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089화 워싱턴 내셔널스 1
따악.
파울.
볼.
볼.
파울.
시에라가 세 번째 타석이어서 적응이 좀 되었는지 루이스 시크릿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풀 카운트까지 볼 카운트를 몰고 갔다. 루이스 시크릿의 얼굴에 성가신 듯 인상이 그려진다.
따악.
바깥쪽으로 커브가 들어왔고 시에라가 친 공은 3루 강습 타구였다.
3루수 글레이버 토레스가 바운드 된 공을 잡다가 그라운드에 흘렸고 다시 잡아 1루에 뿌렸지만 세이프, 마이애미로서는 가장 좋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다음으로 나온 스탈린 카스트로의 유격수 땅볼 때 6-4-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가 나오는 바람에 찬물을 끼얹었다.
8번 타자 카메론 메이빈 역시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 마이애미의 7회 초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성낙기는 7회까지 던지고 마운드를 불펜 추격조에 넘겼고 성낙기에 이어 나온 댄 스트레일리가 8회에 대거 3실점을 하는 바람에 경기가 확 기울어 버렸다.
그리고 경기는 그렇게 성낙기가 패를 안으면서 끝났다. 루이스 시크릿은 완봉승으로 경기의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다.
***
“모처럼 오셨는데 패하는 모습만 보여드렸네요.”
“아니에요. 7이닝 2실점이면 너무 잘 던졌어요. 타선이 터지지 않았고 상대 투수가 워낙 잘 던지는 투수라서 그런 거니 자책하지 말아요.”
경기가 끝나고 성낙기는 브롱스 호텔 식당에서 김아경과 랍스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김아경은 오랜만에 만난 성낙기가 반가웠는지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고 성낙기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언젠가 삼호슈퍼스타즈에서 김아경에게 1패도 하지 않겠다며 큰소리쳤던 생각이 떠올랐다. 거짓말처럼 그날 이후로 패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경기장을 찾는 김아경 앞에서 패를 기록했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낙기 씨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팬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면서 모두들 놀라워하고 있죠. 덕분에 저도 아주 선견지명이 뛰어나고 선수를 잘 보는 야구 매니저로 평가되고 있어요. 잘해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메이저리그에 와서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단 걸 깨달았어요. 방어율도 그렇고 패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죠. 어떻게 된 게 애들은 빗맞아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구위나 변화구는 낙기 씨 넘어설 투수가 많지 않아요. 다만,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볼 배합이라든가 유인구 타이밍을 못 잡을 때가 간혹 보였어요. 그렇지만 앞으로 달라질 거라고 확신해요. 이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성낙기는 어쭙잖은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야구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성낙기 앞의 여자는 여자이기 이전에 삼호슈퍼스타즈 구단주의 딸이고 탁월한 선수 수급으로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린 야구 박사다. 둘은 자리를 옮겨 와인 바로 들어갔고 옛 추억을 되새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낙기 씨는 여자 친구 없어요?”
“여자 친구요?”
“네.”
“있을 리가 없죠.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자 친구가 있겠어요. 그럴 만한 나이도 아니고요.”
“24세면 꽤 늙은 건데요?”
와인을 마시며 김아경이 난데없는 질문을 했다.
그냥 해보는 말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가만 있자 그러니까, 김아경은 나이가 몇이지?
처음 봤을 때가 27세였는데 이젠 29세겠구나. 성낙기는 창 너머로 뉴욕의 야경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재벌의 위치에 오른 김아경, 게다가 아직 20대의 여자와 단둘이 이국땅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의 위치에 있는 여자들이 야구 선수와 몰래 데이트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김아경이 야구광이라 해도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 술까지 마시는 일은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다.
‘혹시 이 사람이 날 좋아하는 건가……? 에이, 아니겠지.’
“무슨 생각해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제가 맞춰 볼까요?”
“헐, 마치 제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씀하시네.”
“들어갔다 나왔걸랑요?”
“한 야구 선수의 꿈이라는 메이저리그 진출도 도와주신 것도 그런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응원까지 해주시니 사실은, 어떻게 고마움을 다 갚을지 모르겠어요.”
“모르시겠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에요.”
“음 그러니까, 뭐랄까… 잘은 모르겠어요.”
“흥, 다 말면서 내숭 떠시는 거 봐. 좋아한다는 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 알겠어요?”
“…어떻게 저를 좋아하실 수가 있죠?”
“낙기 씨가 뭐 어때서요. 유명한 야구 선수이고 메이저리그를 씹어먹…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미안해요. 괜히 부담만 준 것 같네. 나잇값도 못 하고… 하하.”
“저는 처음 뵀을 때부터 좋아했는데요.”
만약 허봉호 감독 같은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미국까지 가서 지랄 염병을 떨고 있다고 했겠지만 둘은 나름 진지했고 한층 더 가까워진 마음을 나누며 밤늦게까지 잔을 기울였다.
***
다음 날, 오스틴 단장이 알렉스 비토 감독을 호출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전화를 받고 오스틴 단장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짐작했다.
레인 피터 감독을 경질하고 자신이 팀을 맡은 후로 성적은 더 안 좋아졌다. 보나마나 잔소리나 늘어놓겠지, 라고 생각한 알렉스 비토 감독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
“어서 오십시오.”
단장실에 들어가니 오스틴 단장이 밝게 웃으며 일어섰다.
‘흥, 능구렁이로군.’
알렉스 비토 감독은 의자에 앉으면서 속내를 비치지 않는 오스틴 단장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아, 하하. 별거 아닙니다. 그저 오랜만에 커피나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려는 뜻이지요.”
“그래요? 다 알고 왔는데 말을 빙빙 돌리시네.”
“뭘 말입니까?”
“성적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거 알고 있소. 물론, 답답하겠지만 차츰 나아질 거요. 내가 원래 좀 슬로우 스타터지.”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성적을 따져 물으려는 게 아닙니다. 상의할 일이 있어서 모셨지요.”
“무슨……?”
“현재 마이애미의 라인업에 대한 말씀입니다. 리빌딩 기간이고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서 앞날이 어두운 것만은 아닌데 팬들을 생각해야 하는 단장 입장으로 보면 어딘가 부족하다 싶습니다.”
“그야… 스타급 선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연봉 선수들로 팀을 만들어 놓았으니 부족하지 않을 리가 없겠죠. 하지만, 경기를 치르면서 나아지는 중입니다. 성적은 나고 있지 않지만 쉽게 경기를 내주는 일은 없어지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무기력하게 지는 경기는 거의 없었죠. 그런데 선수들의 기량 향상이 더딘 게 문제입니다. 어제 양키스 같은 팀을 보면 주전들이 거의 올스타급이지요. 그에 비해 우리는 양키스의 백업 선수들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
“현재 1군에 있지만 활약을 보이지 못하는 30대 선수들을 정리하겠습니다. 미겔 로하스, 저스틴 보어, 브라이언 할러데이 등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싹 갈아엎고 다른 팀의 유망주를 데려와 키우겠습니다. 감독님, 선수 보는 눈이 탁월하시죠?”
“트레이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30이 훌쩍 넘은 선수들을 모두 정리하고 새판을 짜겠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젊은 선수들을 키우느라 기회를 제한해서 그렇지 약팀에 가면 주전으로 뛸 만한 선수들입니다.”
“크허… 마이애미보다 약팀이 어디 있다고.”
“트레이드는 카드를 내밀지 않고는 모르는 법입니다. 탐나는 유망주가 있으면 추천해 주십시오. 단, 드러난 유망주는 안 됩니다. 어차피 매물로 내놓지도 않을 거고요.”
“모래밭에서 진주 캐라는 소리군.”
“미안하지만 그렇습니다.”
오스틴 단장과 헤어져 돌아오는 알렉스 비토 감독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오스틴 단장이 원하는 바를 잘 알았고 머릿속에 꼭 데려왔으면 싶은 선수들 몇이 떠올랐다.
***
올스타전을 이틀 앞둔 7월 14일, 오스틴 단장은 5:3 트레이드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2루수 샤일록과 좌익수 디카엘로, 불펜투수 해리슨을 데려왔다.
모두 20대 초중반의 유망주들이었는데 알렉스 비토 감독이 점찍은 선수들이었다.
그들의 영입은 말하자면, 마이애미의 좌익수 카메론 메이빈과 2루를 맡고 있는 야디엘 리베라의 플레이를 알렉스 감독이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요즘 나왔다 하면 볼넷을 주기 일쑤인 닉 위트그랜과 실점 기계 댄 스트레일리의 마이너행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마이애미가 제시한 즉시 전력 카드와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못 잡은 루키들과의 교환이었다.
그리고 뜻밖의 영입도 있었는데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꼴찌인, 예전에 드랙 실바가 전설을 써내려갔던 인디아나닥스의 트리플A에서 35세의 볼펜투수 스튜크를 데려왔다.
최대한 노장을 배제하던 오스틴 단장의 영입으로는 매우 뜻밖이었는데, 이미 한물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스피드는 살아 있습니다.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이고 습관 때문에 구종이 노출되는 단점을 고치면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체인지업 같은 구질을 추가하면 꽤 쓸 만할 겁니다.”
“체인지업? 그걸 셜리번 자네가 가르치겠다고? 구종 하나를 추가하는데 1년 걸리는 투수도 많아.”
“아뇨, 성낙기에게 2주 배운 딜런 피터스가 체인지업을 종종 던져서 재미를 봤습니다.”
“딜런 피터스의 그 체인지업이 겨우 2주 배운 거였다고?”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재능이 저보다 낫더군요. 제가 투수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팬 파일러의 제구력에 도움을 주고 있죠.”
“하… 별일이 다 있네. 24세가 35세의 베테랑을 가르칠 거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스튜크를 영입하기 전의 오스틴과 셜리번의 대화였는데, 사실 딜런 피터스에게 성낙기가 가르쳐 준 체인지업은 드랙 실바의 조언을 그대로 옮겨줬기 때문이었다.
즉, 성낙기의 능력이 아닌 실바의 가르침인데 셜리번 코치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마이애미 선수들은 뜻밖의 트레이드에 당황했다. 나이 든 선수들의 이동은 어떻게 보면 매우 냉정했다.
그간 팀에 대한 공헌도는 아예 무시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인데, 프로 세계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젠장, 나도 머지않았어. 마이애미에 모든 생활 터전을 마련해 놨는데 조마조마한 심정이야.”
외야수이면서 0.257의 타율에 7홈런에 그치고 있는 카메론 메이빈이 마그뉴리스 시에라에게 한 말이었는데 팀의 6번 타자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시에라에 비해 메이빈은 8번까지 밀려나 있어서 지금 당장 마이너리그로 내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수비 부담이 적은 외야수이면서 타율도 낮은 데다 홈런 개수마저 빈약해서 안정된 수비 하나로 버티기엔 모자랐다.
그러던 차에 트레이드로 오게 된 선수 중, 자신과 포지션이 겹치는 좌익수 디카엘로로 인해 하루하루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간당간당해. 이 팀에 오스틴 단장이 있는 한, 나이가 들면 일찌감치 떠나는 게 좋아.”
메이빈과 시에라의 간단한 대화만으로도 마이애미 선수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을 알만 했는데, 타율이 괜찮은 두엇을 빼고는 모두 고만고만하고 수비도 강한 편이 아니라서 다른 선수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
전반기가 끝났고 올스타전이 열렸다. 마이애미에서 올스타에 뽑힌 선수는 감독 추천으로 리얼무토가 선택이 되었는데, 마이매미 말린스에서는 유일했다.
그러므로 마이애미 자체적으로도 별로 흥이 나는 올스타전이 아니었고 팀의 성적을 볼 때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전반기가 끝난 7월 중순, 마이애미 말린스는 4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 고액 연봉자들을 싹 정리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매트리스를 깔아주고 있다는 게 고마울 정도로 팀 성적이 변변치 못하다.
오스틴 단장과 알렉스 비토 감독은 이번에 단행한 트레이드가 선수단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후반기에 치고 나갈 시너지 효과로 작용하길 원했다.
현실적인 목표는 디비전 시리즈였는데 워싱턴 내셔널스와 뉴욕 메츠의 탄탄한 수비 조직력과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갈 길이 요원해 보였다.
라인업에 든 선수들의 연봉 차이부터 심했는데 연봉은 곧 실력과 비례하는 것이니 객관적으로 봐도 불가능한 목표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