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062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5
“저 선배 진짜 사고치는 데 뭐있어.”
성낙기는 혼잣말을 하고는 퀘이크볼을 던져 아레나도를 내야 땅볼로 돌려 세웠다. 그나저나 대단하긴 하다. 그걸 돌려서 홈런을 만들어 버리다니.
성낙기도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4회까지 45개의 투구. 그리고 5회 초 한국 팀의 공격에 천강조가 선두 타자로 나왔는데 첫 타석에서 바깥쪽 뚝 떨어지는 커브에 루킹 삼진을 당한 터였다.
4회까지 한국 팀은 스트라스버그에 무안타 무 볼넷, 6삼진으로 철저하게 끌려 다니고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4번 타자로서 뭔가를 해내야할 책임감 같은 것이 천강조의 어깨를 짓눌렀고 그래서인지 타석에 선 그의 모습은 그 여느 때보다 긴장되어 보였다.
팡.
스트라이크!
하지만 스트라스버그의 투심패스트볼은 95,6마일의 스피드에 무브먼트까지 동반한 무서운 무기였다.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너쯤이야, 하는 듯이 무조건 꽂아대는 공 앞에 속수무책이다.
팡.
스트라이크.
천강조의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스트라스버그는 연거푸 바깥쪽 패스트볼을 넣었다. 그런 다음 유인구로 커브를 던졌고 몸 쪽 높은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이것 봐라?
스트라스버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고 더 이상 승부를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다음,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강의 공을 뿌렸다.
따악.
바깥쪽에서 휘어져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볼을 천강조가 받아쳤다. 제대로 받아쳤다기보다는 엉덩이가 살짝 빠지면서 배트 컨트롤로 갖다 대기만 한 듯한 타격 동작이었는데 배트에 맞은 공은 1루수 키를 살짝 넘어가 버렸다. 지금까지보다 반 박자 빠르게 타이밍을 가져간 것이 맞아 들어갔다.
“오늘 첫 안타를 맞는 스트라스버그 투수, 이제 한국 팀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몸이 실리지 않았지만 타이밍은 좋았어요. 공의 무브먼트도 잘 읽어냈습니다. 저처럼 기술적인 타자가 KBO에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저건 좀처럼 보기 힘든 배트 컨트롤이에요.”
선두 타자 천강조가 안타로 나가자 허봉호 감독은 얹혔던 체증이 내려가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노아웃 1루의 절호의 찬스에서 이중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193cm의 키에 102kg의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이중호의 등장으로 관중석 한쪽의 한국 교민들은 목이 터져라 안타를 연호했다. 이중호 역시 2회에 스트라스버그의 커브에 속아 삼진을 당한 터였다.
체인지업도 가끔 던졌는데 그다지 위력적이지는 않고 투심패스트볼과 커브 위주의 투구였는데 이 커브가 문제였다.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가 아래로 급격히 꺾이기 때문이다. 디셉션도 좋은 편이고 기본적으로 다른 구질을 던질 때의 투구 폼 변화가 없어서 더 속기 쉬웠다.
“저 투수 잡는 방법은 게스히팅뿐이다. 딱 한 가지만 생각하고 들어 가.”
이중호가 타석에 나오기 전에 장종운 코치가 해줬던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체인지업이 있지만, 자주 쓰지 않고 투심패스트볼과 커브의 투 피치로도 타자를 상대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투수다.
mlb 강타자들이 게스히팅을 할 줄 몰라서 안 했겠는가. 해도 안 맞으니까 그렇지. 구질을 알고 들어가도 맞추기 힘든 공, 그 공을 바로 저 마운드 위의 투수가 던지고 있다.
팡.
스트라이크.
팡.
볼.
슈육!
따악.
이중호가 휘두른 타구가 투수 키를 넘고 중견수마저 넘기고는 중앙 127m의 담장을 맞고 투 바운드로 중견수 글러브로 들어갔다.
디 고든은 공을 받자마자 중계 플레이를 하던 유격수를 향해 공을 던졌고 천강조는 2루를 돌아 3루까지 내달렸다. 공을 받은 유격수가 3루로 공을 던진 타이밍과 3루 앞에서 슬라이딩을 하는 천강조의 타이밍이 거의 비슷했다.
“세이프!”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가 된 천강조가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섰다. 미국 관중들이 천강조의 허슬 플레이에 박수를 보냈고 한국 더그아웃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중호는 2루에 가지 못했다.
디 고든이 공을 잡는 순간, 2루를 향해 던질 것처럼 힐끗 보았기 때문에 1루를 돌던 이중호는 베이스러닝을 급히 멈췄고 디 고든은 그 틈에 천강조와 승부를 한 것이다.
이중호가 2루까지 못 간 것은 아쉽지만 워낙 타구가 빨랐고 담장을 맞고 나오는 바람에 쉽지 않은 승부였다.
“아, 한국 팀 대단합니다. 거기서 히트 앤드 런(Hit and run)을 시도했습니다. 일종의 승부를 걸었네요. 그 덕분에 1루 주자가 3루까지 진출할 수 있었죠. 스트라스버그가 스트라이크 위주의 투수인 걸 생각한 고급 야구입니다.”
“워낙 큰 타구였죠? 담장 상단을 맞고 나와서 디 고든이 바로 잡을 수 있었고 타자 주자를 1루에서 막았습니다.”
이중호는 1루 베이스 위에 서서 어이없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홈런 성 타구인데 펜스 플레이가 워낙 능숙해서 2루까지 가지 못했다.
KBO 같으면 무조건 2루타였을 것인데 히트 앤드 런을 감행한 천강조가 겨우 살 만큼 야수들이 모두 강견이다. 빠르지 않은 이중호의 걸음으로 2루는 무리였던 것이다. 어쨌든 한국은 노아웃 1, 3루의 황금 찬스를 맞았다.
타임!
미국 팀의 돈 워리 감독이 타임을 외치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스트라스버그는 뜻하지 않은 연속 2안타에 뿔이 잔뜩 난 모습이었지만, 순순히 공을 넘겨주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본 순간 한국 교민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다름 아닌 커쇼였기 때문이다.
“아, 뭐야. 커쇼가 준비하고 있었어?”
“망할…….”
“그래봐야 큰 경기에 약한 선수 아니야?”
“노노, 아니야, 작년 포스트시즌 ERA가 1.89야.”
“국가 친선 전에 저런 투수가 왜 나와?”
“친선전이 아니고 대항전이겠지.”
“독하네. 거기서 투수를 바꾸냐.”
커쇼의 등장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누가 뭐래도 그는 사이영상을 밥 먹듯이 받는 지구상 최고의 투수이기 때문이다.
연습 구를 던지는 커쇼의 공이 포수 글러브에서 뻥뻥 소리를 냈다. 저 특유의 살아 오르는 볼 끝 보라지.
타임!
허봉호 감독이 커쇼를 보고는 타임을 걸고 대타를 준비했다. 오장룡이 실망한 표정으로 배트를 돌리다 말고 돌아섰다.
그리고 한 선수가 배트를 들고 더그아웃에서 나왔다.
그는 바로, KBO에서는 강속구에 강하고 배드(bad) 볼에도 강한 선수로 꽤 알려져 있지만 교민들에게는 낯선 타자, 뜬금포 김석문이었다. 포수의 사인을 받은 커쇼가 초구를 던졌다.
따악.
김석문의 배트가 망설임 없이 돌아갔다. 몸 쪽으로 살아 들어오는 다소 높은 공이었지만 눈에 보인다 싶으면 치는 게 바로 김석문이다.
김석문이 친 타구가 말린스 파크 외야로 높이 솟아올랐다.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로 떠오른 공은 좌익수가 뒤로 물러나면서 여유 있게 잡아냈다. 천강조는 좌익수가 공을 잡는 순간, 태그 업(tag up)을 시도했다.
이를 악물면서 3루 베이스를 내닫고 홈으로 들어오는 그의 얼굴에서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낙기는 천강조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가졌던 선입견을 조금 수정했다.
모연비퍼스의 4번 타자로서 교만, 건방, 뭐 그런 것 말이다. 좌익수 트리스테일러의 송구가 홈으로 들어왔고 천강조는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홈 플레이트에 먼지가 일었다.
“세이프!”
잠시 후, 심판의 목소리가 들렸고 천강조는 펄쩍 뛰어올랐다. 배드볼 히터 김석문의 희생플라이였다. 마운드의 커쇼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한국 팀의 더그아웃은 달아올랐다. 미국의 해설자도 한국이 2안타만으로 1점을 뽑아내는 과정을 극찬하면서 미국 타자들이 성낙기의 공을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경기 스코어 1:1로 대등하게 흘러가자 그때까지 즐기고 마시던 관중들은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한국 팀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 주자는 원아웃 1루에 있었다. 보통은 좋은 찬스지만 상대 투수가 커쇼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커쇼는 한국 팀의 다음 타자 이강환과 마성남을 연속 삼진으로 잡고 이닝을 끝내 버렸다.
***
경기는 어느덧 8회였다. 성낙기의 투구 수는 7회까지 80개였다. 대회 규정상 결승 라운드에 올라오는 선발투수는 95개가 한계였으므로 8회가 마지막 이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8회에도 성낙기가 올라오자 미국 팀의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7회까지 오는 동안 저 동양인 투수에게 mlb의 올스타 급 타자들이 단 5안타로 묶여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삼진은 또 8개나 당했다. 7회에 또 하나의 솔로 홈런으로 간신히 리드를 잡았지만, mlb 스타들에 어울리지 않는 경기력임은 분명했다.
‘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거지? 변화구 제구도 좋고 다양한데 평범한 포심패스트볼도 못치고 있다.’
하지만, 돈 워리 감독이 말하는 성낙기의 포심패스트볼은 142~143km 정도의 스피드에 불과하지만 결코 평범한 공은 아니었다. 전광판에 찍히는 숫자보다 종속이 훨씬 빠른데다가 힘 있게 살아 들어온다.
평범한 투수의 공보다 히팅 포인트가 훨씬 위쪽에 형성된다. 가기에 양념처럼 라이징패스트볼이 들어오고 체인지업이 뚝 떨어지고 슬라이더는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가 하면 커브는 폭포수다. 그뿐이면 mlb 타자들도 이토록 고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포심패스트볼처럼 오다가 가라앉는 포크볼과 역회전을 하면서 꺾여 들어오고 꺾여 나가는 투심패스트볼까지 아무리 괴물들이 모인 mlb 타자들이라 해도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다. 타자들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9번 타자 크리스 브라이언트에게는 더더욱 생소하고 황당한 볼을 뿌렸다. 전광판에 찍힌 공의 스피드를 보고 관중들은 물론 해설자와 선수들까지 경악했다.
152km.
1회부터 지금까지 145km가 최고였던 투수가 난데없이 8회에 152km를 찍는다는 건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8회에 갑자기 자신의 최고 구속을 경신하는 선나키 투수, 믿어지십니까?”
“정말 놀랍네요. 8회에 마운드에 오른 선수가 자신이 지금까지 던진 최고 구속을 무려 7km나 경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투수는 지금까지 스피드를 아껴왔다는 가설이 성립됩니다. 그것도 메이저리그의 최고 타자들 앞에서, 더구나 WBC 결승전에서 말이죠.”
“경이로운 투구 내용입니다. 하아, 그런데 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저런 공을 계속 던졌다면 홈런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죠.”
“아주, 아주 특이한 투수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랬다. 성낙기가 던진 전광석화(電光石火)로 경기장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물론 mlb의 타자들이었다. 8회까지 던지는 저 투수가 자신들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전광석화(電光石火)!”
따악.
그러거나 말거나 성낙기는 또 한 번 전광석화를 사용했고 브라이언트는 2루수 땅볼로 아웃되었다. 그리고 성낙기는 남은 체력과 스킬을 마음껏 사용한 끝에 1번 타자 디 고든과 크리스 테일러를 내야 땅볼로 잡아냈다.
그런 뒤, 환호하는 교민들을 향해 한 차례 손을 들어주고는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미국 팀은 커쇼가 내려갔고 9회 마무리로 켄 자일스가 올라왔다.
그러고는 mlb의 마무리답게 한국의 타선을 잠재웠다. 그리고 성낙기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1:2 미국 팀의 WBC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