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093화 재미없게 만드는 거야 2
트라웃.
한때 49도루를 기록한 적도 있을 만큼 발이 빠른 데다 40홈런을 가뿐히 넘기는 슬러거다.
그러면서도 타율은 3할을 웃도는, 단점이 거의 없는 완성형 타자다.
올 시즌도 변함없는 활약 속에 0.297 33홈런을 때려내고 있다.
이 페이스대로면 시즌 막바지에 40홈런을 넘어설 것이다.
리얼무토는 트라웃을 상대하면서도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낸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성낙기는 아무런 고민 없이 사인대로 공을 던졌다.
따악.
공은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 걸쳤고 트라웃은 충분히 때려낼 수 있는 공이라고 판단,
배트를 휘둘렀다.
그러나 성낙기가 던진 슬라이더는 트라웃의 생각보다 배팅 포인트가 높았고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높이 떠올랐다.
2루수 샤일록이 미트를 높이 쳐들었다.
트라웃은 1루로 뛰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된 거지? 1회의 슬라이더 궤적이 아니다.’
트라웃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머릿속에 물음표를 떠올렸다.
1회에 성낙기가 던진 슬라이더는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이었고,
트라웃은 배팅 포인트를 앞에 두면 타구를 잡아당겨 중견수 쪽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성낙기가 던진 슬라이더는 전혀 떨어지지 않고 마치,
사이드암 투수의 슬라이더처럼 횡으로 휘었다.
휘면서도 공이 떨어지지 않아 마치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횡으로 휘다가 떨어지는 일반적인 슬라이더와는 반대의 궤적이다.
공을 받은 리얼무토도 놀랐다.
‘와아, 무슨 슬라이더가 이래? 이건 라이징패스트볼이 휘어지는 것 같네.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
“성낙기 투수 트라웃을 잡아냅니다. 트라웃이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더그아웃으로 들어갑니다.”
“슬라이더 궤적이 독특하군요. 음… 저 볼을 언젠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창 슬라이더냐 아니냐로 논란이 있었죠. 바로 2005년 작고한 헤이드 존의 슬라이더를 보는 것 같아요. 그는 슬라이더의 궤적 두 가지로 타자들을 농락했었죠. 그 공이 한국인인 성낙기에서 구현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납니다. 제가 캐스터를 하기 전이지만 궤적이 특이하다고들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
궤적은 특이했지만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말대로 재미없게 던지는 중이었다.
슬라이더의 스피드도 평소보다 느린 85(136km)마일 내외였고
가끔 던지는 포심패스트볼도 91(146km)마일 정도로 최고 구속 93(150km)에서 힘을 뺀 상태였다.
5번 지명타자를 상대로 던진 88(142km)마일의 투심패스트볼에 타자는 반응하지 않았고 볼이 선언되었다.
참다못한 리얼무토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아니, 왜 전반적으로 공이 느려? 타석에 있는 오타니는 그런 공으로 못 잡아.”
“재미없고 심심하게 하자고 한 게 누군데.”
“그렇다고 공을 전부 다 느리게 던져? 느리면 심심해지냐? 잠이라도 와?”
“아무래도 빠른 공보다는 지루하지 않겠어?”
“와, 너 그동안 그렇게 안 봤는데 지능 지수가… 그만하자. 쟤는 심심하게 던져서는 안 통해. 오타니 쟤한테는 재미있게 가자. OK?”
“재미없자고 했다가 재미있자고 했다가 아주 개 염병을… 응, 알았어. ‘interesting(흥미로운)’으로 가자.”
타석의 쇼헤이는 투타겸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초기엔 부상에 허덕였지만 다시 돌아왔다.
이번 시즌도 변함없었는데 0.314의 타율에 14홈런 41타점의 활약을 보이고 있고
투수로는 8승 3패 ERA 3.12로 양쪽 모두 대단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컨디션 조절이 힘든 속에서도 타격이 꾸준한 걸로 보아 타격에 더 재능이 있을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많다.
하지만 투수로서도 빠지지 않는 성적을 올리다 보니 그런 목소리는 투수를 그만 두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팡.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낮게 들어오다가 치솟은 라이징패스트볼을 보고 쇼헤이의 눈이 커졌다.
그게 스트라이크가 될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가만, 쟤 WBC에서 만났던 친구 아니야? 맞네, 여기서 다시 볼 줄이야.’
쇼헤이는 WBC에서 성낙기에게 맞았던 결승타가 생각났다.
그 공만 아니었어도 우승은 일본이 했을지 모른다.
“빠가…….”
쇼헤이가 저절로 나오는 욕을 집어 삼키며 타격 자세를 잡았다.
처음, mlb에 발을 디딜 땐 모든 게 신기했고 신이 났지만,
그래서 성적도 좋았지만
요즘엔 활발하고 착해 보이는 이미지를 버리는 중이다.
벤치클리어링도 여러 번 했고 얻어맞아도 봤다.
동양인에 대한 텃세도 있다.
쇼헤이는 자신도 모르게 차츰 냉정한 프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저 욕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야로.”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커브 사인을 거부했다.
이어진 슬라이더 사인도. 그러곤 자신이 사인을 냈다.
따악.
퀘이크볼(4cm/5cm).
쇼헤이가 친 퀘이크볼은 배터박스 앞을 크게 튀긴 후에 성낙기의 키를 넘어 2루수 글러브에 들어갔다.
성낙기가 잡을 엄두를 못 낼 만큼 원 바운드로 높이 떠올랐고 체공 시간이 길어진 탓에 2루수 샤일록은 1루로 던지는 걸 포기했다.
쇼헤이의 내야안타였다.
쇼헤이는 1루에 들어가고 나서 고개를 외로 꼬았다.
분명 타이밍이 맞았고 장타를 기대했는데 마지막에 공의 흔들림은 예상 밖이었다.
쇼헤이는 베이스에서 리드 폭을 벌리면서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6번 타자 마르테가 타석에 섰고 리얼무토는 몸 쪽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원 스트라이크를 먹으면서도 타자는 칠 생각이 없었고 2구는 바깥쪽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았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성낙기는 제 3구를 던졌다.
따악.
마르테가 당겨 친 공은 바깥쪽 커브였고 성낙기는 유격수 쪽으로 가는 바운드 볼을 넘어지면서 잡아낸 뒤, 앉은 채로 2루에 공을 던졌다.
그리고 2루수는 쇼헤이보다 먼저 베이스를 밟고 1루로 공을 뿌렸다.
1, 4, 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였다.
원정 온 마이애미 마린스의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1루수 브라이언은 성낙기를 향해 엄지를 올렸다.
너무나 다이내믹한 호수비에 리얼무토도 믿어지지 않는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성낙기를 보며 WOW!를 연발했다.
하지만 이건 모두 타구를 잡으려 움직이는 순간,
[짐 캇의 수비력(4단계/5단계)이 발동됩니다]
머리 위에 글귀가 떴고 성낙기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무리 없이 2루로 송구했다.
그렇게 2회가 끝나고 나자 LA에이절스는 정말로 심심해져 버렸다.
관중석의 팬들도 시무룩한 표정들이었다.
하품을 하는가 하면 경기를 보다가 자기들끼리 노닥거리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3회가 가고 4회가 지나가자 LA에인절스 더그아웃은,
서서 경기를 보는 선수들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다.
***
마이애미 말린스도 재미없게 경기하기는 마찬가지여서 4회에 솔로 홈런을 하나 쳤고 5회에도 솔로 홈런을 하나 쳤다.
관중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찬스가 이어지고 도루도 하고 공도 빠뜨리고,
뭐 이래야 소리라도 지르고 흥미가 있는 것인데,
이 경기는 무언가 선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같기는 한데 스토리가 하나도 없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6회에도 마운드에 올라가면서 성낙기가 리얼무토에게 말했다.
“참, 내가 던지면서도 이렇게 재미없는 경기는 처음이야. 리얼무토는 어때?”
“경기를 재미로 하냐? 이기려고 이 고생을 하는 거지. 이제 작전을 좀 바꿔서 포심패스트볼로 카운트 잡고 체인지업으로 끝내자. 거기에 가끔 느린 커브를 섞어.”
“응, 알겠다.”
“이제 곧 종점이야. 도착해서 쉬는 것과 중간에 사고가 난 풍경은 매우 다르지.”
리얼무토는 안 그래도 재미없는 성낙기에게 잠 쏟아지는 말을 하고 홈플레이트에 가 앉았다. 5회까지 3안타만을 허용한 성낙기를 상대하기 위해 4번 타자가 들어섰다.
2회와 4회에 상대했던 트라웃이다.
2회엔 2루수 플라이 아웃, 4회엔 파울 홈런을 하나 맞은 뒤, 우익수 앞 안타를 내줬다.
3번째 승부니 어느 정도 성낙기의 공이 눈에 익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면에서 패턴을 바꾸자는 리얼무토의 말은 베테랑다웠다.
팡.
포심패스트볼 93(150km)마일.
“스트라이크.”
트라웃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움찔했고 공은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두 번의 승부에서 기껏해야 91(146km)마일을 던지던 투수의 공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포심패스트볼은 한두 개에 그쳤고
나머지는 모두 느린 변화구였다.
“헤이, 리얼무토. 이게 말이 돼? 갑자기 공이 빨라졌는데 지금까지 일부러 느리게 던진 거야?”
“글쎄, 저 투수는 워낙 망나니새끼라서 나도 잘 몰라. 난 쟤가 던지면 받을 뿐이야.”
“그래? 철학자가 모르는 것도 있었군.”
따악.
파울.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 슬라이더에 트라웃이 배트를 돌렸다.
타구는 1루 관중석 상단에 강하게 맞고 그라운드로 들어왔다.
“역시, 배팅이 날카롭군. 그 정도 보여줬으면 됐으니까 대충 휘두르고 들어가 줘.”
“천만에, 내가 너 대신 저 망나니를 길들여 줄게.”
리얼무토와 트라웃이 신경전을 벌였고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성낙기는 리얼무토에게 사인을 냈다.
그리고 와인드업을 한 뒤, 강하게 공을 뿌렸다.
슈우욱!
팡.
전광석화(電光石火)-97.5(157km)마일.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트라웃은 미트에 들어간 공과 자신이 들고 있는 배트를 번갈아 보았다.
바깥쪽에 들어온 공이었는데 공이 들어오고 나서 배트가 돌았다.
아까 성낙기가 던진 93(150km)의 포심패스트볼 구속에 맞춘 스윙은 4(7km)마일이나 빨라진 공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트라웃은 한참 동안 배터박스에서 움직이지 않다가 주심의 말을 듣고서야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성낙기는 5번 타자 쇼헤이에게는 빠른 공 대신 슬라이더와 커브로 카운트를 잡은 뒤에,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포크볼을 던져 삼진을 잡았다.
‘포크볼을 던져……?’
쇼헤이는 타석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이 성낙기라는 투수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2회의 안타가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낙기의 포크볼은 예상 밖이었다.
성낙기는 쇼헤이를 돌려세우고 숨을 골랐다.
성낙기가 아는 쇼헤이는 강속구에 강한 타자였다.
타이밍을 빼앗으면 모르지만 100(161km)마일이 안 되는 공으로 돌려세우기 힘들다.
더구나 100마일 이상을 던지는 투수다.
***
6회의 막강한 타선을 잠재운 성낙기는 8회까지 92구를 던지며 LA에인절스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사실, 이 승리는 온전히 리얼무토의 작전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평범하게 보였던 공을 에인절스 타자들이 건드려 줬고
마이애미 내야수들은 반복 훈련 못지않은 체력 저하를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오는 공을 솜씨 있게 처리했다.
[체력이 17 남았습니다]
8회가 끝나고 성낙기의 눈앞에 떠오른 글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