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081화 감독이 바뀌다니 2
“매우 의외죠? 라인업에 포함된 투수가 공을 던지기도 전에 타석에 들어서는 경우는 저로서는 처음 봅니다.”
“그렇습니다. 보통은 9번에 놓죠. 체력을 아껴야 하는 게 첫째고 타자로 나와 활약을 너무 많이 해도 좋지 않다는 게 정설입니다. 왜냐하면 타격을 하고 주자로 뛰다 보면 자기만의 로케이션이 무너질 수 있거든요. 5번 타자라면 중요한 순간에 타석에 들어서게 되고 홈까지 파고드는 경우도 많이 생깁니다. 다음 회의 투구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죠.”
콜로라도 투수인 부룩스도 스트레스가 오는지 인상을 팍 썼다. 원래부터 타자인 선수라면 모르겠는데 이런 찬스에 투수가 타자로 나와서 난감하다. 적시타라도 허용하고 나면 자기 기분은 둘째 치고 팬들에게도 그리 좋은 소리는 안 나오겠지.
팡.
“스트라이크.”
처음 나왔을 때 스트라이크에 인색하던 윌프레드는 아까 브라이언 앤더슨 때부터 지 꼴리는 대로 손을 들고 있다.
외곽으로 빠졌다고 생각한 성낙기는 항의를 하는 대신 배트를 두 손으로 쭉 뻗어 방금 지나간 공을 배트 끝으로 재 보았다. 겨우 닿을락 말락한 지점이다.
“배트는 왜 내밀고 그러는데. 항의하는 거야?”
“천만에요. 다음엔 꼭 치겠다는 의사표시죠.”
“…….”
할 말이 없어진 윌프레드 주심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입을 다물었고 성낙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부룩스는 방금처럼 외곽으로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벗어나는 포심패스트볼을 뿌렸고 윌프레드는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포수의 왼쪽, 대각의 위치에 얼굴을 내밀고 공을 지켜보고 있었다.
슈욱!
96마일의 빠른 공이 바깥쪽으로 쇄도해 들어왔고 성낙기는 그 공을 잡아당겼다.
따악.
윌프레드는 똑같은 코스의 공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손을 들 준비를 하다가, 배트에 맞은 공이 날아가는 걸 지켜보았다.
약간 빗맞은 듯 발사각이 좀 높았는데 의외로 공은 쭉쭉 뻗어나갔다. 콜로라도의 우익수 노엘 쿠에바스가 슬슬 뒷걸음질을 치면서 공의 낙하지점을 판단하고 있었다.
때마침, 3루 쪽에서 우측 관중석 쪽으로 바람도 알맞게 불고 있었다. 처음엔 약간 깊은 플라이 볼 정도로 생각했던 우익수 쪽 관중들은 공이 계속 날아오자 순간 멍해졌다.
“어… 어어?”
투아웃이기 때문에 1, 2루의 주자들은 공의 낙구 지점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공이 잡히면 어차피 1회 초 공격이 끝나기 때문에 귀루 할 필요가 없다.
노엘 쿠에바스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어느새 워닝트랙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럼에도 공이 내려오지 않자,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뭐야? 공이 살아 있어.’
노엘 쿠에바스는 펜스에 기대어 떨어지는 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바람의 영향으로 뻗던 공은 마지막에 와서는 힘이 떨어졌고 노엘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쿠어스필드에 모인 콜로라도 로키스의 팬들은 해발 1610m에 위치한 경기장을 탓할 뻔했다. 다른 곳보다 공기가 희박한 이유로 타구의 비거리가 9~10%는 더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늘은 외야 쪽으로 바람까지 살랑살랑 분다.
타자에게는 더없이 유리한 경기장인 반면, 투수들에게는 무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만 오면 ERA가 뚝뚝 떨어진다.
일단 공을 띄우면 띄울수록 장타의 확률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성낙기는 공을 띄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거기까지였다.
***
1회 말, 성낙기는 마운드에 올라 심호흡을 했다. 공기가 희박한 곳이라더니 어째 산소가 부족한 느낌도 든다. 쿠어스필드에 모인 콜로라도의 팬들은 성낙기라는 투수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래 경기장에선 잘 던지다가 이곳에서 무너지는 투수들을 숱하게 보아왔고 타자들 역시 투수 공략에 자신감을 갖고 타석에 선다. 환경의 영향 못지않게 심리적으로도 타자에게 지고 들어가기 때문에, 많은 투수들이 이곳에서 죽을 쓴다고도 볼 수 있다.
-오, 쿠어스필드 참 오랜만에 와 본다.
-그렇지? 너에겐 아주 안 좋은 추억이 많을 거야. 맞춰 잡는 투구를 하다가 홈런 맞은 게 어디 한두 개라야 말이지.
-넌 키도 껑충한 놈이 왜 그렇게 깐족 거리냐?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야. 애를 도울 생각을 해야지.
-흠, 그래? 그럼 잠시 휴전하자.
성낙기는 연습 구를 던지며 예열을 마쳤다. 그리고 콜로라도의 1번 타자 트레버 스토리가 타석에 들어섰다. 체력 부담이 많은 유격수를 보면서도 0.306의 타율과 10도루, 8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자랑이다.
‘쟤가 요즘 투타 겸업으로 날린다지? 쿠어스필드는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겠군.’
“헤이, 리얼무토. 잘 지내고 있지?”
“그래 덕분에. 오랜만에 보네. 잊지 않고 말 걸어줘서 고마워.”
“잊을 리가 있나. 마이너에서 같은 팀이었는데… 후후, 그나저나 이젠 팀이 다르네. 좋은 공 부탁해.”
“알았어. 너에겐 그냥 한가운데로 던지라고 말해줄게.”
“노노, 그럴 필요는 없어. 골라 치는 재미가 떨어지잖아. 내 재주껏 치고 나갈게.”
팡.
말이 끝나고 성낙기의 공이 들어왔고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리얼무토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라인에서 잡은 공을 한참이나 빼지 않고 미트를 대고 있다. 이게 어떻게 볼이냐는 무언의 항의였는데 윌프레드에게 주의만 받았다.
팡.
볼.
이번엔 몸 쪽 포심패스트볼에 주심이 반응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홈 팀에 유리한 판정을 하는 게 모든 스포츠의 관례라지만 분명히 라인에 걸치는 공도 잡아주지 않으면 투수는 던질 공이 없다.
한가운데로 던지라는 얘기인데 그걸 못 치는 타자가 어디 있을까. 제구가 되지 않으면 170km의 공도 맞아나갈 것이다.
‘주심이 약간 맛이 갔다더니 정말이었어.’
팡.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스트라이크.”
이번엔 공 두어 개 정도 안으로 들이니 스트라이크를 준다. 손을 올리는 폼이 성의 없어 보이고 마지못해 스트라이크를 주는 느낌까지 든다. 성낙기는 제 4구를 뿌렸다.
따악.
퀘이크볼(4cm/5cm).
이런, 퀘이크볼을 쳐낸다. 역시 3할 타자라는 건가? 트레버 스토리가 쳐낸 공은 3루 땅볼 타구였다. 198cm의 가렛 쿠퍼가 바운드에 맞춰 공을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더 튀어 오른 공은 글러브 위쪽을 맞고 뒤로 흘렀다.
‘이런 젠장, 불규칙 바운드야.’
가렛 쿠퍼가 짜증 섞인 몸동작으로 경기장의 상태를 탓했지만 mlb선수라면 막아야 하는 공이었다. 유격수가 뒤로 흐른 공을 잡아 1루로 던지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하핫, 경기 재미있게 흘러가네요. 콜로라도 로키스, 좋은 찬스를 잡습니다. 노아웃에 1루! 약간 불규칙 바운드가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렇지만 저건 잡아 줘야죠. 가렛의 평소 수비라면 충분히 처리 가능한 타구였는데, 마이애미로서는 다소 아쉬운 수비입니다.”
트레버 스토리는 발 빠른 주자답게 리드를 길게 잡고 여차하면 뛸 모양새를 취했다. 성낙기는 견제구를 두어 차례 던져 리드 폭을 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2번 타자를 맞아 4구째 슬라이더를 던졌을 때, 트레버는 뛰었고 리얼무토의 송구가 2루로 날아갔다.
“세이프!”
리얼무토의 송구는 약간 높았고 공을 받아 아래로 글러브를 내리는 순간, 주자의 발은 베이스에 닿아 있었다. 성낙기의 셋 포지션과 리얼무토의 송구가 그리 나쁘진 않았는데 주자가 워낙 타이밍을 잘 끊었다.
“와, 저거 무지 빠르네.”
성낙기는 내심 트레버의 빠른 발에 놀랐다. 볼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이게 다 윌프레드 주심의 스트라이크존 좁히기에 걸려든 결과다. 다른 주심이었으면 아마도 삼진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쟤는 퀘이크볼을 어떻게 쳐냈지? 흔들림이 있는데다가 아래로 살짝 꺼지는 볼이었는데.’
성낙기는 윌프레드 주심도 주심이지만 퀘이크볼에 헛스윙이 아닌 배트에 맞혔다는 게 더 의외였다. 그리고,
따악.
2번 타자 역시 바깥쪽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투심을 때려 1루수 땅볼을 만들었다. 그사이 2루 주자는 3루로 뛰었고 성낙기는 1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다. 1루심이 타자의 아웃을 선언했다.
원아웃 주자 3루에서 나온 3번 타자는 놀란 아레나도. 사실은 이 타자가 문제다. 0.318의 타율에 11홈런 4도루에 6월 중순 현재 타점이 무려 43이다.
이대로라면 시즌이 끝나면 100타점을 훨씬 넘어서는 페이스여서 모든 투수들이 꺼리는 타자 중 하나다. 성낙기는 리얼무토에게 투심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따악.
몸 쪽으로 들어가는 초구에 타구가 먹히면서 1루수 쪽으로 날아갔다. 배트가 조금 늦게 나온 것이 몸 쪽 공을 밀어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결과적으로 그건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브라이언 대신 1루수로 나온 백업 이산 디아스의 타구 판단이 느려서 키를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먹힌 타구였는데도 우익수 앞 안타를 만들어낸 놀란 아레나도의 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트레버 스토리 선수가 홈으로 들어옵니다. 놀란 아레나도의 적시타였습니다. 아, 놀란 아레나도의 힘은 알아줘야겠네요. 먹힌 타구였는데 그대로 1루수 키를 넘겨 버렸어요.”
“성낙기 투수 고전하는데요? ERA 2.73을 기록 중인데 오늘 쿠어스필드에서는 1회 초에 실점 합니다. 물론 거기엔 3루수 실책이 따랐지만요. 콜로라도 타자들이 성낙기의 공을 배트에 맞추고 있습니다. 헛스윙이 많지 않아요. 성낙기 같은 팔색조 투수에게 무모한 스윙보다는 콤팩트한 스윙으로 맞춤형 전략을 들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잘 때려내는데요? 비록 잘 맞은 타구는 아니지만 때려내고 있고 헛스윙은 드물어 보입니다.”
성낙기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좁으니 공 한두 개 정도는 가운데로 쏠릴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타자들은 공을 때려낸다.
거기에 타자들의 스윙이 장타보다는 단타 위주의 간결한 스윙을 하고 있다.
스윙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닌데,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엄청난 인내심으로 장타 본능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런 판단의 이면엔 아마도 강하지 못한 마이애미의 내야가 있을 것이다.
일단 공을 굴리면 기회는 올 것이고 주자가 나가면 뛰는 야구로 승부를 본다. 이게 콜로라도 로키스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감독과 선수들 모두 성낙기의 피칭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본 뒤 내린 것이다.
그들은 성낙기가 던지는 공의 종류가 많다는 것, 그리고 강력한 볼 끝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적어도 성낙기에 대해서만은 큰 스윙을 자제해야 승산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쿠어스필드를 경기장으로 쓰는 홈팀이 내린 결정 치고는 의외였다.
“좋아,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어.”
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의 감독 버드 블랙은 자신의 결정이 옮았음을 확신했다. 좀처럼 실점이 없는 투수에게 1회 말에 1점을 얻고 있고 찬스는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
“투수진은 성낙기의 가세로 어느 정도 버티는 중인데 타격과 수비가 상대적으로 약해. 이래서는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단 말이지.”
“맞습니다. 성낙기의 투타 겸업은 정말 기대하지도 못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어요. 다만, 다른 팀들에 비해 수비 쪽이 느슨한 게 사실이지요. 강팀은 안타 성 타구를 막아내는 힘이 있는데 우린 그런 플레이가 없죠.”
“맞아. 투수들이 믿을 만한 내야진이 되어야 하는데 뭔가 짜임새가 부족해.”
경기를 관전하면서 마이애미의 오스틴 단장과 윌슨 스카우트는 팀의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0.449의 승률을 기록하며 워싱턴과 뉴욕 메츠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지만, 이 성적엔 착시가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만약, 이 성적에서 성낙기라는 투수를 제외하고 본다면 그 심각성이 두드러진다.
5선발 정도로 시즌 10승 언저리를 해주기만 바랐던 성낙기가 6월 중순에 벌써 6승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