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085화 악의 제국 2
따악.
배트에 맞은 공이 우익수 쪽으로 향했고 루이스 브린슨은 타구를 따라가다 말고 워닝트랙에서 멈춰 섰다. 외야에 있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섰고 홈런이 된 공을 잡으려고 손을 위로 뻗는 장면이 TV에 중계되고 있었다.
“맷 레이놀드, 성낙기 투수로부터 투런 홈런을 뽑아냅니다. 아, 의외입니다. 브라이스 하퍼 같은 강타자를 잘 잡고 하위 타선에 홈런을 허용했어요.”
“그렇죠? 메이저리그는 하위 타선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넘어갑니다. 아마, 저 정도의 바깥쪽 제구라면 신체 조건이 작은 동양인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바깥쪽에 몰린 타구도 쳐낼 만큼 팔다리의 길이가 남다릅니다. 성낙기 투수가 이런 점을 생각해야 할 겁니다.”
ESPN의 에일 라몬 캐스터와 듀크 카바니 해설자의 말처럼 이 홈런은 성낙기가 생각지 못한 홈런이었다. 헤이드 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각도의 꺾임이 동반된 슬라이더를 물 흐르듯 쳐내어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경기 스코어 0:3. 성낙기는 다음 타자를 범타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스트라스버그는 3회부터 그야말로 언터처블(untouchable)급의 투구를 선보였고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서의 위용을 뽐냈다.
-괜찮아. 우리에겐 타자 성낙기가 있다.
-성낙기 7회에 타자로 나오겠지?
-당연하지. 7회에 타자로 나오고 8회 초에 1구만 던지고 바꿔줘도 되는 거니까.
-여기서 대타 내면 감독은 미친놈이다.
-스트라스버그가 각성했어. 2회와는 다른 공이야.
포털 사이트에 달린 댓글은 타자로 나오는 성낙기에 대한 말이 대부분이었다. 전 타석에서도 잘 맞는 타구가 좌익수 호수비에 걸렸기 때문에 성낙기의 타격에 대한 기대는 당연했다. 성낙기는 7회 말, 선두 타자로 타석에 섰다.
‘너, 이제 제대로 걸렸다. 설마 볼넷 승부는 하지 않겠지?’
성낙기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답이 왔다.
‘건방진 놈, 삼진이 뭔가를 보여 주지.’
뭐…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지만 스트라스버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파앙.
“스트라이크!”
“아, 자그마치 101(162.5km)마일이 포수 미트에 꽂힙니다. 어떻게 7회에 저런 공을 던지는지 불가사의한 투수입니다.”
스트라스버그가 던진 몸 쪽 공이 엄청난 기세로 타자를 위협했고 약간 높다 싶은 공에 주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다음 공 역시 스트라스버그는 강속구를 뿌렸다. 이번에도 바깥쪽 다소 높은 공이었는데 타자에겐 멀게 느껴지는 코스다.
슈욱!
팡.
스트라이크.
***
성낙기는 7회 선두 타자로 나와 삼진을 당했고, 경기는 그대로 끌려가 0:3 완패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성낙기의 체력을 감안하지 못한 감독의 실패였고 이로서 알렉스 비토로 감독이 바뀐 이후 5연패였다.
이렇게 되면 1위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게임차가 10게임이고 필라델피아와는 2.5게임 차이로 벌어졌다. 가을 야구는 요원한 게 사실이었다.
가을 야구를 하려면 지구 2위를 해야 하는데, 2위인 뉴욕 메츠와 7.5게임차이니 언뜻 보면 따라갈 여지가 있지만 각 팀의 전력을 생각하면 약팀이 강팀과의 격차를 좁히고 심지어 역전까지 한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새로운 얼굴 성낙기가 제법 잘하고 있어도 그는 어차피 9명 중 1명일 뿐, 팀의 승리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한 경기 이기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알렉스 비토 감독은 코치진을 소집했다.
셜리번과 워마린 코치는 물론이고 오마르 배터리코치와 마인 허지스 수비코치 등도 함께 모였다. 현재 전적 36승 46패 승률 0.439로 필라델피아에 이은 5위, 3위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는 4게임차로 연승을 해나가면 아직은 가시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연승이 힘들다.
“내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5연패입니다. 오늘처럼 경기해서는 절대 상위권으로 가지 못합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타자가 홈런 치면 이기고 못 치면 지는 야구, 투수가 잘 던지면 이기고 못 던지면 지는 야구, 이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겁니다. 적극적인 수비와 공격이 약 팀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수비 시프트, 히트 앤드 런, 세이프티 번트, 도루, 그리고 적절한 벤치클리어링도 필요합니다. 할 수 있는 걸 다하고 나서 지더라도 져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경기는 안됩니다. 코치들은 앞으로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베이스러닝, 적극적인 수비, 두려움 없는 타격을 주입하세요.”
알렉스 비토 감독이 코치진을 모아 놓고 자신의 야구관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선수들의 기량으로 경기를 꾸려갔던 레인 피터 감독과는 다르다. 그동안은 특별한 작전 없이 선수들에게 맡겼지만, 이제부터는 뭔가 하겠다는 소리다.
“앞으로 좀 힘들어 지겠는데?”
감독실을 나오면서 워마린 타격 코치가 셜리번 투수 코치에 말했다.
“힘들어지는 건 나야. 수비 시프트로 골치가 아프게 생겼어.”
마인 허지스 수비코치가 거들었고,
“말이 한 베이스씩 더 가는 거지, 몸이 따라주나? 선수들이 기회가 있는데도 안 뛴다는 소리로 들렸어. 요즘 선수들이 어떻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해.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프랭크 주루 코치도 불만 섞인 목소리를 쏟아냈다.
셜리번은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하위권은 분명한 사실이고 희망이 없다. 팀 성적이 계속 떨어진다면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선수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
다음 날,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2차전은 마이애미의 5선발인 케일럽 스미스와 워싱턴의 좌완 투수 엔니 로메로였다.
엔니 로메로는 191cm, 105kg의 도미니카 출신에 본래 불펜으로 영입된 투수인데, 이번 시즌부터 선발로 던지고 있고 5승 3패 ERA 3.46으로 안정적인 활약을 펼치는 중이다.
그에 비해 케일럽 스미스는 3승 3패에 ERA 4.58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4월 말엔 슬럼프로 마이너리그에 다녀온 적도 있다. 좋게 생각하면 작년에 8승을 거뒀으니 올해도 비슷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긴 하다.
성낙기는 더그아웃에 앉아 배트를 닦고 있었다. 경기 후반에 찬스가 오면 대타로 나갈 거라고 미리 언질을 받은 터였다.
감독은 바뀌었지만 성낙기의 쓰임새만큼은 변화가 없었다.
다만, 1회 초 워싱턴 내셔널스의 공격 때 1루 쪽을 거의 비워놓고 2루수는 투수 뒤쪽으로 이동했고 3루수와 유격수 역시 3루 베이스 쪽으로 더 붙었다. 외야 수비도 좌측으로 치우쳐 수비했다.
‘1번 타자에게 저러다가 1루 쪽으로 번트 대면 어쩌려고 저러지?’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던 오스틴 단장은 의아했다. 하지만, 알렉스 비토 감독은 투수인 케일럽 스미스의 수비력을 믿었다. 싱글A 시절 3루수로 뛰다가 송구가 총알이어서 마운드에 서게 된 선수인 만큼 수비력은 투수 중 발군이었다.
따악.
케일럽 스미스의 바깥쪽 패스트볼에 타자가 반응했고 예상대로 트레아 터너는 조금 빠른 타이밍에 공을 잡아당겼다. 투수를 지나 2루 베이스로 구르던 공은 2루수가 쉽게 잡아 1루에 송구했다. 시프트가 아니었다면 안타였을 코스였다.
“하하, 알렉스가 시프트를 쓰고 있어. 피터와는 완전 다른데.”
“적극적인 감독인 건 인정, 마이애미에 맞는 감독이야.”
“좋아, 수비는 그렇게 하는 거야.”
물론, 수비 시프트를 타자마다 쓰는 건 아니다.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타자에게 효과가 있다.
극단적이 아니라도 당겨 치는 경우가 많은 타자에게도 효과가 있는데 왜냐하면,
타자가 시프트를 의식하게 되고 의도적으로 밀어치려다 보면 자기 스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프트는 극단적인 타격 성향과 더불어 타자에게 심리적인 영향도 끼친다. 전혀 안 먹히는 타자도 있지만, 트레아 터너는 쉽게 걸려들고 말았다.
그렇게 1회를 무사히 마쳤을 때 마이애미의 팬들은 알렉스 비토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3번 좌타자 브라이스 하퍼마저 1루와 2루 사이를 꿰뚫는 타구를 날리고도 촘촘한 그물망에 걸렸기 때문이다.
3루를 비워두고 우측으로 자리를 옮긴 수비시프트에 브라이스 하퍼는 평소대로 강하게 타구를 때렸지만 수비수 정면 타구가 되어버렸다.
***
케일럽 스미스는 5회까지 5안타 1실점으로 잘 버텨내고 있었다. 4회 브라이스 하퍼에게 맞은 솔로 홈런이 아니라면 거의 퍼펙트한 투구 내용이었다.
마이애미 말린스도 3회에 엔니 로메로에게 2루타 두 개를 얻어내어 1:1 동점인 상황. 그리고 6회 말 수비에서 시프트가 뚫렸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포수 세베리노가 의식적으로 밀어 친 공이 1, 2루 사이를 깨끗이 갈랐다.
원래 수비 위치라면 잡혔을 것이다. 이런 경우의 시프트는 무용지물, 혹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알렉스 비토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좌타자인 호세 마몰레호스에게는 3루를 느슨하게 해두고 우측으로 치우쳤다.
따악.
“안타입니다. 밀어 친 타구가 3루 쪽을 갈랐습니다. 노아웃에 1, 2루의 찬스를 맞이하는 워싱턴 내셔널스, 케일럽 스미스 투수 위기입니다.”
“시프트의 효과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하는 장면이네요. 원래 수비 위치였다면 투아웃이었을 겁니다. 몸 쪽으로 던져도 타자들이 의도적으로 밀어치고 있어요. 초반엔 구위가 살아 있어서 배트 컨트롤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구속이 떨어졌고 변화구의 각도 밋밋해졌어요.”
“그렇군요. 오, 알렉스 비토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갑니다. 감독이 직접 올라간다는 건 투수를 바꾸겠다는 건데요. 조금은 빠른 듯한 투수 교체입니다.”
“역시 팬 파일러 투수가 나오죠? 이 투수가 98마일 정도는 우습게 던지는 투수지요. 다만, 포심과 슬라이더의 투피치의 약점에 제구가 들쭉날쭉해요. 얼마 전에 알렉스 비토 감독으로부터 원 포인트 레슨을 받고 제구가 좋아졌다는 말이 있는데 두고 봐야겠네요.”
알렉스 비토 감독은 내려가지 않으려는 케일럽 스미스를 살살 달래고 나서 팬 파일러를 불렀다. 케일럽 스미스는 고개를 저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한 타자 정도는 상대하고 싶었는데 감독의 교체 타이밍이 냉정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주자를 놔두고 내려갔다가 불펜이 얻어맞으면 자신의 자책점이 되어버리니 그것 또한 맘에 들지 않는다.
‘팬 파일러… 휴…….’
케일럽이 속으로 되뇌는 이유도 믿기 힘든 불펜 투수이기 때문이다. 볼넷이나 안주면 다행이지, 강속구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투수 아닌가. ERA가 4.33이던가……? 케일럽은 밀어내기 볼넷을 주는 팬 파일러를 상상하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따악.
더그아웃에 들어와 땀을 닦는 사이에 울리는 타격 음을 들었다. 8번 타자 맷 레이놀드가 때린 공은 3루수 정면으로 향했고 3루수가 2루로 송구, 포스 아웃 후에 1루로 공을 던졌다. 5-4-3의 병살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팬 파일러의 강속구를 기다리던 타자는 가운데 아래쪽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당겨 쳤고, 생각보다 각이 더 살아 있던 공은 배트의 중심에 맞지 않았다.
마이애미 팬들은 소리 높여 팬 파일러를 응원했고 워싱턴 팬들은 침묵으로 할 말을 대신했다. 신이 난 팬 파일러는 강속구 위주로 다음 타자와 승부하다가 솔로 홈런을 얻어맞았다.
게임 스코어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