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063화 마이애미 말린스의 선발투수 1
WBC 경기가 끝난 다음 날 그러니까, 2021년 3월 19일 오전에 김아경은 mlb의 구단 관계자를 만나고 있었다. WBC 결승전이 열렸던 마이애미 말린스의 구단 사무실에 김아경과 정진수, 그리고 오스틴 단장과 피터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대화의 화제는 결승전에서 미국 팀을 상대로 8이닝 2실점이라는 놀라운 피칭을 선보인 성낙기였다.
몇 개월 전, 한국 시리즈가 끝난 날 밤에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셨다. 김현중 회장은 애써 올라간 한국 시리즈 패배의 아쉬움을 술로 달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맞은편의 김아경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
“하, 이렇게 무너지나? 내가 너무 기대를 했나 보다.”
“아이 참, 아빠! 나올 때 들어갈 때 다르다더니 지금 아빠가 딱 그래요. 지난 시즌에 삼호슈퍼스타즈가 몇 위 한 줄이나 아세요? 자그마치 7위였답니다. 이번 시즌은요? 2위예요, 2위. 그것도 한국 시리즈 준우승이라구요. 사람들은 기적이라고들 해요.”
“허허허… 누가 뭐라 했냐? 기왕에 올라갔으니 접전을 벌였으면 더 좋았겠다, 이거지. 안다, 알아. 다 네 덕이라는 거.”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쩝, 우리 아경이한텐 못 당하겠네. 그냥 좀 아쉽다는 거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고생했는데 소고기 사줄까?”
“됐어요. 저도 고기 먹을 돈은 있어요.”
“그래? 어쨌든 수고 많았다. 이제 어떡할래. 스카우트 팀장 하면서 팀 성적을 끌어 올렸으니 다시 그룹으로 돌아와도 된다.”
“…….”
“왜 말이 없어?”
“한국 시리즈도 끝났고 준우승을 했으니까 기분은 좋은데, 신경 쓰이는 게 있어요.”
“너, 혹시……?”
“그래요. 성낙기 선수하고 했던 약속이랄까… 그런 거죠.”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내가 듣기론 한국 시리즈 3승을 얘기했다면서. 2승에서 멈췄는데 뭐가 신경이 쓰이지?”
“맞아요. 2승에서 멈췄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죠. 그런데… 그 선수의 갈망을 알았고 꿈을 알았어요. 제가 미술의 꿈을 접었던 것처럼 그도, 적어도 6년은 꿈을 접어야 하죠. 포스팅 시스템의 적용을 받으려면요.”
“그거야, 모든 일엔 규칙이 있고 야구도 마찬가지지. 난 이유를 모르겠구나… 너… 설마……?”
“글쎄요.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아마, 그렇게 된다면 예외를 만든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겠죠.”
“비판… 그까짓 꺼 해치우면 그만이다. 나도 수많은 여론에 시달리면서도 여기까지 왔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만약 네가 성낙기를 보냈다 치자. 그 선수가 잘할 수 있을까? 그런 확신이 없다면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해. 못하면 못할수록 두고두고 너에게 화가 미칠 거다.”
“있어요.”
“있… 어……?”
“그 선수는 다른 선수와 달라요. 못 느끼셨어요? 뭔 진 모르지만 날이 갈수록 공이 빨라졌고 변화구도 일취월장했죠. 불가사의할 정도로요. 타격은 또 어떤가요. 제가 확신하는 이유는 그 선수의 모든 능력들이 진행형이라는 거예요. 제 예감이 맞다면 공은 더 빨라질 거고, 아마 내년엔 아무도 치지 못하는 공을 던질 거라고 생각해요.”
“괴물 같은 선수이긴 하지만, 네 말대로 가능할까? 정말 계속 공이 빨라진다는 보장만 된다면야 mlb에서 성적도 나고 할 테지만 휴… 아경이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구나. 우리가 한낱 야구 선수 때문에 긴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좀 이상하고… 허허.”
“그래서 말인데, 제가 알아서 해도 될까요?”
“…너 혹시 그 선수를 좋아하기라도 하니? 너와 별 관계없는 야구단의 일원일 뿐이다. 넌 삼호그룹 오너의 딸이고. 잊지는 않았겠지?”
“사심은 없어요. 삼호슈퍼스타즈 출신의 메이저리거를 보고 싶은 뿐이에요. 아니, 그보다 한국의 성낙기가 되기를 바라요. 최동원이나 선동열 선수가 전성기에 mlb에 갔더라면 우리 야구는 더 발전했을 거예요.”
“끄응, 엄마를 닮은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나. 한국 야구를 위해서라… 지금 살았더라면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했을 텐데… 내일은 점검 삼아 백화점이나 가보자꾸나. 곧 겨울인데 옷도 장만하고.”
김현중 회장이 못 이기는 척 말꼬리를 돌렸다.
그로부터 몇 달 후 WBC가 끝난 다음날,
그러니까 김아경이 마이애미 말린스 사무실에 있던 그 시각, 삼호슈퍼스타즈는 깜짝 뉴스를 발표했다.
한국 시리즈와 WBC를 통해 거물급 투수로 자리매김한 성낙기의 방출 소식이었다. 소식을 접한 기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마영진 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재확인할 정도였다.
프로야구 역사상, 성낙기처럼 발군의 성적을 남긴 투수를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한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런 문제로 시끄러울 때, 김아경은 미국에서 조용히 성낙기의 진로를 모색 중이었다.
<투수 성낙기를 보류 선수에서 제외한 삼호슈퍼스타즈의 속내는? - 에잇 세븐>
<성낙기, 자유 계약 선수가 되다 - 야구장 닷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삼호슈퍼스타즈, 성낙기 투수는 어디로? - 스포츠 나인>
팬들은 사이트마다 돌아다니며 소식을 퍼 날랐고 삼호슈퍼스타즈 구단 홈페이지는 마비되었다. 예상보다 거센 반응에 마영진 단장은 당혹스러워했고 소식을 접한 각 구단 스카우트들의 물밑 작업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선수의 희망대로 방출을 선택함으로써 그의 mlb 도전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단, 납득할 만한 계약이어야 하며 마이너리그는 현재 계획에 없습니다.”
급기야, 마영진 단장은 위와 같은 생각을 미디어 앞에서 말했고 팬들의 여론은 엇갈렸다. 구단이 미쳤다는 둥, 좋지 않는 선례가 될 거라는 말들이 난무했지만 한편으론 선수의 앞길을 열어주는 좋은 구단이라는 이미지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
김아경과 정진수가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 사무실에 간 이유는 그나마 가장 나은 조건을 내놓은 구단이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1+1의 계약이지만.
2년째의 계약은 선수 하는 거 봐서 파기할지, 그대로 갈지 구단에서 정하겠다는 의미다. WBC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이기는 했지만 mlb 선수들은 예전부터 리그 외의 경기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단 한 경기를 잘 던진 걸로는 검증되지 않는 선수일 뿐이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리그에서도 WBC 같은 활약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마이애미는 적당한 선에서 선발 후보를 구하려는 것이다.
2년 연봉은 최대 700만 달러.
첫 해에 옵션 100만 달러 포함 300만 달러였고 그 다음 해엔 역시 옵션 100만 포함 400만 달러의 조건이었다. 옵션은 120이닝을 던지는 조건이어서 주전 선발로 뛴다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80이닝을 옵션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두 구단의 평가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샌디에이고는 불펜 투수, 마이애미는 선발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사실, 3선발까지만 확정적이고 나머지 4, 5선발은 경쟁을 통해 정해겠다는 감독의 멘트가 이미 나왔었다.
시범 경기 기간에 개막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마이애미는 선발 퍼즐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언가 물건이 될 만한 투수를 WBC에서 보았고 KBO 방출과 동시에 정진수 에이전트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마이애미로서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벼락치기였다.
“개막전 25인 로스터에 포함되기를 원합니다.”
김아경의 말에 오스틴 단장은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는 이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김아경의 연락을 받은 성낙기가 나타났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성낙기는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오스틴 단장은 180cm이라고 들었던 성낙기의 키가 생각보다 큰 데 놀랐고 보기보다 다부진 근육질에 또 놀랐다.
성낙기의 키는 아직 크는 중이었고 지난 시즌 내내 웨이트트레이닝을 병행했으며 무엇보다 어깨와 팔 근육 강화 시스템으로 인해 가슴 근육까지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묘한 투수입니다. 영상을 보시다시피 제구력이 훌륭하고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볼 끝이 살아 들어옵니다. 변화구도 매우 인상적인데 각이 좋고 무거운 공을 던지지요. KBO 2020 시즌 동안 피 홈런이 4개에 그칠 정도로 장타를 맞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스틴 단장은 언젠가 구단 스카우트인 윌슨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혹시, 이 선수가 일을 내는 건 아닌가 기대에 부풀었다. 김아경은 계약을 매듭짓고 말린스 사무실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는 짓이 잘하는 것인가. 내 예감대로 성낙기가 계속 발전을 거듭한다 해도 KBO에서처럼 mlb를 호령하는 게 가능할 것인가.’
아니, 그런 것들은 둘째 치고 극히 예외적으로 선수를 풀어주고 에이전트 역할까지 하는 자신이 묘하게 느껴졌다.
‘이건… 확실히 과한 면이 있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선수의 앞날을 위해 뛴다……? 그것도 구단주의 딸이……? 휴, 모를 일이야.’
김아경은 혼자 헛웃음을 지으면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건 단지 한국 야구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
성낙기는 마이애미 말린스의 말린스파크에 서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꿈에 그리던 mlb이기 이전에 자신의 조력자이자 스승이었던 두 사람, 바로 드랙 실바와 헤이드 존이 활약하던 곳에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도 신인이었을 때 이런 알 수 없는 기분이었을까. 생소하고 이국적인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을 향해 공을 던진다는 것. 마운드에 섰을 때 관중들은 어떤 반응일까.
낯 선 곳에 와서 경기장을 둘러보면서 성낙기는 상상했다.
많은 관중들 앞에서 최고의 타자를 삼진으로 솎아내는 장면을. 그리고 최고의 투수를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고 배트를 집어 던지는 자신의 모습도. 그러다가 일어나는 벤치클리어링도.
“무슨 생각해요?”
뒤에서 다가온 김아경이 묻기 전까지 성낙기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렸다. 김아경은 미국에 온 후로 말수가 줄고 진지해진 성낙기의 다른 면을 보고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는 개구쟁이 같았는데 외국 물을 먹더니 사람이 변했다.
“좀 슬퍼서요.”
“슬퍼… 요? 뭐가요?”
“내 공에 당하는 타자들 생각, 그리고 투수들을 생각하면 안됐다 싶어요. 어쩌다가 나 같은 사람과 같은 시대를 보내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휴~ 어쩐지 사람이 달라졌나 했네. 됐고, 이제 메이저리거가 됐으니 축하주 한잔 해야죠. 따라오세요.”
김아경이 성낙기의 팔을 잡아끌었다. 성낙기에게는 하루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둘은 김아경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 플로리다 해변으로 향했다. 지붕을 젖힌 스포츠카 운전석에 앉은 김아경의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체력이 83으로 오릅니다]
[세기의 강속구가 81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80으로 오릅니다]
[라이징패스트볼이 (7cm/10cm)으로 오릅니다]
[퀘이크볼이 (4cm/5cm)로 오릅니다]
“억!”
“왜요?”
“아, 아닙니다.”
성낙기는 차를 타고 가던 중, 눈앞에 나타난 스탯 증가에 놀라 소리쳤다. 여러모로 기분 좋은 날이 틀림없다.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하고 KBO 구단주의 딸과 드라이브를 하는 도중 스탯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