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065화 마이애미 말린스의 선발투수 3
“아, 잭 콜먼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은 오늘도 무척 좁군요. 심판의 재량을 인정하는 것도 경기의 한 부분입니다만, 신인 투수들은 적응이 어렵죠. 성낙기 투수가 로진백을 만지는데요. 잭 콜먼 심판이 주심을 맡는 경기는 대개 타격전이 되기 십상입니다.”
“mlb에서 가장 까다로운 주심 중 한 사람입니다. 홈플레이트를 걸치기만 하면 스트라이크를 주는 주심이 있는 반면, 확실한 스트라이크가 아니면 잡아주지 않는 주심도 있습니다. 잭 콜먼은 후자라고 봐야겠죠. 주심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경기를 운용할 줄 알아야 진정한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이죠.”
중계진의 말처럼 잭 콜먼의 손은 초구 스윙을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성낙기는 생각했다. 여느 경기처럼 스트라이크에 가까운 공은 잭 콜먼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세자르 에르난데스 역시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아는 게 분명하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에 아예 몸이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틀림이 없다.
‘오늘 경기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최대한 프레이밍을 해보겠지만, 존(zone)이 좁더라도 릴리스 포인트를 잃지 마.’
경기 전 리얼무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런 거였구나. 성낙기는 또다시 슬라이더를 던지라는 리얼무토의 사인에 고개를 젓고 라이징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승부밖에 답이 없다.
슈우욱!
틱.
몸 쪽 라이징패스트볼이 배트에 맞고 뒤쪽으로 솟아 지정석으로 날아갔다. 금발의 여자 관중이 글러브로 받아내고는 웃으면서 팔을 높이 쳐들었다.
스리 투 풀 카운트에서 성낙기는 퀘이크볼을 던졌다. 타자 앞에서 위로 치솟는 듯하다가 아래로 꺼지는 짧은 무브먼트를 보이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살아 오르는 볼.
비록 무브먼트의 편차가 (4cm/5cm)에 불과하지만 타자가 느끼는 공의 궤적은 싱킹패스트볼이나 투심패스트볼과는 확연히 달랐다.
불펜에서 연습 구를 던질 때 포심패스트볼의 변종 정도로 알았던 리얼무토는 전력을 다한 퀘이크볼의 무브먼트에 순간 당황한 나머지, 공을 놓칠 뻔했다.
파앙.
“스트라이크.”
확실한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는 공에 잭 콜먼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세자르 에르난데스는 홈플레이트와 포수 미트를 번갈아 보고는 침을 퉤 뱉고는 물러났다.
다음 타자 로만 퀸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면서 입맛에 맞는 공을 노리려는 생각을 갖고 타석에 들어섰다.
파앙,
“스트라이크.”
슈욱.
딱.
파울.
전광석화(電光石火)-153km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성낙기는 초반부터 전광석화까지 던져가면서 무조건 정면 승부했다.
주심의 성향에 맞춰 확실한 스트라이크가 아니면 배트를 내밀지 않는 필라델피아 타자들에게 스트라이크 위주의 투수라는 걸 각인시켜야 했고, 95마일을 던지는 투수라는 사실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성낙기는 그런 식으로 3회까지 퀘이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 그리고 간간이 투심패스트볼을 섞어 타자들과 맞상대했다. 3회엔 전광석화(電光石火)를 연달아 던지며 마지막 타자를 잡았다.
‘뭐야, 기교파 투수인 줄 알았는데 강속구 투수였어. 구위로 승부하는 투수야.’
필라델피아의 캐플러 감독은 자신이 가졌던 성낙기에 대한 선입견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자들 또한 소극적인 타격으로는 마이애미의 4선발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스트라이크 투수에게 우리가 너무 신중했던 게 분명해.”
4번 타자 딜런 코젠트의 말이 아니라도 필라델피아 타자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에 의존한 나머지 각자가 자기 스윙을 못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3회까지 무안타로 고전하는 창피함이 선수들 가슴에 쌓이고 있었다. 세자르 에르난데스는 힘 있게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섰다.
‘이제 메이저리그가 뭔지 보여줄 때가 됐다. 자, 던져 봐.’
“헤이, 세자르 우리 투수 잘 던지지? 그렇지 않아?”
“뭐,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던졌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저 정도의 투수는 이곳에 널렸어.”
“그래? 아웃 당하고 침이나 뱉지 마. 아까 나한테 튀었거든.”
성낙기는 좌타자인 세자르의 몸 쪽 깊은 곳으로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곧바로 반응하는 세자르. 그가 친 공이 3루 측 펜스로 데굴데굴 굴렀다.
곧이어 던진 투심에 헛스윙, 그리고 제 3구로 던진 커브에 스윙 아웃. 세자르는 알아듣기 힘든 욕을 내뱉으면서 타석을 떠났다.
성낙기는 타자가 유인구가 올 차례라고 생각할 때 포심패스트볼을 무심하게 집어넣었고 승부구가 올 것이라고 생각할 때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적절히 섞으면서 5회까지 1안타 무실점으로 완벽한 투구 내용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이애미의 타선은 4회에 브라이언 앤더슨의 투런 홈런으로 승기를 잡았다.
“오, 예상외의 투구 내용입니다. 5회까지 1안타로 고전하는 필라델피아인데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저 성낙기라는 투수의 변화구가 아주 다양하고 제구력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전략도 훌륭해요. 3회까지 스트라이크 위주의 맞춰 잡는 피칭을 한 뒤에 4회부터는 유인구로 승부하는 패턴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4회부터는 유인구에 속고 있죠? 그렇다면 타자들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텐데요.”
“아닙니다. 3회까지 스트라이크 위주의 투구를 하면서 언제든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투수라는 것이 필라델피아 타자들의 머리에 새겨졌기 때문에 유인구를 던져도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리는 겁니다. 초반에 직구 위주로 던지다가 경기 중반에 변화구를 많이 섞는 투수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걸 노리는 거죠.”
“음, 그렇기는 합니다만, 신인 투수의 저런 영리함은 뜻밖인데요.”
“리그는 깁니다. 전략은 한두 번 통하는 거지, 결국은 구위가 말해줄 겁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성낙기 투수의 미래를 점치기 어렵습니다.”
중계진은 성낙기의 호투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결론은 5회까지 잘 던진 걸로는 뭐라고 얘기하기가 애매하다는 투였다.
하지만, 마이애미의 팬들은 물론이고 성낙기의 선발을 결정한 피터 감독은 1피안타라는 놀라운 기록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 비싸지 많은 투수, 아니, 싼 맛에 데려온 투수가 5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티고도 더 던질 여력이 있다. 5회까지 투구 수도 69구로 아주 엑셀런트(excellent)했다.
***
-와, 졸라 의외네.
-내 말이. 저런 인물이었어? 성낙기가?
-내가 한 달 전에 댓글 달았지. 성낙기 메쟈가도 10승은 한다고.
-공이 갈수록 빨라지냐. 저거 인간 맞아?
-20대는 키도 크고 근육도 커지는 게 남자란다. 애들아.
-아는 척은, 그럼 나이 먹을수록 공이 빨라지냐?
-내가 알기론 22세 정도가 맥시멈이야. 근데 쟤는 상식을 찢어버리고 있어.
-워… 5회까지 1안타, 그것도 빗맞은 안타야.
-그동안 야매로 갔다고 말 많았는데 잘하기만 하면 까방권 획득한다.
인터넷 중계로 야구를 시청하던 한국 네티즌들도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흥분과 동시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도 제법 있었다.
성낙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은 알지도 못한 채 6회에도 마운드에 올랐고 투아웃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 던진 체인지업이 다소 밋밋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솔로 홈런을 허용했다.
타격감이 좋지 않은 2번 타자, 로만 퀸이었기에 리얼무토 또한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했고 성낙기 역시 같은 생각으로 의심 없이 던진 체인지업이었다.
‘실수다. 궤적이 나쁘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쳐냈어. 노린 게 분명해.’
성낙기는 깨달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곧 홈런이라는 것, 그리고 mlb에서는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담장을 넘긴다는 것도.
지금까지 필라델피아 타자들이 혼란스러웠을 뿐이지, 공의 패턴이 읽힌다면 어떤 공이든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느꼈다. 리얼무토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위기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한 박자 쉬어갈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베테랑다운 경기 감각.
“완벽은 죄와 같아. 여기는 독차지하는 곳이 아니라 빵을 나누어 먹는 곳이야. 넌 방금 천국에 갈 준비를 한 거와 같아.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동료들과 팬들에게 주는 거야. 알았지?”
‘철학과 나왔나? 같은 말이라도 더럽게 어렵게 하네.’
“응, 알았다.”
성낙기는 6회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6회까지 82구를 던졌고 체력은 18이 남아 있었다. 아직 1:2의 경기 스코어로, 한 번만 삐끗해도 역전이다.
헨리 알바레스도 6회 말에 올라와 벌써 투아웃을 잡아놓고 있었다. 확실히 잭 콜먼의 스트라이크 존은 성낙기와 헨리 알바레스가 다르다.
성낙기에게는 지나치게 좁은 존을 적용하는데 반해, 헨리 알바레스에게는 홈 플레이트 앞쪽에 걸치기만 하면 주는 쪽이다.
“잭 콜먼 주심은 참 한결같습니다. 홈팀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판정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기적이 잭 콜먼의 지휘 아래 종종 일어납니다.”
해설자의 말이 잭 콜먼이라는 심판의 성향을 말해준다. 그는 또한 순수 백인인 미국인에게는 후하고 그렇지 않은 유색인종에게는 엄격한 경향도 있다.
한마디로 편향적이면서 스포츠 정신 따위는 개나 주라는 놈이다.
그러면서도 심판에서 잘리지 않는 이유는 미국이라는 사회 역시 잭 콜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온 성낙기는 그런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2안타 1실점의 엄청난 호투를 하고 있는 셈이다.
“7회에도 던질 수 있겠어?”
피터 감독이 성낙기에게 물었다. 성낙기가 겪은 바에 의하면 다행히 이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만약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계약을 했을 리 없다.
“7회까지만 막겠습니다. 더 이상 실점 없이요.”
피터 감독은 성낙기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으며 8,9회를 막을 불펜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7회에 성낙기는 남은 체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8, 9회를 불펜 투수들이 실점 없이 막았고 그날의 경기는 2:1로 마이애미의 승리, 3연패 뒤의 첫 승이었다.
성낙기는 팀에서 가장 먼저 승리를 거둔 투수가 되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메이저리그 첫 승을 축하합니다.]
[체력이 85로 오릅니다]
[세기의 강속구가 83으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85로 오릅니다]
[커브의 제구력이 81로 오릅니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80으로 오릅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80으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75로 오릅니다]
[포크의 제구력이 70으로 오릅니다]
[어깨근육 강화가 (7단계/10단계)로 오릅니다]
[팔 근육 강화가 (7단계/10단계)로 오릅니다]
[짐 캇의 수비력이 (3단계/5단계)로 오릅니다.]
성낙기는 경기장에서 오늘의 수훈 선수로 뽑혔다.
7이닝 1실점으로 역투했고 후속 타자들의 삽질에 득점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안타를 쳐내어 3타수 1안타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성낙기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 상태 창을 보았고 어마어마한 스탯 증가에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한동안 그렇게 안 오르더니, 올라도 찔끔 1씩이나 오르더니 오늘은 강속구가 2, 포심의 제구력이 5까지 오르고 다른 변화구 역시 미쳤다.
게다가 으으으… 엄청나게 조이고 풀리는 근육의 움직임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근육의 느낌은, 경험할 때마다 경이롭고 불가사의하다.
촤아악! 촤아악!
그러는 와중에 성낙기는 갑자기 물세례를 맞았다. 곁에 서서 성낙기의 입에 마이크를 대 주던 여자 아나운서까지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뭐… 한국에서도 경험했지만 이건 물 양동이의 사이즈부터 다르다. 백업 포수 채드 왈라치와 198cm의 큰 키에도 3루수로 뛰고 있는 가렛 쿠퍼다.
무식한 새끼들, 드럼통만한 양동이를 들이붓다니. 여자 아나운서한테도 한 양동이를 뒤집어씌워서 인터뷰는 끝나고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신인한테는 원래 그런다나. 그런다고 여자에게 들이붓냐? 그 바람에 아나운서의 몸의 굴곡이 확 드러난 걸 보면 계획적인 게 틀림없다.
사실, 성낙기가 보기에도 여자 아나운서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래봐야 지금 더그아웃 위의 관중석에 서서 성낙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김아경보다는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