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84화 (84/188)

# 84

084화 악의 제국 1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이번엔 몸 쪽 깊은 곳으로 날아오다가 아래로 꺼지는 공이다. 헤이드 존의 (83/100)에 이르는 위력의 체인지업. 92마일의 라이징패스트볼 다음에 85(136km)마일의 공이 같은 궤적으로 들어오자 브라이스 하퍼는 주저 없이 배트를 돌렸고 결과는 헛스윙이었다.

‘포심과 체인지업 궤적이 너무 비슷해, 젠장.’

그랬다. 성낙기가 던진 체인지업은 1구로 던진 라이징패스트볼과 타자 앞에서 차이가 거의 없었다. 약간의 차이로 빠른 공과 체인지업을 분류하기란 어렵다.

그만큼 83%에 이른 헤이드 존의 체인지업은 타자 앞에서 시각적 분리 지점이 늦었다.

같은 폼에서 나오는 빠른 공과 느린 공, 거기에 타자가 궤적을 예상하고 배트를 내미는 판단 지점이 늦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니 브라이스 하퍼가 당황할 만도 했다.

즉, 변화가 늦게 일어날수록 타자는 난감해지는 것이다.

팡.

볼.

이번엔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꺾이는 슬라이더였는데 따라 나오지 않는다. 슬라이더 역시 위력이 헤이드 존 전성기 때의 83%에 이를 정도로 바쁘지 않은데 속지 않는 브라이스 하퍼. 하긴 괜히 타격 천재가 아니겠지.

팡.

볼.

이번엔 몸 쪽 포크볼을 던졌는데 포심패스트볼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아챈 게 틀림없다. 시각 분리 지점이 타자에게 가까운 공인데도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는 타자. 리얼무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퀘이크볼 사인을 냈다.

따악.

바깥쪽으로 오는 공을 브라이스 하퍼가 때렸지만 배팅 포인트에서 생각보다 살짝 아래로 꺾이는 바람에 2루수 정면으로 땅볼이 굴러갔다. 브라이스 하퍼는 1루로 뛰다가 아웃되자 분을 삭이는지 두 손을 무릎에 대고 숨을 헐떡거렸다.

***

스트라스버그는 생각대로 엄청난 공을 던졌다. 아니, 던진다는 것보다 뿌린다는 표현이 맞겠다. 밀어 던지는 공이 아니라 손끝에서 최대한 회전을 먹이며 뿌리듯 던지는 공은 타자 앞에서 살아 올랐고 배트는 맥없이 헛돌았다.

포심패스트볼 위주의 투구였음에도 마이애미의 타자들은 대응하지 못했다. 이른 바, 알고도 치기 힘든 공을 스트라스버그는 가볍게 던지고 있었다.

“오, 스트라스버그. 마이애미 타자들을 모조리 돌려세웁니다. 3타자 연속 삼진 퍼레이드를 펼치는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입니다. 대단하죠?”

“정말 그러네요. 공 끝이 지저분해서 타자들이 제대로 맞추질 못합니다. 포심패스트볼인데도 타자 앞에서 변화가 심해요. 제가 타자로 뛰던 당시에 저런 공을 봤다면, 전 배트를 휘두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타자 앞에서 춤을 추는, 한마디로 미친 공이에요.”

관중은 어느덧 빈자리가 없어졌다. 좋지 않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성낙기의 등판일이었고 워싱턴 내셔널스의 투수는 스트라스버그였다. 거기에 벤치클리어링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 터에 성낙기와 브라이스 하퍼의 만남도 팬들이 궁금해 하는 승부였다.

“난 오늘 벤치클리어링 보러 왔어. 왜냐하면 스트라스버그가 분명히 성낙기를 맞출 거거든.”

“설마, 전에 그래가지고 출장 정지까지 먹었는데 그 짓을 또 해?”

“한다니까. 그냥 넘어가면 시즌 내내 울분이 쌓일 거야.”

2회 초, 성낙기는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지다가 4번 타자 라파엘 바티스타에게 안타를 허용했으나, 나머지 타자들을 범타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2회 말, 브라이언 앤더슨이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된 뒤 원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타석에 섰다 배트를 두어 번 붕붕 돌리고 타석에 서는데

왠지 느낌이 싸했다.

우선은 스트라스버그가 자신을 노려보는 눈초리도 예사롭지 않고 포수인 페드로 세베리노의 숨소리도 거칠게 들려온다. 관중들도 입이나 맞춘 듯 조용히 성낙기의 타석을 주시하고 있었다.

‘흠, 나를 맞추겠다 그거지?’

성낙기는 타석에서 멀찍이 떨어져 타격 자세를 취했다. 지금의 타격 자세라면 몸 쪽은 몰라도 바깥쪽은 공략이 전혀 안 된다. 스트라스버그가 초구를 던졌다. 역시 성낙기의 예상대로 옆구리를 겨냥한 피칭이었다.

따악.

포수 세베리노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빈볼 사인을 냈고 그 공은 당연히 타자의 옆구리나 어깨쯤에 맞으면서 퍽, 하는 소리가 나야 정상인데 배트에 맞는 소리가 났으니 의아한 건 당연했다.

“의외의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이건 아주 희귀한데요. 몸으로 던진 빈볼 성 공을 그대로 받아쳐 파울을 만들어 버리는 성낙기 선수입니다.”

“하하, 제가 20년 넘게 해설하는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 보네요. 빈볼을 쳐내서 관중석으로 보내 버리다니. 참 독특한 선수임엔 틀림이 없어요. 저러니 관중을 끌고 다니는 거겠죠.”

스트라스버그는 열이 확 받쳤다. 사구 하나 줄 생각을 하고 빈볼을 던졌는데 그걸 배팅을 해버려? 성낙기는 파울을 때려내고 여유 있는 얼굴로 배트를 휘두르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더 끓어오르는 스트라스버그.

“에이 썅!”

이번엔 어깨 쪽을 겨냥했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잽싸게 피해 버린다. 공은 지정석 관중이 앉아 있는 펜스를 퉁기고 나왔다.

노골적인 빈볼 시도에 경기장은 시끄러워졌고 캐스터와 해설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판이 마스크를 벗고 스트라스버그에게 경고를 줬다.

그러나 스트라스버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저놈을 맞추지 않고는 도저히 오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헤이, 셜리번 선수들 대기 시켜. 내가 신호하면 경기장으로 들어가도록 해. 사정 볼 것 없어. 저런 놈들은 초장에 기를 죽여 놓아야 해. 요즘 팀 분위기도 가라앉았는데 이걸 기폭제로 삼을 필요가 있어.”

알렉스 비토 감독은 선수들에게 뛰어나갈 준비를 시키고 자신도 경기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한 번만 더 빈볼이 날아오면 무조건 벤치클리어링이다, 이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포수 페드로 세베리노는 두 번째 빈볼도 실패하고 주심으로부터 경고를 받자 마운드로 올라갔다.

“헤이, 스티븐. 경고를 받았는데 그만하는 게 어때. 또 그러면 퇴장시킬 것 같은데?”

“브라이스 하퍼가 당한 거 잊었어? 난 그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려.”

“너 없으면 경기를 망치게 될 거야. 그러지 말고 지금 투 스트라이크니까 쟤 삼진으로 잡아버리자. 잔뜩 쫄아 있을 테니까 바깥쪽 공에는 전혀 반응을 못할 거야.”

“…….”

성낙기는 이번엔 타석에 바짝 붙었고 빈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통의 선수라면 벌써 마운드로 달려갔을 법도 한데, 두 개의 빈볼을 모두 쳐내고 피하는 신기술을 보여준 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타석에 들어섰다. 스트라스버그는 포수와 사인을 교환한 뒤 전력으로 공을 던졌다.

슈욱!

99(159km)마일의 공이 바깥쪽으로 들어왔고,

스트라이크 아웃!

성낙기는 바깥쪽에 꽂히는 포심패스트볼을 바라만 보다가 아웃이 선언되자 스트라스버그를 보며 씨익 웃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뭐야, 저거 진정한 도라이란 말인가? 삼진을 당하고도 기분 좋아하고 있다. 미친놈.’

스트라스버그는 삼진을 잡고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기를 보고 웃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성낙기가 칠 수 있는 공을 안 쳤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낙기의 본심은 달랐다.

‘바깥쪽에서 꺾여 들어오는 투심 성 패스트볼이었어. 도저히 칠 수 없는…….’

***

경기는 7회 초, 성낙기는 변함없이 마운드에 올랐다. 모든 것이 다 좋았는데 4회에 워싱턴 내셔널스의 2번 타자 엔서니 렌던에게 솔로 홈런을 맞은 것은 옥의 티였다.

평소 장타자가 아니었기에 쉽게 생각했고 타자는 체인지업을 노린 듯 가라앉는 공을 그대로 걷어 올렸다.

보통의 경우, 포심패스트볼에 대한 부담 때문에 체인지업에 반응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인데 포심패스트볼을 버리고 체인지업만 노린 게 분명했다. 타자로서는 모험인데 그 모험이 통했다고 봐야할 것 같다.

그걸 제외하면 모든 이닝이 완벽했다.

특히 브라이스 하퍼를 연속 삼진으로 보내 버렸다. 6회엔 삼진을 당하고 나서 땅에 배트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주심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더그아웃에 들어가며 성낙기를 힐끗 보았는데,

‘저런 쳐 죽일 놈. 두고 보자.’

브라이스 하퍼가 말을 그렇게 한 건 아니었지만 성낙기는 분명히 들었다. 눈빛으로 말하는 브라이스의 소리를. 그래서 성낙기도 눈빛으로 말해줬다.

두고 봐라, 이 자식아.

물론, 잘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건 오로지 브라이스 하퍼의 지능에 따른 문제겠지.

7회 초 선두타자는 라파엘 바티스타였다. 전 타석에 무심코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가 워닝트랙에서 겨우 잡을 만큼 큰 타구를 맞았다.

워낙 팔로스로우가 좋고 온몸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 발군이라서 약간 빗맞아도 넘어갈 수 있다. 이런 게 아마 KBO와 mlb의 차이 중 하나다.

따악.

몸 쪽으로 던진 퀘이크볼을 바티스타가 쳐냈고 성낙기의 의도대로 땅볼 타구였으나, 코스가 3루수와 유격수의 중간이었다.

두 선수가 겹치면서까지 공을 잡아내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좌익수에게 굴러갔다. 오늘 경기 선두타자 출루는 처음이다. 다음 타자는 브라이언 굿윈. 0.312의 타율과 9홈런이 말해주듯 컨택 능력이 우수하고 장타력도 있는 타자다.

[체력이 21남았습니다]

6회까지 86구를 던졌다. 게다가 브라이스 하퍼를 잡느라 전광석화(電光石火)를 아낌없이 써버렸다. 타석에서의 체력 소모도 있다.

그런 연유로 체력이 고갈되었고 7회를 던지고 나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따악.

몸 쪽으로 잘 제구된 포심패스트볼을 굿윈이 때려냈고 공은 3루수의 점프에도 글러브에 걸리지 않고 좌익수 옆 파울라인 선상에 떨어졌다.

3루심이 페어를 선언했고 좌익수 오스틴 노라가 펜스 플레이에서 허둥거리는 사이에 1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을 밟았다. 그리고 타자 주자는 2루에 안착했다. 노아웃 2루의 위기. 성낙기는 리얼무토를 마운드로 불렀다.

“타자들이 빠른 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변화구 위주로 던질게.”

“좋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빠른 공은 보여주는 걸로 하고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자.”

리얼무토와 뜻이 통했다. 다음 타자에게 커브와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고 몸 쪽 높은 포심패스트볼로 삼진을 잡아냈다.

다음 타자에게도 성낙기는 커브와 포크볼 등을 적절히 사용했고 결정구로 라이징패스트볼을 사용하여 내야 플라이 볼로 잡아냈다.

적절한 볼 배합 속에 노아웃 2루였던 찬스는 어느덧 투아웃 2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타석엔 8번 타자 맷 레이놀드가 들어섰다.

지난 시즌 0.267의 타율에 16홈런으로 그다지 인상적인 타자는 아니지만, 내야 수비가 좋아서 주전을 꿰차고 있다. 성낙기는 초구로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던지면서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는데 자세가 약간 흐트러진 느낌이랄까. 그리고 성낙기의 느낌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83/100)에 이르는 슬라이더의 각은 변함이 없지만 여느 때와 달리, 제구가 약간 가운데 쪽으로 형성되었고 맷 레이몰드는 초구부터 배트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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