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075화 동부지구 4위 3
“하, 저거 좀만 한 게 깝치네. 어디 쳐 봐라.”
신더가드는 성낙기를 향해 특유의 강속구를 던졌다. 몸 쪽으로 잘 제구 된, 보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속도의 공.
파아앙!
스트라이크.
‘와, 이정도야?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겠구나. 강속구로 날 겁주겠다 이거지?’
성낙기는 초구에 101(162.5km)마일이 찍힌 신더가드의 공에 놀라면서도 피가 끓어올랐다.
투수와 타자로 상대하고 있지만, 투수와 투수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자존심까지 얽혀 있다. 상대 팀 투수가 타석에 섰을 때 안타라도 맞으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투수들이 많은 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신더가드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공을 전력으로 뿌리고 있는 거고.
-화아, 이런 공은 행크아론이 환생해야 겨우 쳐내겠다. 너에겐 무리야. 그냥 배트 내리고 스트라이크 먹고 내려 와.
“shit!”
“…어? 뭐야. 방금 그 욕 우리에게 한 거야?”
케빈 플라웨키가 성낙기의 영어 욕을 듣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너 같으면 욕이 안 나오겠냐? 이건 인간의 공이 아니야. 나 그냥 삼진 먹었다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갈게.”
“무슨 소리를 하는…….”
파앙.
볼.
오, 방금 공은 브레이킹 볼이었다. 90마일의 슬라이더였는데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휘면서 뚝 떨어졌다.
성낙기는 배트를 곧추 잡고 방금의 느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분명 한 가운데로 오는 포심패스트볼 같았지만 초구와 2구의 공에서 느껴지는 감은 조금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려웠는데,
오늘 제구를 봤을 때 포심패스트볼을 한가운데로 던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하나이고 초구부터 꽂아 넣은 공으로 판단할 때 성낙기를 꽤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둘,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세하다면 미세한데 브레이킹 볼을 던질 때 팔이 조금 쳐져 보인다는 거였다.
-너, 어떻게 알았니? 브레이킹 볼이라는 거. 아니면 그냥 기다려 본 거야?
“알았죠.”
-그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묻잖여.
“방금 공은 손이 약간… 한 5cm에서 10cm 정도? 내려왔거든요.”
-와, 그게 보인다는 거야? 나 없는 새에 ‘천리안의 눈’ 같은 거 받았냐?
‘…그럼, 다른 사람은 안 보인다는 건가?’
타석 앞까지 와 가지고 집중을 흐트러뜨려 놓는 저 사람이 진정 스승이란 말인가? 자그마치 투수가 신더가드인데 말이다. 초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잡담 수준의 말을 거는 게 스승의 일이야? 성낙기는 하고픈 말을 꾹 참고 신더가드의 다음 공을 기다렸다.
‘아, 이 새끼 더럽게 말 많은 놈이네. 내가 보다보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대화하듯이 지 혼자 씨부리는 놈은 처음이다.’
케빈 플라웨키는 실바와 성낙기의 대화 중 성낙기의 한국말을 들으며 한심한 눈으로 성낙기를 바라보았다.
성낙기가 케빈 플라웨키의 그런 마음을 눈치 챘는지 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케빈 플라웨키는 다시 한 번 몸 쪽 포심패스트볼을 요구했다. 몸 쪽 사인을 내고 나서는 보통 때보다 타자에 더 가깝게 글러브를 댔다.
‘이런 놈들은 갈비뼈가 부러져 봐야 정신을 자리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모르고 설쳐대는 유형이다. 브라이스 하퍼 같은 애들.’
신더가드는 와인드업을 한 뒤 전력으로 공을 던졌다. 성낙기는 보통의 투수들을 상대할 때보다 반 박자 빠르게 반응했다. 왼발을 살짝 오픈 스탠스로 옮기면서 팔꿈치를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는 공에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아, 뭔가요. 98(157.7km)마일의 공을 쳐내는 성낙기 투수! 내야에서 크게 바운드 됩니다. 3루수 개빈 체키니 앞으로 뛰어 들어 옵니다. 맨손으로 공을 잡아 러닝 슬로우로 1루에 던집니다. 아, 저런. 공이 빠졌어요. 2루까지 뛰어가는 성낙기 선수, 3루수 에러로 득점권 찬스를 맞습니다.”
“노아 신더가드 선수 마운드에서 소리칩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해 화가 났겠죠. 투수에게 맞았으니 더 그럴 겁니다.”
“음… 투수가 저러면 3루수가 더 미안해 할 것 같은데요. 일단 행운의 안타로 좋은 찬스를 잡는 마이애미 말린스입니다.”
타석엔 가렛 쿠퍼가 등장했다. 덩치도 크지만 배트 스피드도 빠른 선수라서 속구 공략에 강점이 있다. 실제로 신더가드를 상대로 한 가렛 쿠퍼의 지난 시즌 성적은 0.267로 자신의 타율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
마운드의 신더가드는 인상이 구겨졌다.
많이 양보해서 내야 안타면 될 타구를 수비 실책으로 득점권까지 허용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얼굴이 벌게진 걸 보면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마이애미 관중들은 성낙기의 뜻밖의 안타에 즐거워했다. 마이애미의 더그아웃 역시 신기해하는 표정들이었다.
노아 신더가드가 누군가.
광속구에 볼 끝이 춤을 추는 공을 던지는 투수이며 4월 말 현재 ERA 2.14를 찍고 있는 난공불락에 가까운 투수다. 거기에 마이애미를 상대로는 지난 시즌에 완봉을 두 차례나 기록할 만큼 강하다.
시즌 중반엔 노히트 노런까지 당할 뻔 했던 것을 발 빠른 J.T 리들이 간신히 내야 안타 하나를 만들어내면서 치욕을 면한 바 있을 정도로 신더가드만 만나면 죽을 쓰는 타선이었다.
그런데 투수인 성낙기가 그런 투수를 상대로 친 공이 내야안타와 실책으로 2루타를 친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냈다.
팡.
스트라이크.
신더가드는 자신의 기분 그대로 강속구를 가렛 쿠퍼의 몸 쪽으로 꽂아 넣었다. 가렛 쿠퍼는 공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타이밍을 맞추는 모습, 이미 1회에 삼진을 당했기에 더 신중해 보인다. 신더가드는 포수 케빈 플라웨키의 사인에 한 차례 고개를 내저은 후, 공을 던졌다.
따악.
100(161km)마일의 공이었고 바깥쪽이었지만 완벽한 제구가 되지는 못했다. 가렛 쿠퍼가 배트를 돌렸고 빠른 공에 배트가 밀리면서 1루수 머리 위로 날아갔다.
1루수가 잡기 힘든 우익수 라인 선상으로 향하는 공이었고 우익수 마이클 콘포토가 쏜살같이 달려왔지만 타구는 텍사스 성 안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2루에 있던 성낙기는 홈으로 돌진했다.
“굿!”
“나이스 잘했어!”
더그아웃으로 뛰어 들어오는 성낙기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격려성 멘트를 날리지만 마냥 기뻐할 일만도 아닌 게,
타자인 자신들은 3회까지 7삼진을 당한 부끄러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더가드는 2번 타자 웨인 크루를 상대로는 98(157.7km)마일의 투심패스트볼을 선보이며 내야 땅볼로 잡아냈다.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욕을 해댄 건 당연했고.
“좋아, 1점 뽑았으니까 완봉 가자. 성낙기 어때, 할 수 있지?”
셜리번 투수 코치는 오늘 유독 완봉에 대한 욕심이 크다. 경기 초반에 완봉 운운은 그저 해보는 말이려니 했는데 두 번째 들으니 진심으로 느껴진다.
아니, 그러면 자기가 해보든가. 듣기론 자기는 현역 시절 완봉 몇 번 못해본 걸로 아는데, 지금 뉴욕 메츠를 상대로 나더러 하라고?
성낙기는 입이 살짝 나온 채로 마운드에 올랐다. 저런 식으로 투수에게 부담감을 주는 건 코치의 역할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허봉호 감독이 저랬지. 결국 뭐야, 내가 팀을 떠났잖아.
-화, 이 자식 합리화 쩌네. 별걸 다 같다 붙이면서 툴툴거리네.
“뭐예요. 내 생각을 읽는 거?”
-아니, 니가 방금 중얼거렸어.
“…정말인가?”
성낙기는 1:0의 리드를 잡고 나자 욕심이 났다. 오늘은 완봉 할아비라도 하리라,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 100구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체력이 85인 이상, 그 이상의 투구 수는 장담하기 어렵다. 하물며 뉴욕 메츠 같은 강팀을 상대로 체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느린 변화구로만 상대할 수는 없다.
파앙.
스트라이크.
성낙기가 4회에도 스트라이크 위주의 투구를 하는 이유였다. 타선의 약함에 비해 수비는 어느 정도 하는 팀이 마이애미니까 내야 땅볼만 잘 유도하면 투구 수를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을 성낙기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거의 쓰지 않던 포크볼과 투심패스드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 커브의 제구역이나 위력엔 못 미치지만 포크볼은 드랙 실바의 전성기의 70%였고 투심패스트볼은 75%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리얼무토가 짜증을 내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하아, 포크볼 받아내기 힘드네. 원바운드도 많고 쟤가 지금 나 훈련시키는 거 맞지?”
포크볼이 포심패스트볼의 높이로 오면서 뚝뚝 떨어지자 뉴욕메츠의 타자들은 스윙 아니면 겨우 쳐낸 볼도 힘이 실리지 않으면서 내야 땅볼 타구가 많아졌다.
거기에 투심패스트볼이 우타자에겐 꺾여 들어오고 좌타자에겐 바깥쪽으로 휘어져서 공략이 쉽지 않았다. 물론, 제구력에 약점이 있는 구질이어서 볼이 많았는데 간간히 포심패스트볼을 섞어주면서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 뭐야. 5회까지 산발 3안타야? 오늘 뉴욕 메츠 지는 날이야?
-기다려 봐. 쟤도 5이닝이나 던졌어.
-5이닝이면 뭐해. 67구밖에 안 던졌는데.
-이대로 가면 완봉패다. 힘내라 메츠!
-신더가드도 2이닝 2안타야. 가렛 쿠퍼의 안타만 아니었으면 신더가드 완봉인데.
-KKK면 뭐하냐고 경기에 지면 남는 게 없지.
-저 한국 투수 무척 까다로운 공을 던져. 변화구는 못 던지는 구종이 없고, 꺾임도 아주 훌륭해. 아마 메츠의 천적이 될 거 같아.
-아직 생소해서 그럴 거야. 연구가 안 된 투수라는 뜻이지. 날이 더 풀리고 타격감 돌아오면 두들길 수 있어.
-퍽이나.
[체력이 18남았습니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5회까지 67구를 던졌을 뿐인데 의외로 체력 소모가 많다. 계산대로라면 완투까지 가는 투구 수인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성낙기는 내심 당황했다. 이대로라면 6회가 마지막 이닝이다. 성낙기는 다시 한 번 상태 창을 떠올렸다. 역시나 체력은 18이 남았을 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을 가질 때 상태창이 응답했다.
[타격에서 체력 소모가 많았습니다. 또한 거의 모든 구종이 전력투구입니다.]
그런 거였나? KBO에서 뛸 땐 상태 창의 안내 멘트가 없어서 그러려니 했고, 어차피 체력 스탯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다면 타자로 서는 만큼 체력이 줄어들고 안타나, 도루 등의 뛰는 야구를 할 땐 더 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굳이 안타를 칠 필요는 없단 말인가?’
성낙기는 6회에 마운드에 오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투타 겸업을 하면서 타자로서도 만만치 않은 성적을 내는 게 목표였는데, 투구에 영향을 준다면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잘나간다 했다.’
성낙기는 마운드에 서서 리얼무토에게 사인을 냈다. 경기 전, 셜리번 코치와 약속했다.
승리를 거두면 한인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기로.
물론 셜리번 코치가 내는 거지. 셜리번 코치로서는 밑질 게 없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투수가 승리를 거두면 자신의 주가가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떨어질 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성낙기는 뉴욕 메츠의 발 빠른 타자 아메드 로사리오에게 1구로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졌다. 주심이 약간 빠졌다고 보았는지 잡아주지 않는다. 2구는 역시 바깥쪽 포심패스트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