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060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3
“후욱, 후욱… 저 타자 일본전에서 투수로 던졌던 얘야. 대타로 내는 걸 보니 뭔가 있나 봐. 일단은 신중하게 상대해 보자고.”
할 말을 마친 포수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후아… 이건 뭐야. 투수가 타석에 섰어? 투타겸업이란 말인가.’
아르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타석에 선 성낙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구 변방이다 보니 실력 있는 타자가 없어서 엔트리를 겨우 짜왔을 거라고.
대타로 낼 카드가 오죽 없었으면 저러겠냐고.
지 맘대로 생각하다가 뭔가 미심쩍을 마음에 유인구를 던져서 타격 수준을 알아볼 생각을 했다. 포수 역시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두어 개 정도 높은 몸 쪽 볼을 요구했다.
팡.
휘잉.
스트라이크.
몸 쪽 높은 공에 스윙하는 모양새를 보니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타자가 맞다. 헬멧이 거의 벗겨질 만큼 큰 스윙이었고 배트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한 타자의 몸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응?”
투수 아르딘은 눈은 크게 떴다. 저 정도의 어설픈 타자가 이런 중요한 순간에 대타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스윙을 하는 자세도 엉거주춤 이상하고 투수인 자신이 보기에도 도무지 몸의 중심을 못 잡는 유형이다. 저런 식의 모 아니면 도, 식의 타자라면 굳이 스트라이크를 던질 필요가 없다.
팡.
볼.
이번엔 용케 골라낸다. 가운데로 가다가 외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였는데 배트가 따라 나오지 않았다. 뭐야, 선구안이 있다는 얘긴가? 투수 아르딘은 좀 헷갈렸다.
초구에 나왔던 스윙은 제대로 된 타자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2구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좋아, 그렇다면.’
또 유인구를 던져 볼카운트가 나빠지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더 이상 끌려 다닐 수 없다. 또한 초구의 어설픈 스윙이 여전히 아르딘에게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이번엔 몸 쪽 낮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던지라는 사인이 왔다. 어설프게 건드려 땅볼을 쳐준다면 바로 병살타 코스다.
아르딘은 힘껏 공을 채면서 던진 후에 수비 자세를 취했다. 몸 쪽으로 잘 제구된 공을 건드리면 3루나 유격수, 혹은 자신에게 타구가 올 가능성이 높다.
따악.
그러나 투수의 상상과는 달리 성낙기가 친 공은 가볍게 3루수 키를 넘어 버렸다. 3루수 키를 넘긴 뒤, 경기장 안쪽에 떨어지더니 파울라인을 따라 외야로 굴러갔다. 좌익수가 허겁지겁 따라갔고 공은 펜스까지 굴러가 맞고 나서야 좌익수의 글러브에 들어왔다.
“2루타 코스입니다. 성낙기 선수 1사 만루의 찬스에서 2루타! 정말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방송을 탔고 2,3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인, 1루 주자 오장룡은 3루에 들어갔다.
2점을 만회하고도 원아웃에 주자 2,3루의 찬스가 계속 이어졌다. 성낙기에게 2루타를 내준 아르딘은 잠시 멘붕에 빠졌다.
‘도대체 뭐야. 초구에 휘두른 그 스윙은 뭐였지?’
방금 자신이 던진 몸 쪽 공은 완벽한 제구가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스윙으로는 2루타가 나올 수 없는 코스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아는 상식은 그랬다.
‘그렇다면 초구 스윙이 페이크였단 말인가……?’
그 순간, 포수도 투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구의 타격 동작과 2루타를 쳐낸 타격 매커니즘은 몸을 쓰는 것부터 달랐다.
초구에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무식하게 배트를 휘둘렀다면 몸 쪽을 공략한 타격 자세는 몸의 중심 이동과 배트가 나오는 궤적 등에서 차원이 다르다.
마치 물이 흐르듯 가볍게 쳐내어 3루수 키를 넘기고 펜스까지 빠르게 굴러간 것이다. 초구가 페이크가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는 게 투수와 포수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Fuck…….”
욕을 속으로 삼키며 나음 타자를 맞는 그들의 속내는 페이크 타격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KBO 타자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하지만 포수는 마운드에 올라가지 않았다. 올라가서 우리가 속았다는 걸 말한다는 건 더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수와 포수가 분을 삭이는 사이, 모연비퍼스의 포수 마성남이 타석에 들어섰다.
“헤이, 좋은 볼로 줘.”
“What?”
“방금 성낙기한테 던진 걸로 부탁해.”
“What are you talking about?!!!”
“모르면 말고.”
기분이 잡친 데다 타자까지 나와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알아야 벤치클리어링도 해볼 건데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지금 2루에 있는 저놈이 아까 몸 쪽 포심패스트볼을 걷어냈지.
가만 생각해 보면 KBO 타자들이 포심패스트볼에 강한 것도 같다. 원아웃에 2,3루의 위기에서 1구, 1구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푸에르토리코 포수는 바깥쪽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팡.
볼.
본래 아르딘 세페다 투수가 강속구를 앞세워 윽박지르는 유형인데 변화구가 예리할 리 없다. 살짝 벗어났는데 타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 어디… 다음 공 역시 커브를 던졌으나 배트가 나오려다 만다. 투 볼 노 스트라이크. 투수에게 불리한 볼 카운트가 만들어졌고 3구는 어쩔 수 없이 바깥쪽 포심패스트볼.
틱.
파울.
마성남은 투수의 성향을 파악하고 철저하게 포심패스트볼만 노리고 있었다. 다음 공도 파울, 볼 카운트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체인지업이 다시 볼이 되었고 풀 카운트가 되었다. 아르딘은 결국 정면 승부를 택했다.
몸 쪽 낮은 볼이 제구만 되면 이 타자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 왜냐하면 포심패스트볼에 계속 타이밍이 늦기 때문이다. 늦은 타이밍엔 공을 맞춘다 해도 먹힌 타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생각대로 그런 타구가 나왔다.
딱.
마성남이 친 공은 타자 앞에서 바운드를 크게 일으킨 후에 투수 키를 넘고 2루 베이스 앞에서 한 번 또 튀긴 뒤, 횡으로 달리며 글러브를 내민 유격수와 2루수 사이를 절묘하게 뚫고 중견수 앞으로 굴러갔다.
그사이에,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여유 있게 홈을 밟았다. 중견수가 한참이나 달려 들어와 받은 볼이어서 타이밍이 한참이나 늦었고 홈으로 던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4:3으로 역전.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투수를 올렸지만 이어지는 한국의 공격으로 추가 1실점을 하고나더니 눈에 띄게 사기가 처졌다.
한국은 구문철, 김오중, 안유민이 이어 던지며 7,8,9회를 1실점으로 막고 경기를 끝냈다. 8회에 김오중이 투아웃을 잡아 놓고 솔로 홈런을 맞은 게 옥의 티, 경기 스코어 5:4로 한국 팀의 신승이었다.
***
-한국 애들 제법인데?
-그래봐야 잘하면 트리플 A야.
-리그는 그럴지 몰라도 대표 팀은 달라. 푸에르토리코, 일본, 쿠바를 다 꺾었어. 솔직히 그 팀들은 mlb의 한 팀이라고 봐야할 실력이지. 그런 팀들을 계속 꺾었어.
-한국은 병역 면제가 있을 걸? 그래서 죽기 살기로 하지.
-아니야. 그건 옛날 말이야. 그런 거 없어.
-어쨌든 내일이 결승인데 투수는 누가 나오지? 미국의 화력은 무시무시해.
-일본전에 잘 던진 투수, 아니면 강속구 투수가 나오겠지.
-강속구?
-내 눈으로 봤어. 푸에르토리코랑 할 때 156이 찍히더라. 변화구도 수준급이고.
-의미 없어. 우린 무조건 우승이야. 콜드게임만 아니었으면 좋겠어.
-결승엔 콜드게임이 없을 걸?
한국은 포에르토리코를 이긴 여세를 몰아, 쿠바, 캐나다를 이기고 4강에 오른 뒤, 일본을 이기고 올라온 도미니카마저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당연히 미국.
물론, 내일로 다가온 미국과의 대결에서 한국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미국 팀은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스타들이 망라되었고 한국 선수들을 아는 전문가는 거의 없을 정도로 실력도 인지도도 차이가 뚜렷해 보였다.
미국 팀의 선발투수는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그리고 한국의 선발투수는 성낙기였다.
구장은 미국의 최남단에 있는 플로리다의 말린스 파크(Marlins Park). 37,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은 오전부터 인산인해였다.
마치 피크닉을 나온 듯한 느긋한 팬들은 가족 동반이 많았는데 이 경기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즐기느냐? 아시아의 변방에서 온 트리플A급 선수들이 mlb의 스타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것인가.
어차피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니 편안하게 맥주나 들이켜면서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보낼 심산이었다.
강속구로 유명한 스트라스버그의 공을 쳐내는 타자가 있는지도 관심사였으며 한국의 선발을 상대로 몇 개의 홈런을 쳐낼 것인가도 꽤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였다.
“드디어 우승의 날이 밝았습니다. 야구팬 여러분, 햇살 좋은 일요일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4년 전에 이어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미국 대표 팀과 한국 대표 팀의 경기, 무척 흥미롭죠?”
“매우 흥미롭습니다. 한국의 투수는 일본전에 던졌던 투수가 나왔네요. 구속으로 치면 푸에르토리코나 쿠바전에 나왔던 투수들이 더 강속구를 던지는데, 좀 의외의 선발투수입니다.”
“일본전에서 아주 잘 던졌기 때문이겠죠?”
“일본과의 경기에선 그랬죠. 변화구의 제구는 수준급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입니다. 푸에르토리코도 메이저리거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질적으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변화구도 타격 폼이 무너지면서도 홈런을 쳐내는 무시무시한 타자들을 상대로 몇 회나 버텨낼 것인가, 오늘 경기장에 오신 많은 팬들도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시아에서 여기까지 온 팀에 대한 예의입니다.”
경기장에 모인 모든 팬들의 생각도 대충 이런 식이었다. 3월 하순임에도 더운 날씨로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많았고 가족 동반 어린애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와 구단 유니폼을 입고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한국 더그아웃은 이런 경기장의 분위기와 달리 긴장한 선수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3만 7천의 만원 관중에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mlb의 구장에서 미국 올스타나 다름없는 선수들과 경기를 한다는 사실은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기에 충분했다.
“성낙기 준비 됐어?”
“그럼요, 준비는 오래전에 다 되었습니다.”
성낙기는 봉준구 투수 코치의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봉준구는 성낙기의 그런 태도를 보고 내심 놀랐다. 그 자신, 오래 전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뛰었고 WBC에 나가 많은 팀들과 경기를 치렀다.
그럼에도 강팀과의 경기는 항상 긴장되고 떨렸다.
그런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여유로운 듯 억지 미소를 짓기도 했었다. 한데, 애는 억지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도 떨리지 않는 모습이다.
언뜻 보면, 지가 경기에 나가는지 마는지도 모르는 놈 같다. 아예 아무 생각이 없는 얼굴 표정이라고나 할까.
“응, 그래? 알았다.”
봉준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자 머쓱하게 경기장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낙기가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미국 팀의 1번 타자는 디 고든. 본래 내야수였으나 많은 도루 등으로 체력 안배를 위해 중견수로 이동하고도 여전한 실력을 뽐내는 타자다. 일단 나가면 일을 저지르는 타자이므로 무조건 막아야 한다. 마성남은 힐끗, 디 고든을 올려다보았다.
“애가 디 고든? 보기엔 몇 발짝 뛰다가 넘어지게 생겼는데… 음… 하이!”
“What???”
“대충 치고 죽으라고.”
마성남은 성낙기에게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괜히 어설픈 스피드의 패스트볼로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낙기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포심패스트볼을 던져봐야 어느 정도 먹히는지 안다. 성낙기는 바깥쪽으로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