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70화 (70/188)

# 70

070화 투수냐 타자냐 3

“어어? 너 여기 웬일이야?”

성낙기는 관중석 아랫단으로 내려온 장하연의 손을 덥석 잡고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서희 친구 장하연을 만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제가 한 말 잊었어요? 미국 대학에 원서 넣었다고 했었잖아요.”

“아, 맞다. 생명공학이라고 했었지. 그럼 너 합격한 거야?”

“네, 코넬 대학교요. 뉴욕 주라서 여기서 멀지 않아요.”

“와아, 축하해. 너 정말 대단하다. 내가 살짝 알아봤는데 그 대학교 명문이라던데.”

“오빠가 더 대단하죠. 메이저리그 투수잖아요. 오늘 너무 잘 던졌어요.”

성낙기는 장하연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국에 있을 땐 예쁜 동생 같은 이미지였는데 타국에서 만나니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지고 이성으로만 느껴졌다. 하긴, 나이 차이도 겨우 두 살인걸.

“너 정말 대관령 목장 물려받을 거야?”

“물려받아야죠. 전 동물을 좋아해요. 그런데 그건 나중 일이고요. 보통은 연구를 하는 학문이에요.”

“혼자 미국에서 힘들 텐데.”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어려서부터 아빠 일을 도와서 그런지 힘든 거에 익숙해요. 아이, 이런 얘기 그만하고 오빠 얘기 좀 해줘요. 메이저리그에 어떻게 왔는지, 같이 지내는 팀은 어떤지 등등이요.”

성낙기는 밤이 이슥하도록 장하연과 데이트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엔 놀이동산에 같이 가자는 약속을 했고 손가락을 걸어 다짐을 받은 뒤 장하연은 웃으며 갔다.

아주 밝고 성숙미가 풍기는 이지적인 외모의 장하연은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성낙기는 흥얼거리며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내일은 대타라도 나갈 수 있도록 마구 붕붕거려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

한국의 네티즌들은 성낙기가 장하연과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고단할 것이 분명한 mlb의 생활을 걱정했다. 그날의 6이닝 4실점에 안도하는가 하면, 기대에 못 비친다는 팬도 있었다.

-어쨌든 벌써 2승이다. 15승 찍는 거 아니야?

-아니지. 패는 없고 승리만 하면 20승도 넘는 거지.

-성낙기 선수, 통역도 없이 혼자 갔다는데 무지 외롭겠어요. 옆에 있으면 말벗 해줄 텐데.

-성낙기는 아줌마랑 안 맞음.

-아줌만지 아가씬지 어케 알음? 님아, 저랑 말벗 합시다.

-KBO 룰을 편법으로 이용해서 갔는데 저 정도로는 만족 못하겠다. 홈런을 두 개나 맞았어.

-상대가 뉴욕 메츠입니다. 올해 대권 노리는 팀이에요. 뭘 알고 얘기를 해야지. 엄청 선방한 거임.

-그나저나 6회에 155km ㅎㄷㄷ. 님들아 누가 설명 좀…….

-수술을 받고 나서 구속이 상승한 건 사실일 테고 아마… 수술이 아니었다면 본래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가 되었을 겁니다. 고교 땐 몸무게도 그렇고 근육 자체가 발달이 안 되었을 때니까 그때 구속으로 판단하면 안 되죠… 그건 그렇고, 님들아……? 반말 하시네.

-난 성낙기가 타자로도 재능 있다고 봐. 오타니만큼 할 거야.

-저거 아침은 잘 챙겨 먹나? 애가 왠지 정이 간단 말이야.

-호텔에서 조식 나옴. 누가 누굴 걱정해. ㅋㅋㅋ 저 연봉이면 햄버거 1억 개도 사먹지.

처음 방출로 풀리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때 비판적이던 팬들도 많이 돌아섰다. 별 기대 없이 바라보던 투수가 착착 승리를 챙기면 없던 애정도 생기는 법이다.

더구나 메이저리그 아닌가.

마이애미는 다음날 뉴욕 메츠의 잭 휠러에게 5안타 1득점으로 꽁꽁 묶고 마이애미의 5선발 케일럽 스미스는 5이닝 7실점으로 무너졌다.

2차전을 1:8로 내준 마이애미는 3차전에서 1선발인 호세 우레나의 8이닝 2실점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뉴욕 메츠의 선발 노아 신더가드에게 완봉을 당했다. 성낙기의 1차전 이후, 2경기 연속으로 부진한 타선을 향한 팬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휴, 나 좀 쓰라고 그렇게 붕붕거리고 다녀도 끄떡도 안 하네.”

성낙기는 레인 피터 감독의 무심함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사람이 행동을 하면 무슨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다른 건 신경 안 쓰고 경기만 바라보는 감독이라니.

셜리번 코치만 뭐라고 나불거렸는데 차라리 그게 낫다. 허봉호 감독도 처음엔 화를 내기도 했지만 성낙기의 스윙에 반응을 했었다.

레인 피터 감독은 싸이코 기질을 가진 냉혈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연쇄살인범 같은.

성낙기는 별의별 상상을 하며 마이애미로 돌아오면서 김아경이 알아봐 준 빌라 형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김아경은 LA에 볼일이 있다며 가더니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씻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낙기 씨, 저예요.”

“아, 어디세요?”

“아직 LA예요. 아마 뵙지 못하고 서울로 가게 될 것 같아요. 엊그제 경기는 잘 봤어요. 고생하셨어요. 늦었지만, 2승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하는 일이 정리가 되면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던지세요.”

“걱정 마세요. 욕먹지 않게 해드릴게요.”

“풋. 고마워요. 그럼, 그때 봐요.”

김아경은 몹시 바쁜가보다. 하긴, 사업이라는 게 다 그렇지. 그러고 보면 야구만 잘하면 되는 자신은 복이 있는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

마이애미의 시즌 성적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4월 15일 현재, 4승 8패 0.333의 승률로 동부지구 꼴찌를 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그 4승 중 2승은 성낙기가 거둔 성적이었다.

성낙기는 두 경기 ERA 3.60으로 선발투수 중 1선발인 호세 우레나 다음으로 좋은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오늘 경기는 3선발인 알칸타라가 뉴욕 메츠와 1,2위를 다투는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강자, 워싱턴 내셔널스 전에 투입될 예정이다.

성낙기는 타선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타로 내보내지 않는 피터 감독 때문에 애가 달아 죽을 지경이었다. 열나게 붕붕거려봐야 셜리번 코치만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마저도 미친 놈 보듯 하는 게 문제지만.

‘오늘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해야겠다.’

성낙기는 결심했다. 깝죽거리다가 다른 타자들에게 미움을 당할지라도 자신을 어필하기로. 그래서 혼자 배팅 연습을 하던 패턴을 버리고 경기 몇 시간 전, 다른 타자들 옆에 꼽사리를 껴서 타격 연습을 했다.

그것도 배터리 코치 오마르에게 사정해서 50구 정도만 치기로 약속하고 얻은 기회였다.

어차피 내일 선발이니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리그의 특성상, 투수도 타격 연습은 필요했다. 성낙기의 배트에 맞는 공들이 외야로 쭉쭉 뻗었다. 다른 타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뜰 만큼 공의 궤적이 이상적이다.

“쟤는 저렇게 열심히 연습 안 해도 되는데 이상하게 타격 욕심이 많네. 투타겸업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투수 치고 임팩트가 아주 좋은데?”

셜리번 코치의 말에 워마린 코치가 성낙기의 타격에 관심을 보였다.

“저럴 시간 있으면 공이라도 한 구 더 던지는 게 낫지.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부상이라도 당하면 끝이야.”

“그런데 말이야. 타율은 상당히 좋지 않아? 표본은 적지만 3할이 넘어.”

“표본이 적으니까 타율이 좋은 거지. 원래 시즌 초반엔 3할이 넘는 투수들도 많아.”

성낙기는 두 사람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배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20구 정도까지 외야로 안타성 타구를 날리던 성낙기는 점점 장타를 날리더니 이젠 두세 개에 하나 꼴로 펜스를 넘기고 있었다.

타자들이 신기한 듯 연습을 멈추고 타격을 구경했고, 성낙기는 20개 가까이를 담장 너머로 넘기고서야 타석에서 물러났다. 성낙기 딴으로는 감독 앞에서 붕붕거리기만 해서는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했던 배팅이었다.

피터 감독도 성낙기의 배팅을 보았고 배팅을 그칠 때까지 담담한 반응이었다. 불펜 앞에서도 성낙기는 몸이 덜 풀렸는지 배트를 돌렸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워싱턴의 투수는 엔니 로메로였다. 지난 시즌 13승 8패 ERA 3.43의 준수한 활약을 했던 워싱턴의 3선발이었다. 그에 비하면 샌디 알칸타라는 지난 시즌 8승 11패였고 ERA도 5.30에 불과했다.

로메로는 방어율이 말해주듯 1회 초를 삼자범퇴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공격적인 투구 스타일로 11개의 공으로 1회를 끝냈다. 워싱턴 더그아웃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그다지 기뻐하거나 좋아하는 표정도 아니다.

로메로가 던지는 95마일(153km)의, 공 끝이 지저분한 포심패스트볼과 외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 그리고 80마일 초반 대의 커브라면 특별할 것 없는 마이애미의 타선쯤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샌디 알칸타라는 2회말에 마운드에 서자마자 전력투구를 했고 96마일(154.5km)의 공을 뿌렸다. 너무 스피드에만 신경을 썼는지 공이 들쭉날쭉했고 침착하게 기다린 트레아 터너에게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레인 피터 감독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경기 중반이고 어려운 타자라면 볼넷도 생각해봄직 하지만 1회 선두타자 볼넷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팀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이기에 피터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다. 알칸타라는 다음 타자에게도 스리볼 원 스트라이크로 볼 카운트가 몰렸다.

‘워싱턴 타자들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

셜리번 투수 코치의 표정이 실망으로 변하고 있다. 알칸타라의 가장 큰 문제가 기복이 심하다는 것인데, 한 번 분위기를 타면 곧잘 던지다가도 오늘처럼 부담 가는 타선을 만나면 제구력에 문제가 생긴다.

아니나 다를까 2번 타자마저 볼넷으로 1루로 걸어 나갔고 노아웃에 1, 2루로 워싱턴 내셔널스로서는 가만히 앉아 밥상을 받는 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타자는 신인왕 출신의 브라이스 하퍼.

이 괴물은 지난 시즌 0.324의 타율과 37홈런 123타점을 기록하면서 내셔널리그 팀들의 기피 대상 1호로 떠올랐다. 투수 알칸타라는 브라이스가 배트를 들고 타석에 오자 한숨을 내쉬며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리얼무토가 타임을 걸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네 공 오늘 괜찮아. 조금 힘을 빼고 맞춰 잡자.”

끄덕끄덕.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배터 박스로 돌아오는 리얼무토의 가슴은 무거웠다. 이제 열 경기 좀 넘었는데 5홈런을 때리고 있는 무식한 타자다.

풍기는 포스 또한 남달라서 투수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한 타자가 브라이스 하퍼였다. 리얼무토의 마운드 방문에 안정이 좀 되었는지 알칸타라는 초구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2구는 몸 쪽으로 바짝 붙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브라이스 하퍼는 타자를 맞출 듯 몸 쪽으로 붙어오는 슬라이더가 휘어져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아, 잘 맞았습니다. 외야로 쭉쭉 뻗는 타구, 역시 브라이스 하퍼입니다. 몸 쪽 높게 형성된 슬라이더를 담장 너머로 넘겨 버립니다. 스리런 홈~ 런!”

“믿을 수 없는 타자죠. 올해도 내셔널리그 홈런 선두권을 유지할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이는 타자입니다. 브라이스 하퍼에게 밋밋한 슬라이더는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알칸타라 투수, 1회부터 흔들리는 모습이죠? 기본적으로 좋은 공을 가진 투수인데 종종 이렇게 쉬운 투수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맞습니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타선에 부담을 많이 느끼는 모습이에요.”

브라이스 하퍼는 홈런을 친 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관중석이 공이 떨어지자 그제야 천천히 1루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포수 마스크를 벗고 일어서 있던 리얼무토가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봤고 투수 알칸타라 역시 느리게 베이스를 도는 브라이스 하퍼를 신경질적으로 쳐다보았다.

브라이스 하퍼는 마이애미 선수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2루로 뛰는 도중 한 차례 점프하면서 공중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저런 개새끼가 있나.”

“what the fucker man!”

“fuck you up!”

마이애미의 더그아웃에서도 하퍼에 대한 욕설이 쏟아졌다. 브라이스 하퍼는 3루 쪽에 와서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기쁨을 표하고는 홈을 밟았다.

“너 뭐야. 그렇게 행동하니까 좋아?”

“뭐? 내가 뭘 어쨌다고.”

“건방진 놈, 홈런 하나 치니까 눈에 봬는 게 없어? 가만 안 두겠어.”

“흥, 네 맘대로 해 봐. 별걸 다 트집 잡고 지랄이야.”

리얼무토와 브라이스 하퍼가 홈에서 신경전을 벌였고 워싱턴에서 투수 코치가 나와 브라이스를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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