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087화 악의 제국 4
“1회부터 주자를 내보내는 건 오랜만에 봐요. 양키스가 메이저리그의 강팀이라는 걸 알겠어요.”
“잘 헤쳐 나갈 겁니다. 워낙 구종이 다양하기 때문에 노리고 칠 수가 없는 공입니다.”
“그렇겠죠?”
김아경은 정진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운드 위의 성낙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선수다. 퓨처스리그에서 느린공으로도 곧잘 던질 때부터 인상적이었는데 어느덧 지구 최강의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에서 당당히 선발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처음, 메이저리그 계약을 할 때도 이 정도로 잘하리라곤 예상 못 했다. 그저 가능성을 믿기로 했고 되도록 선발을 맡아서 버텨주기만을 바랐다.
‘내가 왔다고 긴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설마 그러진 않겠지?’
관중석의 김아경은 성낙기가 자신 때문에 흔들리기라도 할까봐 걱정이었다. 워낙 천진난만한 선수이니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영향이 있을까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그리고 타석엔 아론 저지가 201cm에 125kg의 육중한 몸으로 서 있었다. KBO에선 아무리 크다 해도 190cm가 조금 넘는 게 고작인데 mlb는 2m가 넘는 선수들이 팀에 몇 명씩은 있는 것 같고 몸무게도 대단해서 타석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보는 사람을 긴장시키는 면이 있다. 지금의 김아경이 그랬다.
‘오, 크다. 저 몸으로 외야수를 맡고 있다니 대단한데?’
마운드의 성낙기는 자신이 투수라는 것도 잊고 상대 선수에 감탄하고 있었다. 보통의 투수라면 위압감부터 느껴야 정상인데 성낙기는 그런 모습이 없다.
1루 주자는 호시탐탐 2루를 노리고 있고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는 거구의 몸으로 0.279의 타율에 17홈런을 때려내고 있는 선수다. 그런 타자 앞에서 감탄이나 하고 있는 걸 누군가 안다면 나사가 하나 빠졌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사람이 사람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저 투수가 브라이스 하퍼를 엿 먹였다는 그 친군가? 생긴 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뛰어내리다 바위에 부딪힌 놈 같은데 치기 힘든 공을 던지나 보군.’
파앙.
퀘이크볼(4cm/5cm).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아론 저지는 스윙을 하고 나서 큰 눈동자를 굴렸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많아진 것인데, 공의 궤적이 이상하다. 약간 솟구치는 듯했다가 가라앉는 궤적에 스윙을 맞췄는데 성낙기가 던진 공은 마지막에 다시 살짝 떠올랐다.
‘이거 뭐야. 라이징패스트볼도 아니고… 이게 영상으로 봤던 퀘이크 볼인가? 영상에선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다가 다시 가라앉는 공이었는데 방금 공은 궤적이 다르다.’
아론 저지의 의문처럼 성낙기의 퀘이크볼은 묘한 데가 있다.
너클 볼을 제외하면 모든 변화구가 한 두 차례의 변화로 타자와 승부하게 되는데 퀘이크볼은 하나의 궤적이 더 많다.
볼 끝 좋은 투수가 슬라이더를 던져 타자 앞에서 솟아오르는 듯하다가 뚝 떨어지면, 타자는 두 가지의 궤적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데 퀘이크볼은 하나의 궤적이 더 있는 까다로운 공이다.
거기에 더하여, 처음엔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마지막에 다시 가라앉는 공과 처음부터 떠오르다가 가라앉고 마지막에 다시 떠오르는 두 가지의 변화가 있다. 비록, 가라앉을 때와 떠오를 때의 높낮이가 4cm에 머무는 작은 변화지만 그것만으로도 타자들은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맞춘다 하더라도 정타가 드문 이유다.
아론 저지는 성낙기의 공을 4D 영상으로 보면서 각종 변화구에 배트를 돌렸던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투구 폼과 공이 타석에 도달하는 타이밍 등에는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만 방금처럼 거의 던지지 않았던 궤적의 공에는 답이 없다.
‘저거 괴물 아니야?’
팡.
“스트라이크.”
아론 저지가 성낙기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몸 쪽으로 투심패스트볼이 꺾여 들어왔다.
아론 저지는 반응하지 못했고 공을 받은 리얼무토가 급하게 홈플레이트에서 일어났다.
“글레이버 토레스가 2루로 뜁니다. 리얼무토 2루로 공을 던집니다. 아, 2루심이 세이프를 선언하는군요. 글레이버의 발이 조금 빨랐습니다. 이로서 18도루째를 기록하는 글레이버!”
“역시 빠른 발입니다. 리얼무토의 송구가 왼쪽으로 조금 치우쳤죠? 그 순간의 틈을 글레이버가 파고드네요. 성낙기 투수 1회부터 득점권을 허용하는군요.”
아론 저지가 투 스트라이크를 먹는 동안, 글레이버는 빠른 타임에 승부를 걸었고 몸 쪽으로 들어온 공은 리얼무토의 송구에 영향을 끼쳤다.
성낙기는 양키스 타자들의 기민한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다.
성낙기는 로진백을 만지며 다음에 던질 공을 생각했다.
그리고 와인드업.
팡.
휘잉.
“스트라이크 아웃!”
양키스가 보이는 빠른 움직임처럼 성낙기도 빠른 승부구를 던졌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포크볼이 타자의 바깥쪽으로 날아가다가 아래쪽으로 훅, 꺾였다.
아론 저지는 헛스윙을 하고 나서 몸의 중심을 잃고 홈플레이트에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겨우 일어나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성낙기를 힐끗, 노려보았다.
“초구가 문제였어. 그 공에 아론이 평정심을 잃었어. 궤적이 특이했거든.”
양키스의 타격 코치 프레이드가 벤스타민 배터리 코치에게 말했다.
“누구나 두세 개의 패턴 안에서 공을 던지지. 우리는 그에 맞춰서 저 투수를 분석했고 글레이버의 타격을 보고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주 눈치가 빠른 놈이야. 전에 던지지 않았던 패턴과 공 위주로 투구를 하고 있어.”
벤스타민 코치가 대답 대신 성낙기의 투구에 대해 말했다.
“아직 속단은 일러. 사람은 언젠가는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마치 연어처럼 말이야. 성낙기와 리얼무토도 몇 회가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익숙했던 패턴으로 돌아갈 거야. 스탠튼은 거르겠지?”
프레이드 타격 코치가 기회를 엿보는 사냥꾼처럼 1회 이후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타석에 지안카를로 스탠튼이 들어섰다.
수비 부담이 적은 좌익수로 뛰면서 메이저리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타자다.
66.5(107km)마일에 달하는 탁월한 배트 스피드와 198cm에 110kg의 타고난 힘으로 0.282의 타율에 전반기도 지나지 않는 현재 25홈런을 때려내고 있는 괴력을 선보이고 있다.
“굳이 승부할 거 없이 고의사구로 가자.”
“싫어. 난 승부할 거야.”
“네 승부욕은 잘 아는데 쟤는 인간 아니야. 고릴라가 인간으로 환생했다고 보면 될 거야.”
“난… 전생에 라이온이었어.”
성낙기의 대답에 리얼무토는 관중석 위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홈플레이트로 돌아왔다. 팀의 정신적 지주인 자신의 말을 참, 드럽게도 안 들어 처먹는 놈이다.
팀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위계질서가 흐트러지면 팀워크에 문제가 생기는 법인데 저놈은 그걸 모른다.
‘내가 감독이라면 바로 싱글A로 보내 버리는 건데…….’
리얼무토는 홈플레이트에 앉아 스탠튼을 스윽, 올려다봤다. 덩치도 큰 데 배트를 쥔 손에 살기가 느껴진다.
저 팔뚝 보라지.
공을 쪼개 버릴 것 같은 힘이 느껴지는 굵은 팔에 핏줄이 꿈틀거린다. 리얼무토는 가만 생각하다가 몸 쪽 하이볼 사인을 냈다.
속아주면 좋고 속지 않아도 홈런을 맞을 코스는 아니니까. 고개를 저은 성낙기는 다시 사인을 냈다. 그리고 공을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1구는 너무도 평범한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이었다.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인상이 구겨졌다.
“초구로 91(146km)마일의 평범한 공을 스트라이크로 잡는 성낙기 투수입니다. 지안카를로가 아까운 표정을 짓습니다.”
“좋은 공을 놓쳤다는 거겠죠. 라이징패스트볼과 퀘이크볼 같은 공을 가진 투수가 자신을 상대하면서 빠르지 않은 포심패스트볼을 던질 줄은 몰랐을 것 같군요. 제가 투수라 해도 현재 가장 핫(hot)한 공을 던졌을 겁니다.”
성낙기는 공을 받아들고 심호흡을 했다. 분명 강한 타자지만 피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빠른 승부로 기를 눌러놓아야만 경기 운용이 쉬워질 것이다.
성낙기는 인터벌을 짧게 가져간 뒤, 2구를 던졌다.
따악.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스탠튼이 때린 공은 성낙기가 자랑하는 라이징패스트볼이었다. 바깥쪽으로 낮게 들어오다가 타자 앞에서 솟아오르며 높은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는 공. 그런데 스탠튼은 망설임 없이 배트를 휘둘렀고 그가 때린 공은 우익수 앞으로 굴러갔다.
글레이버는 빠른 스타트로 홈플레이트를 밟았고 스탠튼은 1루 베이스를 밟으면서 당연한 결과라는 듯 무표정했다.
***
“선나키, 할 말이 있다.”
1회가 끝나고 더그아웃에 가자마자 알렉스 비토 감독이 성낙기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 5번 타자에서 이닝을 끊었고 더 이상의 실점은 없었다. 경기 스코어 0:1.
“무슨 말씀요?”
성낙기가 되물었고, 알렉스 감독은 리얼무토까지 데려온 다음 말을 이었다.
“공을 던지는 패턴에 문제가 있어. 보통의 투수들은 스트라이크와 볼의 비율이 6:4 정도인데 선나키는 거의 8:2야. 이건 분명 문제지. 왜냐하면 무조건 휘둘러도 스트라이크일 확률이 높거든. 이렇게 되면 선구안은 있으나마나가 돼. 지금까지는 잘 견뎌왔지만 이제 시즌 중반이야. 내가 볼 땐 분석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게 던지는 이유가 뭐지?”
알렉스 비토 감독이 물었을 때, 성낙기는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상태창의 체력 스탯에 맞추다 보니 KBO부터 빠른 승부를 하는 습관이 붙었고 체력이 89로 불어난 현재도 그런 패턴으로 굳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제가 공격적인 투구를 좋아해서입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그 정도 구위로 2점대 후반의 방어율은 적절하지 않아. 구위보다는 공을 던질 때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도록 해.”
“저의 생각도 같습니다. 성낙기의 구위와 변화구는 매우 좋지만 지나치게 크레이지 모드인데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산다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닌데 말이죠.”
리얼무토가 알렉스 감독의 말을 받아 그간 성낙기에게 쌓였던 불만을 털어놓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는, 성낙기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성낙기는 알렉스 비토 감독의 말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런 점은 분명 있을 것 같다. 순전히 투구 수를 아끼기 위해서였는데 1회처럼 맞아나가면 투구 수 절약에 오히려 역효과다.
마이애미의 타선은 2회 초 공격에서 루이스 시크릿에게 삼진 둘에 3루 땅볼로 스리아웃, 간단하게 끝났다.
성낙기는 알렉스 비토 감독의 말을 생각하며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6, 7번 타자를 내야 땅볼과 외야 플라이로 돌려세웠다. 둘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를 돌렸는데 성낙기는 여느 때와 달리 유인구로 두 타자를 상대했다.
“뭐야. 볼쟁이야? 2점 대 방어율 투수가 피해가는 투구를 하는 건 창피한 거 아니야?”
8번 타자로 나온 양키스의 포수 게리 산체스였다. 앞선 두 타자를 상대하는 패턴이 달라진 걸 깨닫고 리얼무토에게 던지는 말이었는데.
“언제나 화는 입으로부터 오지. 이제 주전포수로 도약했으면 겸손해야 한다. 아직 배울 게 많을 거야.”
“흥, 언제 적 리얼무토야?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을까?”
“글쎄, 너처럼 햇병아리들이 있는 한 내 자리는 항상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타율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버티기 힘들 거야.”
리얼무토가 게리 산체스의 타율을 언급했고 게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타격 슬럼프로 시즌 초의 3할 타율이 0.245까지 내려와서 올라갈 줄을 모른다.
게다가 최근 5경기 16타수 1안타로 고개를 못 들 지경이다. 약점이 찔린 게리 산체스는 리얼무토를 한 차례 흘겨보고는 타격 자세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