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080화 감독이 바뀌다니 1
“허허, 야구 선수 하나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이렇게 개선될 줄은 몰랐다. 아경이 네가 아주 신의 한 수를 뒀어.”
“아녀요. 아빠도 못 이기는 척 허락해 주셨잖아요.”
“그렇긴 했지. 하여튼 네가 맡은 사업도 당분간은 걱정 없겠구나. 매출이 많이 올랐지?”
“분리되기 전, 그러니까 작년에 비하면 150%에 육박해요. 새로운 아이템을 적용하기도 했지만, 제가 성낙기 선수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얻은 이미지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낙기 씨 메이저리그 진출과 맞물려 제가 대표로 취임한 일도 생각보다 크게 다뤄졌죠.”
“성낙기 비시즌에 광고 모델로 쓰면 시너지 효과가 더 날거다. 하하, 그놈 참 신통방통하네. 잘 키운 야구 선수 하나가 삼호 그룹을 이토록 때깔 나게 만들 줄이야.”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도 만나기만 하면 성낙기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기업 이미지가 본래 나쁜 건 아니었지만, 한 선수의 꿈을 위해 비난을 무릅쓰고 mlb에 진출시킨 일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늘 꿈을 위해 세계로 도전하는 멋진 기업으로 이미지가 덧칠 되었다.
그뿐이면 말을 안 하지.
강속구 투수도 아닌 성낙기의 성공을 어떻게 예측하고 직접 에이전트로 뛰면서까지 계약을 성사시켰는지 모르겠다며 선견지명과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진 오너 일가로 TV다큐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정말,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분입니다. 저의 꿈을 위해 이역만리까지 날아와 단잠을 쪼개가며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주를 설득했죠.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동시에…….”
“아, 성낙기 선수 너무 오버하면 안 되고요. 사실이라 해도 적당히 하셔야 시청자들의 감동도 큰 법입니다.”
“그래요? 그때 늘 제 식사를 챙겨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참으로 감동의 허리케인…….”
성낙기의 오버질은 편집되었지만, 경기와 함께 방송된 성낙기의 인터뷰는 삼호 그룹의 이미지 개선에 휘발유를 부었다. 삼호그룹을 재계 3대 그룹으로 올려야 한다는, 가칭 <네티즌 매출운동연합>이라는 카페까지 만들어졌다.
“진짜 야구 잘하고 볼 일이야. 낙기 하나 때문에 야구팬들이 뒤집어질 줄 누가 알았겠냐.”
“니들도 언젠가는 기회가 있다. 낙기만 갔다고 툴툴대지 말고 실력을 쌓다보면 길은 열리게 되어 있어. 알겠지?”
“네, 코치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계현 투수 코치는 이중호와 구문철, 그리고 이제 어엿한 3선발로 올라선 안민기와 김석문, 이두열 등을 데리고 강릉 시내 모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계현 코치의 말을 듣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는데, 지가 mlb에서 해봐야 얼마나 하랴 싶었던 생각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 넘는 퍼포먼스에 할 말을 잃었다.
어제만 해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조 켈리가 던진 98마일의 공을 때려 2루타를 뽑아낸 도라이 같은 놈이다. 경기는 9회 초 성낙기의 안타와 후속타로 4:3이 되었고 마이애미의 마무리 야를린 가르시아가 경기를 매조지 했다.
“그런데 코치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두열의 물음에 이계현 코치가 되물었다.
“여기 있을 땐 141~142km 정도가 고작이었던 애가 거기 가서는 148km를 던지고 있어요. 아니, 아니다. 엊그제는 155km의 공도 던졌고요. 제가 성낙기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니 하는 말입니다.”
“의심하고 있구만, 뭘.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그런데 약은 아니야. 그렇잖아도 너무 잘하니까 수차례 피를 뽑아갔지. 물론 아무것도 안 나왔고.”
삼호슈퍼스타즈의 포수 이두열은 이계현 코치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mlb에서 약물 검사를 했고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이 언론을 통해 나왔었다.
“혹시… 성낙기가 말입니다.”
“넌 또 왜?”
이번엔 이중호였다.
“좀 황당하지만… 뭐, 늑대의 후예 그런 건 아닐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인간이랑 염색체가 다르다던가.”
“어지간히 해라. 팬들 들으면 다 떨어져 나가겠다. 무식하다고.”
삼호 슈퍼스타즈의 마무리로 뛰고 있는 구문철은 이중호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왜 영화 같은 거 보면 주사를 맞고 나서 헐크로 변하기도 하고 겉모습은 똑같지만 엄청난 괴력을 가진 인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주사로 호랑이나 고릴라 같은 근육과 순발력을 가지게 되면 지금 성낙기의 활약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집안의 누군가가 의사일지도 몰라. 보통 의사가 아닌… 짐승의 근육 같은 걸 이식하는…….’
구문철의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4위로 쳐진 팀 성적을 끌어올려 보자고 이런 자리도 만들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영화 찍는 소리니, 답답해진 이계현 코치가 먼저 일어서 버렸다.
***
6월 둘째 주, 성낙기의 등판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인 쿠어스필드였다.
47승 24패로 승률 0.661의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팀이다.
지난 시즌 와일드카드 전에서 승리하며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워싱턴 내셔널스에 3승 1패를 기록 하면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런 아픔 때문인지 올해는 시즌을 시작하자 1위로 치고 나가더니 좀처럼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LA 다저스를 비롯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샌프란시스코 등 전통의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틈바구니 속에서 1위를 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콜로라도 로키스의 전력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탄탄하다는 증거다.
“요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마이애미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네요. 여러분도 잘 아실 텐데요. 바로 성낙기입니다. 그에 맞서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투수는, 지난 시즌 16승 8패, ERA 0.289의 성적을 올린 에이스 부룩스 파운더스입니다.”
“이름값으로는 역시 부룩스가 돋보이죠?”
“그렇기 합니다. 꾸준히 성적을 내는 선수이고 콜로라도의 에이스니까요. 불펜으로 뛰다가 선발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투수죠. 다만, 성낙기 투수의 퍼포먼스가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경기에서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하고도 패했지만, 6승 3패 ERA 2.73으로 신인 선수임에도 놀라운 성적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거기에 타격도 잘하죠.”
캐스터와 해설자는 성낙기와 부룩스 파운더스의 대결이 기대되는지 목소리의 톤이 높다.
부룩스는 1회 초, 제구가 잘 잡히지 않는지 선두타자 가렛 쿠퍼에게 볼넷을 내줬다.
그러나 J.T리들이 삼진아웃을 당했고 5월 경기에서 수비로 주가를 올렸던 루이스 브린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진기 명기 같은 수비를 한 경기에서 여러 개 보여준 후로 타격도 물이 올랐다.
퍽.
“오, 부룩스 투수 오늘 좋지 않은데요? 루이스의 엉덩이를 공으로 맞추고 맙니다. 루이스 선수 기분이 나쁜지 부룩스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포수 토니 월터스가 루이스에게 무슨 말을 하는군요. 아마, 고의가 아니었단 거겠죠?”
“그렇겠죠. 1회에 빈볼을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죠. 원한이 쌓였다면 모를까. 패스트볼이 손에서 빠진 걸로 보이네요.”
“어쨌든 1회부터 좋은 기회를 잡고 있는 마이애미 마린스입니다. 원아웃에 1, 2루의 찬스에 4번 타자 브라이언 앤더슨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부룩스 투수 위기를 맞았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쿠어스필드같이 익숙한 구장에서 이러면 안 되죠. 에이스가 1회부터 흔들리면 팀의 사기가 엉망이 되는 겁니다.”
부룩스는 1회 초에 올라오자마자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가만 기다리기만 해도 될 정도로 제구도 잡히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윌프레드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은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제 마이애미의 4번 타자 루이스를 상대해야 한다.
부룩스는 심호흡을 했다. 컨디션이 별로일 때 하필 윌프레드 주심을 만났다. 경기 전부터 오늘 경기는 제법 험난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1회부터 이럴 줄은 몰랐다.
‘지금 스트라이크를 두어 개 정도 안 잡아 준 것 같은데… 저 또라이는 그게 투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건가?’
그는 내심 여기까지 몰린 데에는 윌프레드의 스트라이크 존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제구가 난조라 해도 잡아줄 스트라이크만 잘 잡아주면 투수는 스스로 제구를 잡아나가는 건데, 스트라이크 될 게 볼이 되어버리면 그 오심 하나로 안 맞을 홈런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팡.
볼.
팡.
볼.
몸 쪽과 바깥쪽으로 투심 성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는데 둘 다 볼이다. 부룩스는 1구에 이어 바깥쪽 공마저 주심이 잡아주지 않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면서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면서 어이없다는 모션을 했다. 주심이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에서 조금 내려온 부룩스를 가리켰다.
“뭐야? 경기 진행해.”
윌프레드도 화난 표정이다. 부룩스는 화를 삭히며 뒤돌아 마운드의 땅을 발로 툭툭, 찼다. 그러고는 2루 주자를 힐끗 본 뒤 공을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3구로 던진 공은 2구와 거의 같은 위치였는데 이번엔 스트라이크. 브라이언은 약간 갸웃하며 타석에서 한 발을 뺐다. 부룩스는 인터벌 없이 4구를 뿌렸고.
팡.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라고요? 이게?”
“뭐야, 너도 까불어? 넌 타자고 난 주심이야. 넌 치는 놈이고 난 볼카운트를 판정하지. 그런데 뭐? 스트라이크가 아니라고? 퇴장!”
“아니, 뭐 이런 썅! shit!”
주심과 브라이언의 실랑이가 일어났다.
“오우, 뭡니까. 윌프레드 주심, 갑자기 브라이언 앤더슨을 퇴장시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요.”
“타석에서 루이스 선수가 볼 판정에 불만을 나타냈죠. 퇴장은 주심의 권한입니다만, 1회에 저런 경우는 아주 드문데요. 마이애미의 타선을 이끄는 브라이언인데 말입니다.”
난데없이 일어난 주심과 브라이언의 실랑이에 해설자들도 흥분하며 말했다.
“dumbbell(멍청이)!!”
레인피터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고 셜리번과 워마린 코치가 뒤따랐다. 피터 감독은 홈 플레이트에 가자마자 주심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당신, 정말 야구 이렇게 할 거야? 선수가 판정에 불만을 갖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로 퇴장을 줘? 미쳤어?”
“뭐라고? crazy? 퇴장!!”
-워우, 윌프레드는 역시 우리 편이었어. 순식간에 두 명 날렸다. ㅋㅋ
-아니, 저 꼬장꼬장한 주심에게 대들 건 뭐야.
-오 예! 브라이언이 날아갔다. 갓갓 윌프레드를 경배하라.
-마이애미 애들 표정 봐. 완전 생각이 이탈한 얼굴들이야.
-1회에 두 명씩이면 9회가 되면 하나도 없겠는데?
-하여튼 저 성질은 알아줘야 해. 사회 부적응자를 홈 플레이트에 모셔 놓은 거나 같아.
-마이애미가 윌프레드를 몰라도 너무 몰랐군. 미안.
들끓는 마이애미의 팬들과는 달리 콜로라도 로키스의 팬들은 아주 신이 났다. 팀의 중심이 되는 4번 타자를 날려 버렸으니 경기는 한쪽으로 기울 게 분명하다. 메이저리그 심판 중에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윌프레드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다.
-영감탱이!
-저건 심판이 아니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게 야구계를 위해서 필요해.
-오, 저건 있을 수 없어. 마이애미는 정식으로 제소하길 바라.
-콜로라도와 윌프레드 둘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
-이건 야구팬을 떨구는 멍청한 짓이야.
-오 마이 갓!
반면 마이애미의 구단 사이트엔 댓글이 폭주했다.
그러는 사이, 마이애미는 급히 내야수 이산 디아스를 준비시켰다. 브라이언의 볼 카운트 투 볼 투 스트라이크를 그대로 인계 받아 타석에 들어선 디아스는 초구에 헛스윙을 하는 바람에 투아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마이애미의 5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성낙기였는데 투수가 공을 던지기도 전에 타석에 서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에 보통은 하위 타선에 놓은 것이 원칙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런 상식을 깨고 레인피터 감독은 성낙기를 5번 타자로 기용했고 성낙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체력에 부담은 되지만 자신을 중용하는 감독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5번 타자를 맡은 성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