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088화 악의 제국 5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초구로 몸 쪽을 공략했는데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던 공이 떠오르면서 타자의 가슴 언저리로 들어갔다.
전 경기 같으면 몸 쪽 낮은 코스로 던져서 타자의 배꼽 부위에서 존을 형성했는데 방금은 스트라이크 존을 많이 벗어난 유인구였다.
‘크으, 속았어. 패턴을 완전히 바꿨군. 그렇다고 당할 수만은 없지.’
게리 산체스는 심호흡을 하며 집중력 있게 2구를 기다렸다. 이번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이 들어왔다. 게리 산체스는 이번 공 역시 유인구라고 생각하고 나가려는 배트를 억눌렀다.
팡.
“스트라이크.”
‘뭐야, 투심이었어?’
게리 산체스는 당황했다. 멀게 느껴지는 공이었고 원 스트라이크를 잡은 이상, 한 번 더 유인구를 던질 거라고 봤는데 스트라이크였다.
비록, 2할 중반의 타율이지만 홈런은 벌써 11개로 20홈런 페이스가 넘는 자신에게 어려운 승부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부터 착각이었다.
볼질로 패턴을 바꿨다고 생각하고 참은 2구였는데 실은, 볼질로 바꾼 게 아니라 순서만 바꾸었을 뿐 성낙기의 공격적인 투구 본능은 그대로였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3구는 게리 산체스의 몸 쪽으로 파고드는 포심패스트볼이었다. 3구를 던지기 전부터 이번에야말로 유인구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비슷하면 무조건 친다는 개념이 아니라, 유인구에 속지 않고 볼 카운트를 더 끌고 갈 생각이 게리 산체스의 의식에 있었고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몸 쪽으로 공이 들어올 때 분명 브레이킹 볼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공은 반듯하게 들어와 포수 미트에 꽂혔고 주심은 손을 들었다. 2회 말, 양기스의 공격은 그렇게 루킹(looking) 삼진으로 끝났다.
성낙기는 3회에 텍사스 성 안타 하나와 4회엔 유격수 실책에 볼넷을 내줬지만 양키스의 강타선을 잘 막아냈고 경기는 어느덧 6회 말이었다. 선두 타자는 슬러거인 3번 타자 아론 저지였다.
‘화, 쟤는 볼 때마다 오줌 지리겠네. 차라리 레슬링을 하지, 왜 야구를 하는 거야.’
타석에 떡 버티고 선 아론 저지를 보고 성낙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턱뼈가 도드라진 게 딱 봐도 거인의 포스다.
저런 몸으로 나름 정교하고 순발력이 요구되는 야구를 어떻게 하는 걸까 싶을 때 리얼무토가 잠시 타임을 걸더니 일어서서 헬멧과 마스크를 고쳐 쓴다.
확실히 노련하긴 한 것 같다. 조심해야 할 타자이니 신중하게 승부하자는 무언의 몸짓을 성낙기에게 보내는 리얼무토.
“쟤 잘 던지는데? 어디서 왔대?”
“사우스 코리아.”
리얼무토의 대답을 들은 아론 저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배트를 두어 차례 붕붕 돌렸다. 일요일이어서 관중은 매진이었는데,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는 양키스라면 관중들이 들어차는 것은 당연했다.
***
그 시각, 한국 하고도 강릉의 한 아파트엔 젊은 남자들 몇이 어울려 TV를 시청 중이었는데 그들은 바로 김석문과 공성진, 이중호, 구문철, 그리고 엔서니페킨스였다.
김석문의 아파트 거실엔 액션영화 마니아답게 커다란 TV가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었는데 바로 그 TV에 성낙기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야아, 아론 저지 나왔다. 우어… 저 덩치 좀 봐. 중호도 쟤랑 서면 작아 보이겠다.”
김석문이 TV를 보며 아론 저지와 이중호를 비교했다. 이중호도 그 말을 인정하는 듯 상기된 표정을 지었고 공성진은 무언가 생각이 많은 얼굴이다. 마치,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하는 얼굴.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하하, 참 배짱하나는 대단하다. 아론 저지 상대로 몸 쪽 하이패스트볼을 던지다니.”
“덩치에 쫄면 투수 못하죠. 저런 선수들은 공격적으로 나가면 오히려 당황해요.”
공성진이 김석문의 말에 다른 의견을 냈다.
“성낙기 공이 많이 좋아졌네. 지금이라면 나도 거의 못 칠 것 같아.”
그리고 이중호가 거들었다.
“너 지금 50홈런 페이스잖아. 슬러거가 그런 말하면 안 되지.”
구문철이 이중호에게 말했다.
“성진이도 계약 끝나면 도전해 보는 게 어때. 한국 나이 32세면 충분해 보이는데?”
“선배도 참, 그건 그때 되어 봐야 알죠. 그리고 저보단 엔서니 페킨스가 빠르겠죠.”
공성진에 대한 김석문의 말처럼, mlb스카우트들의 리스트엔 공성진이 들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
성낙기는 아론 저지를 향해 2구를 던졌다. 1구 하이패스트볼 다음, 바깥쪽 커브볼이었다. 드랙실바 전성기의 83%의 각과 예리함을 갖춘 커브. 그 정도만으로도 상당한 회전력과 뚝 떨어지는 궤적의 공이다.
따악.
아론 저지가 바깥쪽 커브를 받아쳤고 타구는 높이 솟아올랐다.
중견수 마그누리스 시에라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면서 타구를 바라보았다.
리얼무토는 마스트를 벗고 공의 궤적을 좆았고 외야 관중석에 앉은 관중들은 처음엔 가만있다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괴력입니다. 저런 발사각으로 홈런을 만들어 버리네요. 아론 저지를 보면 가끔 인간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홈-런!”
“성낙기 투수의 예리한 커브를 잡아 당겼어요. 초구 하이패스트볼 다음, 브레이킹 볼이 올 걸 예상한 것 같군요. 비거리는 130m 정도에 불과합니다만, 중요한 1점을 추가하는 뉴욕 양키스입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아론 저지의 홈런을 보며 흥분했고 구장은 관중들의 환호로 뜨거워졌다.
단 한 사람, 김아경은 시무룩한 표정에 울상이 되어 성낙기를 아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공의 아래 부분을 타격한, 빗맞은 공을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힘을 보여준 아론 저지는 홈플레이트를 밟고 나서 1점이라는 뜻으로 손가락 하나를 펴보였다.
“5, 6번이 컨디션 안 좋으니까 다음 타자는 최대한 어렵게 가자. OK?”
“아니, 쉽게 갈 거야. 강속구를 두어 개 던질게. 난 최대한 빠른 승부를 원해.”
“…못 말리겠네. 네가 핏불테리어야? 돌아갈 줄도 알아야 진정한 프로가 되는 거야.”
“응, 알았어. 프로답게 정면 승부 해야지.”
리얼무토는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홈플레이트로 돌아왔다.
***
산 너머 산이다. 지금 성낙기가 상대해야 하는 타자는 아론 저지보다 한 수 위의 타자다. 바로 mlb를 뒤흔드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배트를 휘두르며 들어서는 모습부터 엄청난 포스가 물씬 풍긴다. 관중들이 스탠튼에게 소리쳤다.
“좋아, 지안카를로 한 방 날려!”
“백투백 나오겠네.”
“하나 칠 때 됐어. 그러고 나면 오줌 지리고 강판될 거야.”
“고의 볼넷이겠지.”
오늘 성낙기의 유일한 볼넷은 스탠튼에게 허용한 거였다. 리얼무토의 사인대로 유인구 위주의 승부를 했는데 스탠튼은 보기보다 끈질겼고 스리 투 풀카운트에서 던진 포크볼에도 말려들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이 좋다는 증거다.
팡.
전광석화(電光石火)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성낙기는 바깥쪽 낮은 코스로 97(156km)마일의 공을 던졌다.
대기 타석에서 성낙기의 포심패스트볼에 타이밍을 재보며 스윙 연습을 했던 스탠튼은 느닷없는 강속구에 배트가 늦었다.
코스도 낮게 잘 제구 된 데다 살아 있는 볼 끝의 97마일은 스탠튼이라도 손대기 힘든 공이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이 들어왔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스탠튼은 눈을 껌벅거리며 성낙기를 응시했다. 손이 얼얼할 정도의 공을 미트로 받아낸 리얼무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성낙기에게 공을 던졌다.
방금과 같은 스피드에 기가 막힌 제구라면 스탠튼도 잡아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리얼무토는 성낙기의 사인을 보았다. 또다시 강속구를 던지겠다는 사인이다.
따악.
전광석화(電光石火).
파울.
이번 역시 바깥쪽으로 제구 된 높은 코스의 공이었는데 스탠튼이 타이밍을 잡고 걷어냈다. 하지만, 빠른 종속까지는 계산에 없었는지 배트가 밀렸다.
타구는 1루 측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노볼 투 스트라이크로 볼 카운트가 몰린 스탠튼은 배트가 괜찮은지 확인한 뒤, 타격 자세를 잡았다.
성낙기는 다시 한 번 바깥쪽 코스로 공을 던졌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탠튼은 갑자기 느려진 공이 아래로 꺼지자 타이밍을 잃었다.
양 무릎을 구부리며 공의 변화에 따라 아까보다 아래쪽에서 배트를 내밀었지만 공은 미트에 꽂힌 뒤였다.
경기를 지켜보던 양키스 팬들이 탄식을 흘렸다.
mlb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 스탠튼이 KBO리그에서 온 투수에게 삼구 삼진을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탠튼은 다소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성낙기를 바라보다가 뒤돌아섰고, 리얼무토는 성낙기에게 공을 던져주며 희열을 느꼈다.
방금 던진 체인지업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다가 아래로 가라앉았는데, 코스 자체가 포심패스트볼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타자들이 속지 않을 도리가 없다.
꺾임이 좋은 체인지업이라도 타자 앞에서 스트라이크처럼 보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뿐인데 성낙기가 던진 체인지업은 그런 면에서 일품이었다.
성낙기는 심호흡을 하고 다음 타자를 맞았다. 스탠튼을 잡았으나 갈 길이 멀다. 이제 겨우 6회 말 원아웃일 뿐이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85로 오릅니다]
[포심패스트볼의 제구력이 90으로 오릅니다.]
[체력이 18 남았습니다.]
성낙기 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스탯이 오른 건 참 오랜만이다. 타석엔 무시할 수 없는 타자 그렉 버드가 서 있었다.
현재까지 던진 성낙기의 투구 수는 84구였는데 그 중 전력으로 던진 포심패스트볼만 40구가 넘었다. 나머지 20구 정도는 속도 조절을 하느라 144~145km에 머물렀고 30구에 가까운 변화구와 전광석화 등을 사용했다.
체력이 17이면 전력투구로 17구를 던진다는 소리고 변화구를 좀 섞으면 25구 정도는 가능하다는 계산이 선다.
‘체력이 17이라… 7회가 맥시멈인가? 휴, 이놈의 체력은 도무지 오를 줄을 모르네.’
[체력이 86으로 오릅니다.]
그때 성낙기 앞에 글귀가 나타나면서 85에서 86으로 찔끔 올려주는 센스를 보이는 상태창이다. 사람 말을 듣는 귀가 있는지 투정을 부릴 때 조금 올려주는 경향이 있다.
5번 타자 그렉 버드는 7월 초 현재 15홈런에 36타점을 기록하고 있는 지명타자다.
성낙기는 1구로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따악.
“아웃!”
주심의 콜이 떨어졌고 라인드라이브를 잡은 유격수가 2루로 공을 돌렸다. 이로서 투아웃이었고 초구를 건드려 준 덕분에 투수 수가 절약되었다.
일이 되려고 그러는지 6번 타자도 3구만에 1루 땅볼로 물러났다. 7회에도 빠른 승부가 된다면 8회까지도 가능한 체력이 남는다.
‘휴, 8회까지 던지면 뭐하나. 시크릿인가 지랄인가가 저렇게나 잘 던지는데.’
성낙기는 더그아웃으로 향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바쁜데 솔로 홈런까지 얻어맞고 나니 역시 메이저리그는 메이저리그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그아웃이 가까워지자 김아경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성낙기는 마주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쟤는 홈런을 맞고도 뭐가 기분이 좋다고 저러는지… 살짝 맛이 간 건가? 아니면, 원래 낙천적인 성격인가.’
알렉스 비토 감독이 성낙기의 행동을 보고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7회엔 어떻게든 루이스 시크릿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지금까지 산발 5안타를 뽑아냈을 뿐 도무지 득점권에 나가본 적도 없다.
2루 베이스를 아직까지 밟아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다 7회 타순은 6번 타자부터여서 별 기대감도 안 생긴다.
‘이렇게 경기가 안 풀릴 땐 발 빠른 타자가 기습번트라도 대야 하는데… 준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 감독 질 해먹기 힘드네.’
알렉스 비토 감독은 겨우 2점을 지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타선에 한숨이 났다.
가끔 큰 거 한 방씩은 곧잘 날리기도 하는데 연속 안타가 나온다거나 주루 플레이가 공격적이라거나 그런 게 잘 보이지 않는다.
타석에 마그뉴리스 시에라가 섰고 루이스 시크릿은 자신에 넘치는 얼굴로 초구부터 98.2(158km)마일의 공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