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066화 마이애미 말린스의 선발투수 4
mlb는 확실히 달랐다. 성낙기는 호텔 방에 누워 오늘 경기를 곱씹어 보았다.
성낙기가 타자로 나섰을 때, 상대 투수의 공은 생각보다 까다로웠고 3루와 유격수 사이로 바운드 된 코스가 좋았을 뿐, 제대로 맞은 타구가 아니었다.
상대 4선발인데도 포심패스트볼이 무브먼트가 있어서 궤적을 제대로 읽어내지 않으면 빗맞기 십상이다.
게다가 성낙기가 투수로서 잡아낸 삼진은 겨우 5개뿐, 나머지는 안타가 되어도 할 말이 없는 타구를 야수들이 막은 경우도 여럿이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는 생각,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리빌딩이 한창인 약팀인데도 그 정도였다.
하물며 워싱턴 내셔널스나 뉴욕 메츠 같은 팀은 어떨까, 생각하니 조금은 아찔했다. 드랙실바와 헤이드 존이 mlb의 레전드였지만 성낙기는 겨우 그들의 80% 수준일 뿐이다.
다만, 라이징패스트볼이나 퀘이크볼 그리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생소하고 특별한 구종으로 버텨왔다.
KBO에서도, WBC에서도 그 구종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뭐 해? 자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벨소리가 이어진다. 문을 열어보니 레인 피터 감독과 웨인 셜리번 투수 코치다.
가만, 오늘 고생했다고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나? 오자마자 탁자 앞 의자를 차지하고 앉는 두 사람, 성낙기도 그 앞에 앉았다.
“오늘 수고했네. 아픈 곳은 없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내일 던지라 해도 던지겠는걸요.”
“그래? 좋아. 투수에겐 팔 건강이 제일이지.”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하하, 오면 안 되나?”
“천만에요. 워낙 어려운 분들이 두 분이나 오시니 왠지 긴장되는걸요.”
“좋아, 짧게 말하고 가지. 그동안 아시아 쪽 투수들을 많이 써 봤지. 특히 일본이나 대만 쪽 투수들 말이야. 거긴 5일 휴식 후에 등판한다고 알고 있네. 하지만 여긴 4일 휴식 후 등판이야. 아시아 투수들의 피지컬이 약한 건지 4일 로테이션으로 1년 정도 던지고 나면 팔이 고장 나더군.”
“그렇습니까.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자네에 한해서만은 대략 100구가 넘어가면 마운드에서 내리겠네. 상황에 따라 더 빨리 내릴 수도 있고… 내 결정을 원망하지는 말라는 말일세. 다행히 우리 팀 불펜은 괜찮은 편이야. 5선발이 애매해서 탈이긴 하지.”
“100구요?”
“그래. 설령 완봉을 앞두고 있더라도 그렇게 할 거야. 내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니 그대로 따라주게. 만약, 그게 싫다면 공격적으로 투구 해. 오늘처럼 말이야.”
“…알겠습니다.”
현역으로 뛸 때 어깨와 팔꿈치 수술을 두 번이나 했던 피터 감독은 누구보다 투수의 팔을 아끼는 감독이었고 시범 경기, 아니, WBC와 KBO의 동영상을 보면서 마이애미의 누구보다 성낙기에 대해 잘 알았다.
그가 본 성낙기는 공이 갈수록 빨라지는 투수였고 상당한 재능을 타고난 투수이자 타자였고 마이애미에서 감독으로 있을 동안 다쳐서는 안 되는 선수였다.
오늘도 보았듯 95(153km)마일을 던지는 투수이면서 KBO에서부터 그래왔듯 공을 더 빨라질 가능성이 있는 투수였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약체인 마이애미 투수진의 에이스로 커나갈 재목이다. 피터 감독은 할 말을 마치고 성낙기의 방을 나섰다.
“말귀를 알아들으니 다행이야. KBO에 다녀온 스카우트들 말로는 성격이 안 좋다던데, 듣던 것과는 다르군. 불만이 있으면 자꾸 어슬렁거리면서 소리나 지르고 다닌다던데… 지금 보니 순둥이야.”
“처음이라 순둥이인 척하는 거겠죠. 리포트에 의하면 약간 또라이 기질이 있답니다. 성격도 지랄 같고요. 그게 어디 가겠어요?”
“뒤탈이 없도록 오늘 미리 다짐을 받은 이유가 그거야. 어쨌든 던지는 거 봤지? 나이도 젊고 마운드에서 아주 강심장이야. 홈런 맞고도 전혀 흔들리는 기색도 없고.”
“흠, 흥미로운 캐릭터군요. 제가 잘 살펴보겠습니다.”
***
그날 밤, 필라델피아의 소네스타 호텔에 숙소를 마련한 필리스 선수단의 감독과 코치들은 룸에 모여 낮에 있었던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게이브 캐틀러 감독과 타격 코치 로딕, 투수 코치 베이틀만은 노트북 화면에 나오는 영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영상 속에는 성낙기가 공을 던지는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첫 경기에서 천적처럼 나타난 투수이기에 철저히 연구해 두지 않으면 또다시 당할 확률이 높다.
사실, 요주의 선수들의 영상을 파악하는 일은 늘 있어왔던 일이므로 특별하지는 않다.
다만, 오늘은 프런트의 전력 분석 팀에 맡기지 않고 팀의 핵심이랄 수 있는 3인방이 머리를 맞댄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점이 다르다.
“바로 이 볼이야. 여기를 잘 봐. 일단 타석 앞에서 살짝 솟았다가 다시 아래로 꺾이지? 그러고는 다시 솟아오른단 말이야. 맞지?”
게이브 캐틀러 감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격 코치 로딕은 공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운지 방금 그 장면을 다시 느리게 재생시켰다.
“이럴 수가!”
공의 궤적을 확인한 로딕이 낮게 외쳤고 투수 코치 베이틀만은 얼어붙은 듯 말이 없었다. 그들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화면을 여러 번 재생시켰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베이틀만이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3번의 공의 변화가 4피트(1.2m)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이제야 바로 보았군. 정확해. 아주 짧은 거리에서 중력과 상식을 무시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
“백 분의 일 초까지 잡아내는 장비가 아니고는 알아내기 힘든 변화입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예요.”
로딕 타격 코치가 화면을 바라보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로날드 스카우트의 분석이 아니었다면 나도 몰랐을 거야. 짧은 순간에 3번의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변화가 크지는 않아. 굳이 예측을 하자면 4, 5cm 정도일 거야. 하지만, 생각해 봐. 타자의 배팅 포인트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정타를 때려내는 건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
“듣고 보니 심각합니다. 포심패스트볼과 다름없어 보이는데… 휴… 배트와 공이라는 게 1cm, 2cm 차이만 나도 안타와 아웃이 결정되는데 이 정도의 변화라면 노리고 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공인구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요. 어떻게 던져야 실밥에 이런 공기저항이 생기는지 모르겠군요.”
“공인구는 지난 시즌에도 지지난 시즌에도 썼던 그 제품이야. 이상이 있을 수가 없어. 하물며 다른 투수들은 이런 비슷한 궤적조차 만들어내지 못했지.”
“공론화 해볼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구단 이미지도 있는데, 여기저기 떠벌려서 뭐하게? 우리가 알았으니 어차피 다른 팀도 알게 되어 있어. 아무튼 이건 프런트에 맡기는 게 좋아. 이상한 투수가 하나 나타났어. 이건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구종이야.”
“공은 느리지만 라이징패스트볼도 독보적이던데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군요.”
“야구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구종도 끊임없이 생겨났지. 하지만, 타자들은 적응했어. 이 구종 역시 극복이 가능할 거라고 믿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게이브 캐틀러 감독은 커다란 산을 마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성낙기는 불펜 투구 중이었다. 그와 짝을 이룬 포수는 채드 왈라치. 191cm에 105kg의 거구에 성격이 밝고 낙천적이지만 가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삐지기도 잘하고 철도 덜 든 느낌이 있다.
벌써 그것만으로도 성낙기와는 마음이 잘 통한다. 다년간의 포수 백업으로 볼 배합과 프레이밍 등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타격이 약하다.
타고난 힘은 좋은데 특유의 어퍼 스윙 때문인지 모 아니면 도, 식의 타격이 많다. 걸리면 넘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스윙 아웃이나 플라이 볼이 대부분이다.
“오, 공이 더 빨라졌는데? 어떻게 된 거야? 혹시 약물을 복용한 건 아니겠지.”
채드 왈라치가 불펜에서 공을 받으며 놀란다. 메이저리그 첫 경기 후에 강속구의 레벨이 2나 올랐다. 즉,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는 146km가 최고 구속이었는데 이제 148km까지 나오니 엄청난 변화다.
그렇다 해도 155km쯤은 우습게 던지는 각 팀의 1, 2 선발이나 불펜 투수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성낙기의 살아 있는 볼 끝을 생각하면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섰다고 봐야겠지.
지금 놀라는 채드 왈라치의 표정이 그 증거다.
“왈라치가 그렇게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해 주지. 왜냐하면 넌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실은 나 오늘 아침에 비타민 먹고 나왔어.”
“내가 약을 절대 먹지 않았을 거라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약을 먹었으면 타율이 1할 8푼에 머물 리가 없다고 말이야.”
말을 잘못 했나? 슬슬 삐질 조짐을 보인다. 백짓장 같은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걸 보면 틀림없다.
“아니야, 오해 하지 마. 넌 지금 타격 슬럼프야. 이제 바닥이니까 올라갈 일만 남은 거지. 안 그래?”
“…네 말이 맞아. 시범 경기부터 슬럼프가 길어지고 있지만 이번 시즌은 반드시 2할 대 중반으로 올려놓고 말 거야.”
목표도 참 소박하다. 2할로 올라가는 게 목표라니. 꿈은 크고 봐야 하는데 말이지. 성낙기는 왈라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올렸다. 채드 왈라치가 환하게 웃는다. 성낙기는 포심패스트볼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구종을 던졌다.
“와아, 어떻게 슬라이더가 저런 궤적이 나오냐. 전보다 각이 한결 좋아진 것 같은데?”
“커브는 어떻고. 아주 쑥 꺼지는 게 땅 속으로 파고들어가게 생겼어.”
성낙기의 공을 감상하던 선수들이 한마디씩 늘어놓는다. 시범 경기나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공보다 훨씬 빠르고 변화구의 각이 예리하다. 거기에 제구력도 거의 포수 미트 근처에서 공이 놀 만큼 수준이 높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피터 감독과 셜리번 투수 코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메이저리그에 와서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에 저렇게 발전한 선수가 있었나, 떠올려 봤지만 없다.
그것뿐이면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작 자신들이 가르친 일도 없는데 스스로 좋아지고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확실히 시범 경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경기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어. 공은 더 무거워졌고 변화구의 꺾임도 심해졌어. 이봐, 셜리번 어떻게 저런 퍼포먼스가 가능한 거지?”
“지금까지 저런 선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에릭 가니에나 앤디 페티드… 아, 아닙니다. 워낙 페이스가 좋아서 뭐라 할 말이 없군요.”
“…그런 말은 삼가는 게 좋아. 어쨌든 마이애미 투수야. 이미 메디컬테스트도 받은 마당에 그런 생각은 구단의 검증을 무시하는 거나 같아.”
“제가 실언을… 맞습니다. 프런트의 철저함은 알아줄 만하지요. KBO에서부터 스피드가 계속 좋아지는 게 놀라운 일이라서… 하지만 이제 겨우 24세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점을 찍겠지만요.”
“아니야, 나이가 들어도 공이 빨라지는 친구들도 있어. 하여튼 매우 흥미로운 친구야. 아무래도 프런트에서 간만에 물건을 건진 것 같아.”
피터 감독과 셜리번 코치가 생각의 차이로 얼굴을 붉힐 뻔할 정도로 성낙기의 공은 대단한 수준이었고 성낙기 스스로도 스피드의 증가에 따라 달라진 변화구의 낙폭에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성낙기의 두 번째 등판일이 밝았다.
마이애미는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2승 1패로 선방했지만, 이어진 뉴욕메츠와의 3연전 중 2패를 떠안은 상태에서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나서게 되었다.
시즌 성적 2승 6패의 처참한 성적에 팀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는 상황이어서 투수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