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068화 투수냐 타자냐 1
한국의 bbs는 일찌감치 마이애미 구단의 경기 중계권을 사들여 성낙기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이애미 구단 자체가 동부지구 하위권이고 성낙기에 대한 mlb의 기대치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기에 계약은 쉽게 성사되었다.
“오, 성낙기 투수 선두 타자 안타를 내주고도 나머지 타자를 삼진과 범타로 잡아냅니다. 메이저리그 첫 경기의 승리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군요.”
“그렇습니다. 저 선수가 2군에서 뛸 때부터 우리가 중계를 해왔었는데요. 그때에 비하면 기적처럼 달라졌어요. 120km대 후반이었나요? 하여튼 그랬던 선수가 지금은 메이저리그에서 동부지구 강팀인 뉴욕 메츠를 상대로 선전하고 있다는 게 참… 말이 나오다가 들어갈 정도입니다.”
“장종운 해설자께서도 놀라는데 팬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렇죠. 팬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성낙기 약 먹었냐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절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성낙기는 고집이 세고 엉뚱해서 그렇지 착한 선수입니다. 약 같은 거 할 선수가 아니죠. 이미 메디컬테스트도 통과했지 않습니까? 요즘은 약물검사 철저하거든요.”
“아, 네… WBC에서 타격 코치도 하셨기 때문에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60초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유시진 캐스터는 광고 시간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니, 잘나가다가 갑자기 약물 얘기는 뭐람? 잘못 들으면 거꾸로 쉴드 쳐주는 느낌이어서 말하지 않으니만 못하다.
“저기, 해설자님 약물 얘기는 좀 나간 면이 있습니다.”
“하아, 그런가요? 이참에 아주 쐐기를 박으려고 일부러 그랬어요. 걱정 마세요.”
광고 시간이 끝나고 유시진 캐스터와 장종운 해설자는 아무 일 없는 말끔한 얼굴로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그 시각, 성낙기는 뉴욕의 시티필드 더그아웃 앞에서 배트를 붕붕 돌리고 있었다. 그냥 배트만 돌리는 게 아니라 가상의 공 구질을 상상하면서 휘두르는, 이미지 트레이닝과 스윙 연습을 가미한 배트 컨트롤이었다.
레인 피터 감독과 셜리번 투수 코치, 그리고 워마린 타격 코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성은 좋지만… 지금 투아웃에 6번 타자 시에라 차례인데, 9번 타자가 저러고 있네.”
워마린 타격 코치가 혼잣말하듯 성낙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감이야. 더그아웃 앞에서 저러고 있으니까 경기에 집중이 안 돼.”
셜리번 투수 코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성낙기와 타자로 나선 시에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채드 왈라치가 나타나서 성낙기가 휘두르는 배트를 잡아당기면서 걸음을 옮겼고 성낙기는 구시렁거리면서 배트가 가는 곳까지 따라갔다. 불펜으로 들어간 둘을 보고 셋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스티븐 마츠는 6번 타자를 잡아냈고
성낙기도 2회엔 삼자범퇴로 뉴욕 메츠의 타선을 막아냈다.
그리고 시작된 3회, 7번 타자 카스트로가 타석에 들어섰다.
스티븐 마츠는 여전히 주 무기인 싱커를 연속으로 던졌고 볼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던진 커브가 아래로 꺾이지 않고 어정쩡한 높이로 들어왔다. 그냥 두면 바깥쪽 높은 볼인데 카스트로는 냅다 배트를 휘둘렀다.
“오늘 처음으로 안타를 쳐내는 마이애미입니다. 스티븐 마츠의 커브가 좀 높았는데요. 카스트로가 오늘 경기에서 마이애미 최초로 1루 베이스를 밟네요.”
“높기도 했고 스피드는 82마일에 회전이 부족했습니다. 명백한 실투입니다. 모든 변화구가 그렇지만 특히 커브는 회전이 먹히지 않으면 아주 쉬운 먹잇감이 됩니다. 방금 보신 대로 말이죠.”
“오늘의 첫 안타에 마이애미 관중들도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중견수로 뛰는 8번 타자 메이빈은 위기감을 느낀 스티븐 마츠의 전력투구에 파울을 두 개나 치며 버텼지만 결국 삼진으로 물러났다.
뭔가를 기대했던 관중들은 차분하게 성낙기의 타석을 기다렸다. 여기서 차분하다는 말은 기대를 버렸다는 뜻. 어차피 투수의 타석은 보나 마나일 것이다.
그렇게 투아웃이 되고 나면 스티븐 마츠의 구위나 제구로 봤을 때 아웃 하나 없이 연속 안타로 점수를 내기는 희박해 보였다. 물론, 홈런이 나올 확률은 더 희박할 거고.
‘휴우, 차례 기다리기 힘들다. 번호표 받고 차례 기다리는 햄버거 가게나 다름없어…….’
성낙기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다 말고 급히 멈췄다. 가만 보니 팀의 포수인 리얼무토의 말투와 어딘가 닮은 것 같다. 성낙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스티븐 마츠는 초구부터 주 무기인 싱커를 던졌다.
팡.
볼.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에서 몸 쪽으로 가라앉는 스티븐 마츠의 공은 타자 앞까지 포심패스트볼과 궤적이 비슷해서 배트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한데, 타석에 선 성낙기는 그냥 가만있었다.
‘뭐야, 볼넷이라도 고르겠다는 건가?’
스티븐 마츠는 전력으로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따악.
파울.
마지막에 볼 끝이 살아오는 바람에 배트에 맞은 공은 3루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스티븐 마츠가 의외라는 듯 눈에 힘을 줬다.
뉴욕메츠의 포수 케빈 플라웨키 역시 내심 놀랐다. 보기보다 타격이 날카롭다. 방금 휘두른 배팅은 스티븐 마츠의 96(154km)마일의 공을 걷어낸 타격이었다.
‘역시 변화구로 가야 해.’
포수인 플라웨키는 한국이나 일본의 투수들이 고교 때까지 타격을 하면서 팀의 중심 타선을 맡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잊었는데 성낙기의 타격을 보고는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 한국 투수에게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고교 때는 대부분 직구 승부가 많아서 곧은 공은 곧잘 때려낸다는 것도. 사인을 받은 스티븐 마츠가 다시 싱커를 던졌다. 이번엔 외곽을 타고 휘어지면서 포수의 한가운데와 바깥쪽의 중간지점에 포인트를 맞춘 제구였다.
공이 포수의 바깥쪽에 꽂히면, 외곽에서부터 휘어져 들어가는 싱커의 특성상 볼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를 노린 싱커였고 이건 다분히 초구의 싱커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성낙기의 타격 스타일 때문이었다.
타자로 나선 투수를 상대로 볼 카운트를 불리하게 가져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적어도 리그에서 15승 내외를 목표로 하는 수준의 투수이니까.
따악.
그러나 성낙기는 플라웨키와 스티븐 마츠의 예상을 깨고 휘어지면서 떨어지는 싱커를 강하게 걷어 올렸다. 배트에 맞는 공은 성낙기의 생각보다 높은 궤적을 그리며 외야로 날아갔다.
“오우!! 성낙기 투수가 친 공이 외야로 날아갑니다. 우익수 콘포토 전력 질주로 달립니다만, 원 바운드로 펜스에 맞는 타구! 1루 주자 카스트로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립니다. 콘포토의 송구을 받은 2루수 도미닉 스미스가 홈으로 공을 던집니다. 공을 받아 태그아웃을 시도하는 플라웨키, 그러나 카스트로 빠릅니다. 세이프! 세이프을 선언하는 주심입니다. 성낙기의 2루타!”
“스티븐 마츠 투수, 큰 걸 허용했네요. 상대팀 투수에게 말이죠.”
“전혀 예상 밖의 타격이 나왔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할 만큼요. 제대로 들어간 싱커 아니었나요?”
“잘 떨어진 싱커였습니다. 외곽에서 휘어오는 곡선도 괜찮았죠. 타격 재능이 있는 투수로 보이는데요. 첫 선발 등판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했었군요.”
“스티븐 마츠 당황한 표정입니다. 92마일(148km)의 싱커가 맞아 나갔거든요.”
성낙기는 2루에 서서 환호하는 더그아웃의 선수들에게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잘 꺾여 들어온 싱커였으나, 타이밍을 잘 맞췄고 강하게 걷어 올렸다.
KBO에서의 경험으로는 이런 타격이면 홈런이 되어야 정상이었다. 힘도 충분했고 타이밍도 좋았다. 하지만, 스티븐 마츠가 던진 3구째의 싱커는 초구의 싱커보다 횡으로는 더 휘어진 반면, 가라앉는 각도는 덜했다.
덜 가라앉는 대신 마지막 볼 끝의 힘은 살아 있었다.
같은 싱커라도 회전과 각이 조금 달라졌다는 결론인데, 어쨌든 그 때문에 공의 발사각이 높아졌고 간신히 우익수 키를 넘겼다.
아마도 타자가 성낙기가 아니라 4번 타자 브라이언이었다면 깊은 수비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워닝트랙(Warning track)에서 잡혔을 타구였다.
“운이 좋았다.”
성낙기가 2루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혼잣말을 했다. 변화구의 미묘한 차이에서 성낙기는 메이저리그의 수준을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은 비록 2루타로 타점을 뽑아냈지만 운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
원아웃 2루에 성낙기가 2루에 나간 마이애미의 찬스는 계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1번 타자 가렛 쿠퍼로 연결되는 상위타선이다.
198cm의 가렛 쿠퍼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발이 빠른 편인 데다 배트 컨트롤이 좋은 선수. 한 때 1루수 루키였으나 3루수로 전향한 케이스다.
수비가 약간 불안하지만 타격 재능은 좋아서 피터 감독이 주전으로 낙점했다. 작년 후반기에 주전 3루수의 부상으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케 버텨냈다.
슈육.
딱.
파울.
초구로 던진 몸 쪽 싱커에 반응했지만, 공은 1루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제구가 안됐으면 좋은 안타가 되었을 법한 타격 타이밍이었다. 스티븐 마츠가 모자를 벗고 흐르는 땀을 옷소매 끝으로 닦았다.
1회엔 깔끔하게 삼진으로 잡았지만 신경 쓰이는 타자다. 그나마 2루 주자로 투수가 나가 있으니 안타를 맞아도 홈 승부는 하지 못할 것이다.
2구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바깥쪽으로 빠졌고 플라웨키는 3구로 커브 사인을 냈다. 스티븐 마츠는 바깥쪽 낮은 코스를 타깃으로 잡고 와인드업을 했다.
“어어……?”
“뛴다!”
“저거 뭐야, 3루로 던져!”
“투수가 도루를 하네, 와아.”
뉴욕 메츠 팬들은 스티븐 마츠의 와인드업 때 2루 주자인 성낙기가 3루로 뛰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투수가 안타를 치고 나가서 도루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선은 도루를 하려면 슬라이딩을 해야 하고 다리 근육에 무리가 오는 건 덤이다.
공을 던지는 게 중요하지, 도루를 해서 득점에 도움을 주려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멍청한 짓에 가깝다.
만약, 부상이라도 당하면 시즌 아웃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팀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짓을 마이애미의 투수가 하고 있다.
“헉!”
플라웨키는 스티븐 마츠가 던진 커브를 기다리면서 성낙기가 3루로 뛰는 것을 보았다.
내심, 저게 미쳤나 생각할 때 커브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다 떨어졌고 가렛 쿠퍼는 뒤늦게 커브인 걸 알아채고 배트를 낮추며 헛스윙 했다.
3루로 공을 던지려는 플라웨키에게는 작은 방해가 된 셈이었는데 공을 던지려고 일어섰을 때, 플라웨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웃 타이밍이 아니다.
아무리 커브볼에 도루를 감행했더라도, 투수로 뛰는 선수의 능력으로 3루 도루는 죽으려고 환장한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플라웨키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시즌 0.375의 준수한 도루 저지율을 기록한 포수였다.
비록 커브가 들어왔다 해도 기본적인 송구 동작의 빠르기는 mlb 톱 급이며 송구 또한 정확한 편이었다.
슈욱!
퍽.
3루수 개빈 체키니가 공을 받음과 동시에 자연 태그를 시도할 정도로 공은 베이스 앞쪽으로 송구되었지만, 성낙기의 발은 이미 베이스에 닿아 있었다.
“세이프!”
3루심의 팔이 좌우로 넓게 펴졌고 관중들은 환호했다. 마이애미 팬들은 손 휘파람을 마구 불어댔다. 이런 퍼포먼스는 1년에 한두 번 구경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마이애미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