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69화 (69/188)

# 69

069화 투수냐 타자냐 2

“아니, 투수가 무슨 도루야. 한국에서 프로로 뛰었다는 애가 3루 도루를 해? 발목이라도 돌아가면 시즌 아웃인 거 모르나.”

셜리번 투수 코치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고,

“쟤 오늘 면담 좀 해야겠어. 저대로 두면 크게 사고 칠거야. 감독님, 주의를 주겠습니다.”

워마린 타격 코치도 같은 생각이었다.

“놔 둬, 원래 저런 스타일인가 보지.”

피터 감독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누구는 덕장이라고 했고 누구는 결정 장애가 있는 감독이라고도 했다.

성격은 아주 다르지만 성낙기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허봉호 감독과 닮은 면이 있었다.

어쨌든 경기는 계속되고 있었고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슬라이더 유인구를 하나 더 던진 스티븐 마츠는 결정구로 싱커를 던졌다.

따악.

가렛 쿠퍼가 친 공은 유격수 앞으로 바운드되며 굴러갔고 뉴욕 메츠의 월머 프로레스는 맨손으로 공을 잡아 홈으로 뿌렸다. 플라웨키가 성낙기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라인에 서 있다가 공을 받은 뒤, 태그아웃을 시도했다.

성낙기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가면서 왼손을 홈플레이트 쪽으로 내뻗었다가 플라웨키의 글러브가 오자 급히 왼손을 빼고 오른손으로 홈플레이트를 터치했다.

“세이프!!”

플라웨키가 펄쩍 뛰면서 태그가 빨랐다고 항의했지만 주심은 확실히 봤다며 자기 눈을 가리켰다. 게임 스코어는 졸지에 2:0으로 마이애미의 리드. 스티븐 마츠는 마지막 타자를 잡고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왁왁, 질러댔다.

***

경기 스코어 2:0인 상황에서 성낙기는 3회 말 수비에 들어갔다. 8번 타자 개빈 체키니부터였다. 본래 유격수 유틸리티 멤버였으나 이번 시즌 핫 코너를 맡고부터 3할에 근접한 타격을 선보이는 중이다. 포수 리얼무토는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따악.

내심 포심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던 개빈은 배트를 내는 순간, 잠시 멈칫 했다가 슬라이더 궤적을 따라 어퍼스윙을 했다. 툭, 맞은 공이 외야로 날아갔고 우익수가 공을 따라갔지만 공은 그라운드에 맞고 펜스를 살짝 넘어가 버렸다.

“성낙기 선수, 2루타를 허용합니다. 좋은 슬라이더였는데 타자가 잘 쳤죠?”

“노렸다기보다는 타이밍을 반 박자 늦추면서 따라갔어요. 힘이 좋은 타자입니다.”

해설자의 말대로 힘이 좋다. 멈칫 했던 타격 자세에서 저런 정도의 타구가 나온다는 건 제대로 맞으면 무조건 넘어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나온 9번 타자 스티븐 마츠는 2구로 던진 라이징패스트볼을 1루 방면으로 굴리는 데 성공했다.

‘라이징패스트볼을 번트 대다니.’

주자는 가볍게 3루로 들어갔고 스티븐 마츠는 1루에서 아웃, 뉴욕메츠의 작전대로 경기가 풀리고 있었다.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고 리얼무토는 투심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팡.

볼.

바깥쪽에 걸쳤다고 생각한 공에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2구로는 퀘이크 볼(4cm/5cm). 몸 쪽으로 들어갔는데 역시 주심은 미동도 없다.

1, 2회엔 스트라이크를 주던 코스였다. 3구는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았고 4구로 던진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에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아, 공을 놓치는 브라이언 앤더슨입니다.”

뉴욕메츠의 아메드가 친 공이 1루로 강하게 굴러갔고 브라이언의 글러브를 맞고 옆으로 흘렀다. 그사이에 3루 주자는 홈인. 스코어 2:1로 따라붙었다. 브라이언이 성낙기를 향해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성낙기도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했다.

‘미안한 건 알아서 다행이네… 그나저나 타자들이 약 먹었나, 내 공이 맞아나가고 있다.’

1회와 2회는 깔끔하게 넘겼기 때문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첫 경기처럼 경기를 끌고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3회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분명 게스히팅은 아닌 것 같고 잘 맞았다고 할 수도 없는 타구들인데 힘으로 이겨내고 있다.

“맞아나가는 거 같지?”

“그렇습니다. 투구 내용은 1, 2회와 다르지 않은데, 집중력이 달라졌어요.”

피터 감독도 셜리번도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성낙기가 던지는 공은 주로 포심패스트볼 40% 슬라이더 22% 체인지업 14% 투심패스트볼 9% 커브 7% 정도였고 간간이 포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과 퀘이크볼을 섞어 던지는 패턴이었다.

볼 배합으로만 보면 타자들이 헷갈릴 정도로 변화구의 종류도 많고 게스히팅이 가능할 만한 일정한 패턴도 없는 것 같다. 포심패스트볼의 구사율이야 다른 투수들도 마찬가지다.

“1, 2회에 비해 히팅 포인트가 뒤에서 형성되고 있어요. 저건, 변화구에 타이밍을 맞추는 걸로 보이네요.”

타격 코치 워마린이 달라진 뉴욕 메츠의 타격을 설명했다.

“변화구? 방금 때린 공은 포심패스트볼이었어.”

“이봐, 셜리번. 변화구를 노린다고 해서 포심패스트볼을 배팅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겠지? 포심패스트볼이 강속구라면 그럴 수 없겠지만, 지금 성낙기의 포심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90마일 내외야. 신더가드나 맷 하비 같은 투수들에 비하면 느린공이지. 풀 스윙 대신 짧은 스윙 궤적으로 늦은 타이밍을 극복하고 있다고 봐야 해.”

“워마린 말이 맞아. 볼 배합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어.”

따악.

피터 감독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마이클 콘포토의 타구가 외야로 뻗고 있었다.

이번엔 몸 쪽 체인지업이 맞아나갔는데,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할 만한 잘 맞은 타구가 외야로 날아갔다. 성낙기는 평소의 밝은 표정과 달리 마운드 위에서 이마를 찌푸렸다.

리얼무토 역시 홈플레이트에서 일어나 마스크를 벗고 홈런 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KBO에서 좀체 맞지 않았던 (80/100)의 스탯을 찍고 있는 체인지업이 홈런으로 연결되자 성낙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진백을 묻혔다.

‘헐, 갑자기 뭐야. 노렸던 것처럼 쳐낸다. 버릇이라도 읽힌 것인가?’

경기는 3회 말 뉴욕메츠의 2루타와 번트, 그리고 1루수 실책과 홈런을 묶어 2:3으로 역전되었다. 셜리번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걸어 나갔고 리얼무토도 걸음을 옮겼다.

“변화구를 노리고 짧게 들어오는 것 같다. 첫 경기를 연구한 게 틀림없어. 볼 배합 패턴을 정 반대로 가져가도록 해.”

“묘한데요. 변화구가 한두 개도 아닌데 그걸 맞춰낸다는 게 말이죠.”

“패턴을 읽으면 타이밍을 잡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못 쳐낼 공은 없지. 성낙기, 아직 초반이야. 힘을 내.”

리얼무토와 의견을 주고받던 셜리번 투수 코치는 성낙기를 다독이고는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셜리번 코치의 말이 맞아, 안타를 다시 내줄 때까지는 속구 위주로 던질게.”

“좋아, 그렇게 해. 인간은 언제든 시련을 겪지만 성공한 자들은 늘 다시 일어나지.”

성낙기의 말에 리얼무토가 또 지랄 같은 말을 하고 돌아섰다. 그때부터 성낙기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버리고 체력 소모가 많은 퀘이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투심패스트볼의 사용을 늘렸고 거기에 간간이 커브를 섞었다.

***

경기는 어느덧 6회였다. 스티븐 마츠는 5회에 1점을 더 허용하고 6회엔 올라오지 않았다. 마이애미는 6회에 바뀐 투수 시월드를 상대로 리얼무토가 투런 홈런을 터뜨렸다. 그라운드를 돌아 더그아웃에서 축하를 받고 나서 성낙기에게 말을 걸었다.

“기회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 그걸 잡느냐 못 잡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래, 네 똥이 굵다.”

성낙기를 한국말로 되받으면서 리얼무토가 잘을 잘 때 마취를 시킨 다음, 반짇고리로 주댕이를 꼬매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경기 스코어 5:3에서 성낙기는 6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있었다. 3회 이후론 잘 던져서 5회까지 7안타 3실점의 괜찮은 결과였다. 6회 선두타자 팀 티보에게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통타당하기 전까지는.

좀체 맞지 않는 코스였는데 팀 티보는 긴 팔로 가볍게 담장을 넘겨 버렸다.

‘첫 타석부터 공을 때려내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어떻게 된 게 애들은 걸리면 홈런이냐.’

성낙기는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담장을 넘기는 메이저리거들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투아웃 이후 맞이한 타자에게 세 개 연달아 96마일(155km)의 전광석화(電光石火)를 던져 삼진을 잡고는 마운드를 내려왔다.

6회 말에 추가 홈런을 허용했으나 6이닝 4실점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투구였다.

하지만, 성낙기에게 6회의 홈런은 뼈아팠고 5:4의 살얼음 리드에서 마운드를 내려오는 얼굴표정은 시무룩했다.

[체력이 3 남았습니다.]

‘니미… 말 안 해도 그만 던질라 했다.’

오늘 성낙기의 타격은 3타수 1안타, 거기에 1볼넷이 하나 있었다.

“감독님, 오늘은 비밀을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셜리번 투수 코치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피터 감독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안다.

바로, 방금 던진 투구에 관해서이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그랬다. 경기 중반에 느닷없이 150km대의 공을 던져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러더니 오늘도 140km대의 공만 던지다가 마지막 6회에 어마어마한 스피드의 공을 던졌다.

가만 생각하면 그렇게 던지라고 해도 못 던질 것이다. 155km를 던질 수 있는 투수가 140km 중반의 공만 6회 투아웃까지 던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가끔 힘 조절에 실패해서 150km 정도의 공이 서너 개 정도는 나와야 정상 아닌가?

기계도 아니고 저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이런 생각도 해봄직한 데 셜리번은 조금 다른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의문은 다른 게 아니라,

‘저놈이 구속을 속이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런데 왜 처음부터 그렇게 안 던지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처음부터 전력투구 했다면 4점이나 내주진 않았을 거다.’

이런, 조금은 단순한 의문이다.

“비밀? 그런 게 풀어서 뭐하게. 공만 잘 던지고 잘 치면 그걸로 족해. 괜한 탐정 놀이 하려고 하지 마.”

레인 피터 감독의 대답은 간단했다. 본래 성격 자체가 쓸데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 역시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 선수가 해결해 줄 일이지 누군가가 캐낼 일이 아니라는 것.

7회엔 마이애미도 불펜을 투입했다.

지난 시즌 11홀드에 ERA 0.436이었던 팬 파일러였다.

98마일(157.7cm)의 최고 구속에 성낙기와 같은 24세의 나이, 거기에 208cm의 커다란 키로 입단 당시 화제를 모았는데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인 데다 볼넷이 많아서 다듬을 곳이 많은 선수다. 파이어볼러(Fireballer)여서 그런지 60구 이후로는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단점도 있다.

팡.

155km.

볼.

“음, 개빈 체키니 선수 섣불리 배트를 내지 않습니다. 찬스를 만들려면 1루를 밟아야 하니까요.”

“팬 파일러 투수, 스프링캠프에서 제구를 많이 가다듬었다는데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군요.”

팡.

스트라이크.

한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놓친 체키니는 조금 후회했다. 워낙 제구가 안 좋은 투수라서 볼넷을 의식한 결과 좋은 공을 놓쳤다.

하지만 팬 파일러는 개빈 체키니의 후회가 무색하게 연속으로 높은 공 세 개를 던졌고 개빈 체키니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1루에 나갔다.

‘또 시작인가?’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하던 오스틴 단장은 답답함에 입맛을 다셨다.

저 큰 키에 좌완 파이어볼러인데 신은 다 주고도 딱 한 가지, 제구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했다.

리얼무토가 마운드로 올라갔고 몇 마디 말을 들은 팬 파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구로 슬라이더를 던져. 마법의 이닝을 만들어 보자.”

리얼무토의 말은 대충 이랬는데 타자가 바깥쪽으로 흐르는 초구를 건드렸고 2루수가 잡아 2루 포스아웃을 시킨 뒤, 유격수가 1루로 던져 병살타가 완성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바로 그 순간, 뉴욕 메츠의 관중석은 탄식이 흘렀다. 맥없이 찬스를 잃은 뉴욕 메츠의 타자들은, 8회에도 좌완 투수 딜런 피터스를 공략하지 못했고 9회에 올라온 마이애미의 마무리 야를린 가르시아는 세이브를 챙겼다.

5:4로 마이애미의 승리였고 우여곡절 끝에 승리투수는 성낙기였다. ‘기회는 늘 곁에 있는 거니까요’ 리얼무토의 인터뷰를 들으면서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는데 관중석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었던 소리.

“낙기 오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