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073화 동부지구 4위 1
“내, 저럴 줄 알았다. 어제 일을 그냥 넘어갈 놈들이 아니지.”
성낙기 곁에 있던 가렛 쿠퍼의 말처럼 워싱턴 내셔널스는 어제의 앙금을 보복구로 풀고 있다. 그것도 그냥 타자가 아닌 팀의 간판타자 브라이언 앤더슨을 상대로 말이다.
이미 마이애미 더그아웃에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었고 브라이언 앤더슨을 상대로 조심하라는 언질까지 준 터였다.
그 말을 들은 브라이언 앤더슨은 애초에 타석에 들어설 때 홈 플레이트에서 약간 빠져 있는 자세를 취했지만 맞추려고 드는 상대에겐 무의미한 시도였다.
엉덩이를 맞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아 하나.
가슴 부위나 헤드 샷이 아닌 걸로 봐서는 워싱턴 내셔널스 역시 어제 일의 확전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다시 벤치클리어링으로 이어지는 경우, 강력한 제재가 뒤따를 수 있고 투수가 퇴장당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코다글로버는 벨트 아래를 공격함으로써 제재도 피하고 마이애미도 받아들일 만한 상황과 떨어진 팀의 자존심도 올려주는, 여러 가지의 노림수를 가진 사구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보복구로 인해 마이애미는 노아웃 1루라는 찬스를 맞았으니 손해만 있는 사구는 아니었다.
문제는, 5번 타자 리얼무토가 병살타로 팀에 찬물을 끼얹어 버린 것이었는데
리얼무토가 친 타구가 유격수에게 잡혀 6, 4, 3의 병살이 완성되었을 때 마이애미의 팬들은 탄식을 흘리며 실망을 나타냈다.
간판타자가 사구를 참고 1루로 걸어 나갔으니 후속타자가 뭔가를 해주어야 보복구에 대한 응징이 되는데 팀의 지주라는 리얼무토가 허무하게 아웃되는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졌으니 팬들의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다행히 6번 타자 시에라가 솔로 홈런으로 팀이 체면을 살렸고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방심한 코다글로버는 7번 타자를 내야땅볼로 잡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shit! shit!’을 연달아 내뱉으며 자신을 자책했다.
“휴~ 되었어. 이걸로 일단락이야. 시에라가 참 마음에 들어, 결정적인 순간에 한 건씩 해주잖아.”
“맞아, 타율은 낮아도 팀이 필요로 할 때는 쳐주는 선수지.”
셜리번 투수 코치와 워마린 타격 코치의 대화처럼 시에라는 지난 시즌 0.253의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18홈런 62타점을 올린, 찬스에 강한 타자였고 삼호슈퍼스타즈의 김석문처럼 기대가 난망한 상황에서 쳐주는 뜬금포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
성낙기는 5회까지 안타를 딱 두 개 맞았는데 4회 선두타자인 트레아 터너에게 안타를 맞은 뒤, 투아웃을 잘 잡아놓고 4번 타자 라파엘 바티스타에게 투런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였는데 빗맞은 듯 높이 솟은 공이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어갔다. 볼 배합에 특별한 문제도 없었고 슬라이더 각도 괜찮았다. 그걸 힘으로 넘겨 버리는 데에는 성낙기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와, 졌다. 어떻게 저런 게 넘어 가냐.
-성낙기, 여기선 언터처블 급이었는데 거기선 홈런 안 맞는 날이 드무네.
-벌써 2승이다. 더 이상 뭘 바래.
-공이 많이 빨라지긴 했는데 더 이상은 진전이 없는 건가?
-포심패스트볼이 빨라야 변화구가 잘 먹히는데 살짝 아쉽…….
-마이애미도 하나 쳐라.
한국 네티즌들은 성낙기의 투구에 일희일비했다. KBO에서 워낙 독특한 캐릭터였던 데다가 mlb에 진출해서도 좋은 투수 내용을 보였고 타자로서도 홈런을 치는 등 활약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경기는 어느덧 6회로 접어들었고 워싱턴의 선발 코다글로버는 6회 초에 마운드에 오를 때까지 볼넷 2개에 산발 5안타 무실점으로 역투하고 있었다. 5회까지 77구를 던진 코다글로버였고 마이애미 타선은 3번 타자 루이스 브린슨 부터였다.
투수의 힘이 떨어질 만한 때였고 타선은 클린업 트리오다. 6회에 뭔가 일을 내지 않으면 7회부터는 불펜 투입으로 어려운 경기가 될 확률이 있었다.
하지만,
삼진 아웃.
내야땅볼 아웃.
좌익수 플라이 아웃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마이애미 타선은 무기력하게 물러났다.
성낙기는 그래도 6회까지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왔고 7회부터는 불펜이 투입되었다.
그때까지도 마이애미 타선은 경기 스코어 1:2에서 추가 점수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경기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성낙기는 나름대로 볼넷 하나와 2루타로 타석에서도 제 몫을 했지만, 후속타 불발로 허무하게 경기를 내줬다.
“마이애미 타선이 너무 무력해. 한국에서 온 투수가 잘 던졌는데 아쉽게 됐군.”
“피터 감독이 문제야. 팀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 액션이 부족해.”
“젠장. 입장료가 아깝네.”
“오늘 투수는 6이닝 2실점으로 잘 막고 안타도 쳤는데 타자들이 저래서야, 동부 지구 꼴찌는 맡아놨어.”
“어이, 제임스 오늘 시간 되면 술이나 한잔 하지.”
마이애미 팬들이 구시렁거리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성낙기는 조지타운에 있는 스위트 하버 호텔의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골똘히 생각했다.
오늘 워싱턴 내셔널스를 맞아 5안타 2실점으로 그런대로 잘 막았지만 그놈의 홈런이 문제다. 게다가 솔로 홈런이면 그나마 나은데 2루타 후에 투아웃을 잘 잡아놓고 맞았다.
“왠지, 슬라이더를 던지기 싫더라니.”
저녁에 있었던 경기를 혼자 돌이켜 보는데 벨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보니 리얼무토였다. 뿐만 아니라 브라이언 앤더슨도 있고 가렛 쿠퍼도 왔다. 그리고 벤치클리어링으로 유명세를 탄 알칸타라까지 왔는데 손에 맥주가 들려 있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너 잘 지내는지 보려고 왔지.”
리얼무토가 밀고 들어오며 대꾸했다. 가만 보니 한 잔씩 한 얼굴들이다. 먼저 알칸타라가 성낙기의 어깨를 두드린다. 붉어진 얼굴을 보니 고마움이 묻어 있다. 성낙기도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헤이. 오늘 너 잘 던졌는데 점수 못 내줘서 미안하다.”
브라이언 앤더슨이 4번 타자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뭐 언제나 잘 치면 그게 사람이냐, 신이지.
“괜찮아,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거지. 근데 자야 할 시간에 웬일이야?”
“응, 너 신고식 안 했잖아.”
“신고식? 메이저리그도 그런 게 있어?”
“있어. 코 막고 맥주 한 병 들이켜는 거야.”
가렛 쿠퍼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맥주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아니야. 우리가 온 건 앞으로 잘해보자는 뜻이다. 그만큼 널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리얼무토 말이 맞아. 넌 공 잘 던지더라. 어쩌면 그렇게 제구력이 좋아? 게다가 못 던지는 변화구도 없고. 하아, 스피드만 더 있었더라면 레전드가 될 텐데… 하지만 지금 공으로도 좋은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참 그리고 그날 고생 많았다.”
“아, 벤치클리어링? 그야 당연하지. 같은 팀인데.”
“니 벌금 5천 달러는 내가… 내주지는 않겠다. 그러니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도록 해.”
그런 식으로 실없는 소리들을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개막을 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하긴, 미안하기도 하겠지. 오늘이 위닝시리즈를 만들 좋은 찬스였는데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내일 선발 케일럽 스미스는 ERA만 봐도 5.36으로 크게 기대할 투수가 아니다.
제구력이 컨디션에 따라 극과 극이어서 97~98(156~157km)마일에 달하는 스피드를 살리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어쨌든 성낙기는 같은 팀 선수들의 방문을 받고 보니 기분이 급 좋아져서 편하게 잠들었다.
***
어느새 4월 말이다.
마이애미는 그동안 12승 15패로 승률 0.444로 동부지구 5개 팀 중 4위를 달리고 있었다. 5위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와도 겨우 1게임차에 불과했다.
그동안 성낙기는 1승도 추가하지 못했지만 팀의 에이스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2승 1패에 ERA 3.29로 호세 우레나의 ERA 2.91에 이어 팀 내 방어율 2위였다. 제구가 들쭉날쭉하던 케일럽 스미스는 트리플 A로 내려갔고 대신 타이런 게레로가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만큼 선발 투수진의 부침이 심했고 로테이션도 들쭉날쭉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성낙기의 4월 마지막 등판이다.
상대는 뉴욕 메츠였는데 거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뉴욕 메츠의 투수는 자그마치 천둥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노아 신더가드였다.
“하, 저거 공 어처구니없이 빠른데… 안 그래도 승에 굶주렸는데 하필 여기서 만나냐.”
리얼무토는 상대편 더그아웃의 신더가드를 보고는 마음이 심란했다. 오늘 경기에 지고 필라델피아가 상대 팀에 승리하면 공동 꼴찌가 되는 것이니 4월의 마무리를 그렇게 한다는 건 꺼림칙하다.
“헤이, 낙기. 오늘은 실점하면 무조건 진다. 상대 선발이 누군지는 알지?”
“잘 알지. 무식하게 공만 빠른 놈.”
“음… 그래. 잘 아는군. 그러니까 넌 더 무식하게 던져야만 해.”
“어떻게?”
“네 구질 중에서 피안타율이 가장 낮은 공을 많이 던지는 거지. 그러니까 라이징패스트볼하고 또 그 뭐냐. 덜덜 떨리는 볼 있잖아. 뭐라 불러야 하지? 쉐이크? 퀘이크 볼? 그걸로 애들 타선을 잠재우자. 그리고 90마일 대 공을 아끼지 말고 초반부터 마구 던져.”
“쩝… 그러면 체력이 바닥나서 안 돼.”
“왜 안 돼. 너 저번에 6회에도 95마일 던졌잖아. 누굴 속이려고 해.”
“그땐 없는 체력 쥐어 짠 거야.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
“…알았다. 패전투수 되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 애가 선배 말을 뭐같이 알아듣네.”
오늘 경기장은 말린스 파크. 관중석은 매진이었다.
그동안 승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투타겸업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성낙기와 30대에 접어들어서도 공의 스피드가 전혀 줄지 않은 노아 신더가드와의 맞대결에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신더가드는 공의 스피드가 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완급 조절에도 눈을 떴고 변화구의 제구력 또한 좋아져서 내셔널리그 다승왕 후보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팡.
스트라이크.
역시 초구는 포심패스트볼이 시원하게 꽂혀야 제맛이다.
지금 성낙기가 던질 수 있는 스피드의 최대치는 148km. 볼 끝이 중력을 타지 않는 것처럼 쭉 뻗어서 그 이상의 효과는 있지만 살짝 아쉽다.
100마일을 던지는 신더가드의 위력에 비하면 촛불과 횃불의 차이다. 거기에 신더가드의 슬라이더와 커브, 싱커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100마일을 던지다가 80마일 초반대의 커브를 던지면 타이밍을 제대로 잡을 타자가 별로 없다.
볼 배합을 예측하고 있지 않는 한은 몸의 균형이 무너진다. 거기에 예전부터 98마일(157km)의 싱커를 밥 먹듯이 던졌으니 말 다했다. 그런 투수가 지난 시즌엔 자잘한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해서 어깨가 싱싱해지기라도 했는지 올해는 유독 위력적이다.
팡.
스트라이크.
하지만 그런 것에 위축되면 성낙기가 아니었다.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라도 한 양, 다른 경기보다 더 공격적이다.
뉴욕 메츠 1번 타자는 3구째의 커브에 엉덩이가 빠지며 배트를 휘둘렀고 성낙기는 내친 김에 2번 타자마저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뒤이어 나타난 3번 타자 도미닉 스미스가 약간 문제긴 하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개막 후 한 달 동안 0.314의 타율에 6홈런을 쏘아올린, 정교하면서도 파워 있는 까다로운 타자다.
팡.
볼.
역시나, 초구로 바깥쪽 포크 볼을 던져 보았는데 쉽게 골라낸다. 이게 다 포심패스트볼의 스피드가 느린 탓이다.
스트라이크와 볼, 그리고 패스트볼과 브레이킹 볼을 판단할 여유가, 톱클래스 타자에게는 있는 것이다. 성낙기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몸 쪽으로 붙이는 포심패스트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