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064화 마이애미 말린스의 선발투수 2
플로리다 해변에 도착하자, 김아경이 리조트에 방을 잡더니 비치웨어를 가져왔다. 밖으로 나가잔다. 비키니를 입고 나가는 김아경을 사람들이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육감적인 힙과 탄탄한 가슴이 마치 모델이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성낙기는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갔다.
늘 여유 있는 치수의 옷을 입고 다닌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수영을 실컷 한 후에 모래 위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기분이 어때요?”
김아경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글쎄요.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는 느낌이죠.”
“무슨 뜻이에요? 메이저리그 계약?”
“천만에요. 팀장님하고 이렇게 데이트를 하고 있잖아요. 한국도 아닌 마이애미에서요.”
“훗. 듣기 좋은데요? 그런데 앞으론 팀장이라 부르지 마세요. 어차피 이젠 소속이 다르잖아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글쎄… 뭐가 좋을까… 누님……?”
“에이.”
“누나?”
“그것도 좀 그렇죠.”
“헐, 그럼 아경 씨?”
“그렇습니다.”
“와, 낙기 씨 엉큼하다. 은근슬쩍 맞먹으려고 하시네. 나이 차이가…….”
“나이가 뭐 중요한가요. 말이 통하고 즐거우면 된 거지.”
-아주 쌩 지랄을 헌다.
-그러게 말여.
“헉!”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성낙기가 엉겁결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아경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둘은 영락없이 같이 부둥켜안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쯤으로 보였다.
“어맛!”
“미, 미안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서…….”
“와아… 그렇게 안 봤는데 얼렁뚱땅 스킨십을 하시네. 내가 이러려고 여기 온 줄 알아요?”
“아니, 정말이에요.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치,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뭐… 좋아하는 건 사실이죠.”
“이제 아주 막 나가시네.”
김아경이 말을 그렇게 하고는 성낙기의 팔을 베고 누웠다. 김아경의 몸에서 풋풋한 향과 온기가 성낙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김아경의 제안으로 샤워를 하고 뷔페를 먹은 후, 라운지에서 와인을 몇 병이나 비우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곯아떨어졌다.
***
애틀랜타와 시범 경기가 있는 날, 성낙기는 3이닝 정도를 던지는 걸로 통보를 받았다. 대략, 50구 내외를 던질 예정으로 잡은 이닝 수였다. 앞으로 개막은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피터 감독은 두 번 정도 성낙기를 시험할 생각이었다.
물론,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면 25인 로스터 진입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계약을 할 때 25인 로스터 요구는 있었지만, 명문화 된 조항이 아니기에 선수의 실력이 미흡하면 감독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
“썬, 마음 편히 던져.”
“옛설.”
성낙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마운드에 올랐다. 성낙기는 달변은 아니지만 간단한 영어 회화나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은 이미 갖춰져 있었다.
모텔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 드랙실바와 헤이드 존을 만나 같이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결과였다.
지난 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순위는 5개 팀 중 3위, 4위였던 마이애미로서는 무조건 넘어야 할 상대임과 동시에 올 시즌도 20차례 가까이 맞붙어야 하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다.
“잘 던질 수 있겠죠?”
“WBC 같기만 하다면요.”
관중석 한쪽에서 김아경과 정진수는 성낙기의 시범 경기 선발 등판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아경으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고 비판적인 여론을 무릅쓰고 데려온 미국행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온 투수가 시범 경기부터 맞아 나가면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나름의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일이긴 했지만 사람의 앞일을 누가 알 것인가.
시범 경기에서 얻어터지고 25인 로스터 진입에도 실패하면 자신 역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니, 야구계에서 두고두고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마운드의 성낙기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WBC에서 던졌던 놈이군. 급조된 대표 팀과 리그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보여주지.’
1번 타자로 나온 스완슨은 긴장한 기색도 없이 말짱하게 서 있는 성낙기를 노려보았다. 한 두게임 잘 던졌다고 스카우트한 마이애미가 한심하다는 생각뿐이다.
그가 아는 메이저리그는 마이너리그부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자만이 버텨낼 수 있는 정글이지, 저런 철없는 애들이 설치는 곳이 아니다.
스완슨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성낙기는 초구를 던졌다.
팡.
포심패스트볼 143km.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은 곳에 예리하게 꽂히는 공에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마이애미의 포수 채드 왈라치는 힘 있게 들어오는 공을 받고 손이 얼얼함을 느꼈다.
스피드가 특출 나게 빠른 건 아닌데 홈플레이트 앞에서 강하게 밀고 들어온다. 글러브가 밀릴 정도로. 경기 전 불펜에서 받을 때와는 다른 묵직함이 있다.
스완슨은 초구를 그냥 보내고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89마일 정도의 포심패스트볼 스피드는 메이저리그를 통틀어도 느린 볼에 속한다.
“후우, 공 실밥까지 다 보이네.”
스완슨은 속으로 혼잣말을 하고는 2구를 맞을 준비를 했다. 저 정도의 공이면 포심패스트볼이든 변화구든 다 때려낼 수 있다. 성낙기는 2구도 똑같은 코스와 똑같은 구종을 선택했다.
따악.
파울.
스완슨이 친 공이 1루 측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스완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타이밍이 제대로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배트박스에 도달했다.
‘이상한데?’
속으로 물음표를 떠올린 스완슨은 성낙기의 3구가 몸 쪽으로 코스만 바꿔서 날아올 때 마침내 하나 걸렸다고 확신하면서 배트를 돌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성낙기가 몸 쪽으로 던진 공은 체인지업이었는데 배팅 포인트 바로 앞에서 쑥 가라앉았다.
일반적인 체인지업이 배팅 포인트 앞, 1.5m 전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것과 달리 성낙기의 체인지업은 배트와 만나는 지점 바로 앞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엄청난 순발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제대로 대처하기가 어려운 구종이다.
애틀랜타의 감독 브라이언 스니커는 첫 타자가 아웃되자 의외라는 듯 목을 외로 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표정.
하지만 2번 타자와 3번 타자마저 내야 땅볼로 아웃되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성낙기는 1회 초에 겨우 9개의 공을 던지고 내려왔다. 마이애미의 1회 말 공격도 별 소득이 없이 경기는 2회 초로 넘어갔다.
“보기보다 제구력이 좋다. 체인지업을 조심해.”
4번 타자 리오 루이스에게 감독이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 그가 보기에 저런 기교파 투구에게 처음부터 말려 들어가면 경기가 완전히 꼬인다.
경기 초반에 끈질긴 승부로 녹아웃 시키면 경기는 쉽게 넘어올 것이다. 리오 루이스는 굳이 감독이 말하지 않아도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믿었던 루이스도 중견수 뜬공으로 아웃되고 나머지 타자도 맥을 못 추고 타석에서 물러났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지? 평범한 속구조차 정타가 나오지 않고 있어. 변화구는 그렇다 쳐도 포심패스트볼은 충분히 두들길 만한 공인데?”
“투구 폼이 이중 키킹 비슷한 데다 디셉션도 좋아서 타이밍을 못 잡고 있습니다. 포심이 스피드는 느린데 종속은 상당해 보이는군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브라이언 감독의 말에 업튼 투수 코치가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업튼 코치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처음 대하는 투수이다 보니 낯이 설어서 일뿐 적응이 되면 공략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었다.
경기는 그런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성낙기는 2회에도 3회에도 무안타로 애틀랜타의 타선을 요리했다. 3회까지의 투구 수도 겨우 30개 남짓이었으므로 마이애미의 피터 감독은 4회에도 성낙기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4회에 텍사스 성 안타를 하나 허용하고 나머지 타자를 깔끔하게 막아냈을 때, 애틀랜타의 브라이언 감독은 성낙기라는 투수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만 보면, 공 끝도 좋고 제구가 아주 좋다. 실투가 하나도 없었어.’
성낙기는 4회를 마치고 다른 투수와 교대했다. 더그아웃에 들어가자 선수들이 밝은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해온다. 처음엔 별 기대를 안했는데 예상외로 잘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팀에 승리를 가져다 줄 선수로 생각했나 보다.
프로야구가 아무리 개인 성적이 우선이라지만, 맨날 지는 팀에서 뛰고 싶은 선수는 없다. 관중석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김아경이 환하게 웃었다.
***
시즌 개막전이 열렸다. 첫 경기는 내셔널스 파크에서 열리는 동부 지구의 강자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3연전이었다. 그리고 마이애미는 첫 3연전에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를 필두로 한 워싱턴의 선발에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3연패, 2021 시즌의 첫발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다음 경기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전이었다.
피터 감독은 시범 경기에서 4이닝 무실점,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성낙기를 4선발로 내세웠다. 경기 장소는 필라델피아의 홈구장인 시티즌스 뱅크 파크. CBS 중계 팀은 성낙기의 등판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다.
“3연패 중인 마이애미 말린스가 성낙기 투수를 선발로 내세웠는데 이 선수의 경쟁력이 어떨지 아주 흥미롭습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예상을 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 맥 마이커 해설자에게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오늘 필라델피아 선발은 헨리 알바레스로 지난 시즌 9승 7패에 4.23의 ERA를 기록했습니다. 스프링캠프에서 주 무기로 다듬은 투심 패스트볼이 얼마나 타자를 괴롭히느냐에 따라 오늘 경기의 향방이 좌우될 겁니다. 하지만, 헨리 알바레스의 경우 계산이 서죠. 그동안 보여준 게 많으니까요. 문제는 KBO에서 온 저 성낙기라는 투수입니다. KBO리그와 WBC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대표 선수들이라고 해도 타격감이 올라오지 않을 시기였거든요. 3월과 4월은 아주 다릅니다. 이제 어떤 공이든 칠 준비가 끝난 리그의 타자들에게도 그날의 퍼포먼스가 재현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회의적입니다.”
“그렇죠. 숱한 투수와 타자들이 데뷔했다가 사라지곤 하는 곳이 바로 여기, mlb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성낙기 투수 마운드에 오릅니다.”
“어쨌든 검증되지 않은 투수를 4선발로 내세운 피터 감독의 배짱은 대담합니다.”
다소 비판적인 중계진의 말을 뒤로 하고 성낙기는 마운드에 올라 연습구를 던졌다. 오늘 손발을 맞출 포수는 J.T 리얼무토였다.
시범 경기에서 뛰었던 채드 왈라치는 백업 포수였으나 성낙기와는 사인이 잘 맞아서 좋았는데 리얼무토는 어떨지 약간 걱정되기는 했다. 그럼에도 성낙기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의 1번 타자는 세자르 에르난데스였다.
몇 년 전까지 그럭저럭 mlb에서 버티다가 작년부터 날아다니는 중이다. 발이 빠르고 도루 능력이 발군이다. 리얼무토는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아이, 초구부터 슬라이더가 뭐야. 남자는 직선이지.”
성낙기가 고개를 살짝 젓자, 리얼무토가 다시 한 번 똑같은 사인을 냈다. 내 말대로 하라는 소리다. mlb도 은근히 선후배 따지는 게 사람 피곤하게 한다.
성낙기는 사인대로 슬라이더를 던졌다. 85마일(136km)의 공이 가운데로 향하다가 바깥쪽으로 휘면서 떨어졌다.
휘잉.
“스트라이크!”
세자르는 크게 스윙을 하고는 원심력을 못 이겨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변화구에 살짝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 공은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찔렀는데 볼이 선언되었다. 분명 홈 플레이트에 걸쳤는데 주심은 미동도 없다. 3구로 바깥쪽 조금 높은 볼을 던졌다.
볼.
주심이 전혀 반응이 없다. 그 다음 몸 쪽으로 던진 체인지업이 타자의 무릎 위를 파고들었다. 역시나 볼. 리얼무토가 글러브를 잠깐 멈추고는 성낙기에게 공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