 말씀하셨는데 그게 몇 개월 만에 짓는 건축물과는 다릅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죠.”
“후훗, 알렉스 비토 감독님 입에서 자신 없다는 말이 나오다니 뜻밖입니다. 제가 영입한 이유를 아실만한 분이… 그리고 시즌 중에 무리해가면서 트레이드를 단행했습니다. 덕분에 타격과 수비가 안정되었고 선발 투수들도 준수합니다. 성낙기는 신인왕에 도전할 만한 선수이기도 하고요.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쩝… 할 말이 없네. 니가 다 해먹어라.”
알렉스 비토 감독이 오스틴 단장의 말끝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도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총력전 가야지요. 1, 2선발은 3일만 쉬고 돌리고 마무리도 급하면 당겨쓰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던지고 쳐야지요.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휴우, 사실은 제가 목이 말라서 그러는 거니 부탁드립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단장과 헤어지고 나오면서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와일드카드…를 위해서 고용된 타짜였구나, 나는.
알렉스 비토 감독은 오스틴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저런, 와일드한 새끼.
***
뉴욕 메츠와의 경기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좁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 경기가 늘어난 3.5게임차로 되레 벌어졌다.
10월 2일 토요일에 끝나는 정규리그가 12일 남은 9월 20일에 성낙기는 LA다저스와의 3연전 중 1차전에 선발로 나섰다.
와일드카드의 향방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3연전이었고 호세 우레나가 2차전, 알칸타라가 3차전에 나설 예정이었다.
뉴욕 메츠는 꼴찌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위닝 시리즈 내지는 3연전 스윕을 예상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다저스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하지 못하면 경기 차는 더 벌어지고 와일드카드는 물 건너갈 것이 뻔했다.
“오늘 다저스 선발이 커쇼지? 성낙기 힘들겠네.”
“혼자 LA다저스를 이끌어가는 투수야. ERA가 무려 2.46에 18승을 이룩했어.”
“맞아, 거룩한 결과야.”
“시즌 끝나고 FA로 풀리는데 마이애미에서 데려오면 좋겠다.”
“틀렸어. 우리 구단주 데릭은 1달러도 목숨처럼 아끼는 스쿠루지 영감을 닮아가고 있거든.”
“뉴욕 메츠가 오늘 지고 우리가 이기면 2.5게임 차로 좁혀질 거야. 와일드카드가 눈앞에 있어.”
“커쇼를 상대로 이기는 건 기적에 가까워.”
“만약, 성낙기가 그렇게 준다면 동양식으로 절을 해주겠어.”
경기 전, 마이애미의 팬들은 성낙기의 승리를 바랐지만 상대 투수가 워낙 강했다.
경기는 LA다저스의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렸다.
미모의 여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국 국가를 불렀고 선수들은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래가 끝나고 성낙기는 관중석 한곳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그리고 매우 반가운 얼굴들이 1루 쪽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앉아 있던 여자애 둘이 성낙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낙기 오빠, 파이팅!”
하나뿐인 여동생 서희였다.
바로 옆엔 장하연이 앉아 있었고 뒷줄엔 아버지 성용구와 엄마 양연숙이 앉아 있었다.
구단이 마련한 깜짝 이벤트였는데 오스틴 단장이 성낙기의 선발 일에 맞춰 가족을 초청한 거였다.
‘어… 국수는 어떻게 하고 여길 오셨지?’
가게를 쉰다는 일이 성낙기에겐 특별하게 받아들여졌다.
명절 때도 딱 하루만 쉬던 엄마였고 아버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엄마에게 이끌려 국수를 삶아왔던 것이다.
성낙기는 손을 흔들며 밝게 웃었다.
오스틴 단장이 가까이 오더니 성낙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특별히 신경을 썼어. 그동안 잘 던져준 보너스야. 물론, 오늘은 더 잘해야겠지?”
오스틴 단장은 자신이 마련한 이벤트라는 걸 빼먹지 않고 말했고 성낙기는 그런 오스틴이 고마워서 손을 마주잡고 흔들어줬다.
서희는 꽤 어른스러워 보였고 장하연은 전에 만날 때보다 더 예뻐졌다.
TV 카메라가 성낙기의 가족이라는 걸 미리 알았는지 그쪽을 비췄고 전광판에 나타난 장하연의 미모를 본 남자들은 탄성을 질렀다.
***
커쇼는 33세로 아직 전성기가 끝나지 않은,
메이저리그 최강의 투수였다.
역시 그답게 폭포수 커브를 곁들이며 마이애미의 타자들을 삼자범퇴 시켰다.
그리고 성낙기가 가족의 응원을 받으면서 1회 말 마운드에 올랐다.
“성낙기 투수의 다저스타디움 데뷔전입니다. 성낙기 투수를 보기 위해 한인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았습니다. 류연진 투수 이후로 이렇게 성공한 한국 투수는 없었는데요. 오늘도 좋은 모습을 이어갈지 궁금해집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1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다저스가 성낙기라는, 매우 흥미로운 투수를 만났습니다. 14승 8패에 ERA 2.69로 최강의 투수 커쇼와 큰 차이가 없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커쇼로서는 오늘 경기를 승으로 장식해야 20승으로 가는 길이 수월해질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성낙기 투수가 초구를 던졌습니다. 바깥쪽에 꽉 차는 포심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합니다. 포수는 리얼무토 대신 채드 왈라치가 나왔습니다.”
“성낙기 투수와 호흡을 잘 맞춰온 포수죠. 알렉스 비토 감독은 리얼무토보다 채드 왈라치가 더 맞다고 생각한 것 같군요. 말하자면, 전담 포수 같은 선수기용이네요.”
다저스의 1번 타자는 야시엘 푸이그였다.
꾸준히 LA다저스 한 팀에서 뛰며 입지를 다져왔고 이번 시즌 0.288의 타율에 18홈런 11도루로 좋은 스탯을 쌓고 있다.
어떤 공이든 자유자재로 쳐내는 재능이 두드러지는 타자이면서 성급한 면이 있다.
하여, 푸이그를 상대하는 투수들은 유인구 위주의 피칭이 일반적이었다.
성낙기는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으며 자신이 다른 투수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렸다.
따악.
파울.
2구로 던진 슬라이더에 파울 타구를 날리는 푸이그. 성낙기는 3구로 라이징패스트볼 사인에 고개를 젓고는 커브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