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086화 악의 제국 3
비록 6회에 홈런 한 방을 맞았지만 7회까지 잘 던진 팬 파일러가 내려갔고 이어 던진 좌완 투수 딜런 피터스가 8회 초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8회 말, 마이애미 말린스의 공격 때 워싱턴의 불펜투수 세자르 바르가스가 올라와 마운드에 섰다.
마이애미의 타자는 2번 웨인 크루. 알렉스 비토 감독에 의해 마이너리그에서 콜업된 뒤, 0.258의 타율을 기록 중이다. 트리플A에서는 3할을 훌쩍 넘기는 타율로 펄펄 날았으나 메이저리그에서는 움직임이 많은 속구에 고전하고 있다.
팡.
“스트라이크.”
세자르의 97마일에 달하는 강속구가 몸 쪽에 꽂혔고 웨인 크루는 반응하지 못했다. 세자르는 또다시 강속구를 바깥쪽에 던졌고 웨인 크루는 헛스윙,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만들어졌다. 이어 던진 슬라이더에 웨인 크루의 배트가 나갔다.
따악.
약간 빗맞은 타구는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바운드되며 체공 시간이 길어졌고 유격수가 역동작으로 잡아 1루에 던졌다. 발이 빠른 웨인 크루는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세이프!”
1루심의 팔이 좌우로 펼쳐졌고 마이애미 관중들이 모처럼의 찬스에 환호했다. 다음 타자는 루이스 브린슨이었다.
한 경기에서 여러 차례 호수비를 펼쳐 수비 요정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 이후로 중요한 경기에서는 연속적인 에러를 범해 빛바랜 별명이 되었다.
타격도 시원찮았는데 요즘 날이 더워지면서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는 타자였다. 최근 5경기 타율은 0.352로 마이애미에서 가장 좋다. 그 덕에 2할 중반이었던 타율이 0.274까지 올라섰다.
따악.
초구를 노린 루이스는 1루수 땅볼로 아웃. 웨인 크루의 스타트가 좋아서 병살을 면했다. 그리고 원아웃 2루의 득점권 찬스에서 4번 타자 브라이언 앤더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현재 0.298의 타율에 17홈런 44타점을 기록한 마이애미의 간판타자다.
워싱턴의 빌 매트리 감독은 포수에게 사인을 보냈고 포수가 세자르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러고는 세베리노가 홈플레이트에서 일어섰다.
“고의볼넷입니다.”
세베리노가 주심에게 전달하자 주심이 브라이언 앤더슨을 보며 1루를 가리켰다. 브라이언이 배트를 버리고 1루를 향해 천천히 뛰어갔다.
얼굴 가득 아쉬움이 가득했다. 원 아웃 1,2루의 위기를 맞는 워싱턴 내셔널스는 또다시 투수를 교체했다. 1승 3홀드에 ERA 3.13의 A.J 콜이었다.
“와, 여기서 또 바꾸나? 지루한 감독이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걸.”
워마린 타격 코치의 투덜거림에 셜리번 투수 코치가 대답했다. 다음 타자는 성낙기가 아닌 리얼무토였다. 전임 레인 피터 감독이 있을 때부터 5번 타자로 나섰던 성낙기는 알렉스 비토 감독의 체력 관리에 따라 투수 파트에 집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팡.
“스트라이크.”
AJ 콜은 불펜답게 움직임이 많은 강속구를 던졌고 리얼무토는 몸 쪽으로 던진 3구째 포심패스트볼을 공략했다.
따악.
타구가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를 갈랐고, 그사이 2루 주자가 홈인했다.
이어진 원아웃 2,3루의 찬스에서 시에라는 중견수 희생플라이로 1타점, 마이애미는 경기를 3:2로 역전시켰다. 그리고 야를린 가르시아는 9회를 막고 12세이브째를 수확했다.
강자 워싱턴과의 경기에서 예상외의 승리를 맛본 마이애미 팬들은 선수들이 다 떠날 때까지 경기장에서 나가지 않고 박수를 쳤다.
***
2021년 7월 3일.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마이애미 말린스 대, 뉴욕 양키스 전의 마이애미 선발은 성낙기였다.
전반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고 각 지구마다 순위 싸움이 치열했다.
양키스는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예전의 악의 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강자 보스턴 레드삭스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로 전반기의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0.623의 승률로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는 양키스의 선발은 루이스 시크릿으로 양키스의 에이스다.
예리한 각으로 헛스윙률 20%에 달하는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로 평균 구속 97.7(157km)마일의 엄청난 강속구를 자랑한다.
전 경기까지 10승 3패 ERA 2.65의 몬스터급 성적에 최고 구속은 100마일이 넘지만, 완급 조절에 눈을 뜬 뒤로 강하게만 던지기보다 제구에 더 신경을 쓰는 투수라서 까다롭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ESPN의 대런 카일 캐스터입니다. 오늘 경기는 실질적인 양 팀 에이스의 대결입니다. 해설자 오벨 마이어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선두 뉴욕 양키스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4위 마이애미 말린스의 경기인데요.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아마, 저만큼 오늘 나오는 마이애미의 성낙기 투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한때, 스카우트로 활동하면서 KBO 2군에 있을 때부터 봐왔거든요. 아주 독특한 투수였는데 구속은 140km도 채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구속만 따라주면 모든 로케이션이 좋은 투수였죠. 저 선수를 메이저리그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음, 경기 예상 대신 성낙기 투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네요. 요즘 마이애미의 히트작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경기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성낙기 투수의 활약이 대단하지만, 양키스의 우위입니다. 우선은 타자들이 굉장하죠. 그에 비해 마이애미의 타선은 강하지 못합니다. 루이스 시크릿의 방패를 뚫어낼 창이 부족합니다.”
“역시, 양키스의 우세를 예상하시는군요. 하지만, 성낙기 투수는 늘 의외의 결과를 내왔습니다. 어느덧 마이애미의 2선발로 성장한 성낙기와 양키스의 에이스 시크릿의 대결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스카우트에서 해설자로 변신한 오벨 마이어와 대런 카일 캐스터도 흥분을 감추지 못할 만큼 오늘의 경기는 두 투수의 승부만으로 빅게임이다.
모두들 성낙기가 양키스 타선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양키스의 감독 애런 분의 생각은 달랐다.
‘저 투수가 브라이스 하퍼를 상대로 0.214를 기록하고 있다는 그 투수인가? 변화구가 독특해서 말려 들어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유형이야.’
경기 전, 먼발치에서 애런 분 감독은 성낙기의 모습을 보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브라이스 하퍼뿐, 아니라 지금까지 상대한 팀들의 클린업 트리오에게 무척 강한 투수라는 것이 전력 분석 팀의 평가였다.
1회 초, 선발로 나온 시크릿은 96(154.5km)마일에 달하는 속구와 슬라이더로 마이애미의 타선을 삼자범퇴로 돌려세웠다.
투구 수는 고작 11개였다.
‘오, 드디어 내가 양키스타디움에도 서 보는구나. 악의 제국이라고 했겠다. 그렇다면, 악 소리가 나게 만들어 주겠어.’
성낙기가 나름 굳은 결심으로 마운드를 향하려 할 때 더그아웃 뒤의 관중석에서 성낙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낙기 씨, 저 왔어요.”
낯익은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바로 김아경이었다. 정진수 에이전트와 함께였는데 성낙기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꽤 생각이 나곤 했는데 경기장에서 보니 무척 반가웠다. 성낙기도 마주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음, 삼호 백화점 대표로 취임했다더니 더 예뻐지셨네.”
성낙기는 마운드로 가면서 혼잣말을 했다. 김아경이 왔으니 그녀가 보는 앞에서는 1패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연습구를 몇 개 던지고 김아경을 슬쩍 보았다. 자신이 공 던지는 걸 유심히 바라보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생각하니 고마움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주심이 플레이볼을 외쳤고 타석에 1번 타자 글레이버 토레스가 들어섰다.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전전하다가 이번 시즌부터 주전을 꿰찬 24세의 젊은 선수다. 0.314의 타율에 8홈런 17도루를 기록 중인 선수로 규정 타석을 채울 경우, 신인왕 후보에 들어갈 만한 성적을 내고 있다.
슈욱.
따악.
파울.
초구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에 바로 반응한다. 1루 파울 지역으로 강하게 구르던 타구가 펜스를 맞고 튕겨 나왔다. 성낙기의 2구는 바깥쪽을 향하다가 뚝 떨어지는 커브였고 글레이버는 배트를 내밀다가 멈칫 했다. 2개의 공만으로도 훌륭한 선구안을 가졌다는 걸 알게 해주는 타자.
3할을 치고 있는 이유가 있다.
팡.
볼.
이번엔 몸 쪽 하이볼을 던졌는데 역시 골라낸다. 볼 카운트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성낙기는 다시 한번 바깥쪽 높은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했다.
따악.
파울.
이번엔 1루 쪽 관중석으로 공이 날아갔다. 첫 타자부터 꽤 피곤한 스타일이다. 제 5구로 리얼무토가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140km 후반 대의 공을 보다가 85(137km)마일 정도의 공이 들어가면 타이밍을 잡지 못할 거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성낙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체인지업을 던졌다.
따악.
몸 쪽으로 들어간 체인지업을 글레이버가 받아쳤고 타구는 유격수 키를 넘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체인지업을 받아친 글레이버를 보고 성낙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패턴의 투구라면 삼진이거나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힘없는 타구가 대부분인데 글레이버는 힘들이지 않고 타이밍을 읽었다.
리얼무토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이상한데……? 성낙기 네가 체인지업을 던질 타이밍을 알고 있었어.”
“설마… 혹시 사인 훔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하여튼 좀 더 두고 보자.”
글레이버가 특별한 선수여서 그럴 수 있다는 데 둘은 동의했다. 다른 타자도 투구 패턴을 읽으면서 타격을 하진 못할 것이라는 것. 리얼무토가 돌아가고 타석에 그레고리우스가 들어섰다. 좌타자이기 때문에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멀어지는 투심패스트볼이 효과적일 가능성이 많다. 성낙기는 와인드업을 하기 전, 1루를 보았다. 글레이버의 리드가 길다. 도루 성공률이 무려 85%에 달하는 준족이다.
팡.
세이프!
성낙기는 1루에 2번 연속 견제구를 던진 후에 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따악.
파울.
역시 공을 건드린다. 헛스윙률이 높은 투심패스트볼인데 엉덩이가 살짝 빠지면서도 공을 어렵지 않게 걷어낸다.
“워마린 코치, 선나키 공을 너무 잘 치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알렉스 비토 감독도 성낙기의 공에 적응하는 양키스 타자들을 보고 이상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강타선이라도 브라이스 하퍼 같은 선수에게도 강한 성낙기 아닌가.
“애매합니다. 볼 배합을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워마린 타격 코치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그도 이유를 모른다. 첫 타자 글레이버부터 성낙기의 공에 대한 적응력이 남다르다.
“양키스가 요즘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선수들에게 각 투수들의 성향과 볼 배합, 구질 등을 알려준답니다. 경기 전에 훈련은 짧게 하고 상대팀 투수 분석에 집중한다고 들었습니다.”
곁에서 듣던 셜리번 코치가 말했다.
“그래? 아무리 그렇다고 선나키 같은 투수의 공을 때려 내나? 변화구가 한두 개가 아닌데 말이지.”
“투구 분석에 집중하다 보면 타석에 섰을 때, 볼 카운트에 따라 어떤 구질이 오겠다 싶은 감이 잡히기도 합니다. 오늘 양키스 타자들을 보니 성낙기라는 투수를 무너뜨리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있습니다. 천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거겠죠.”
셜리번의 말을 듣고도 알렉스 비토 감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2번 타자의 볼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성낙기는 자신이 직접 사인을 냈다.
팡.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2번 타자 그레고리우스는 삼진을 당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공이 떠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