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59화 (59/188)

# 59

059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

“분하다.”

7회에 투구 수 제한으로 마운드를 내려온 쇼헤이가 스스로의 가슴을 찍으며 한 말이다. 아아, 그 공을 던지지 말았어야 했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몸 쪽으로 던진 슬라이더를 골프스윙 하듯 받아쳐 담장을 넘겨 버리다니. 쇼헤이가 김석문이라는 배드 배터(bad batter)를 너무 몰랐던 탓이었다.

나쁜 공을 곧잘 때려서 안타나 홈런을 만드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횡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을, 한 손을 놓으면서 안타를 만드는 능력은 물론이고, 뚝 떨어지는 공을 골프스윙으로 걷어 올리는 재주도 탁월하다.

선구안을 좁게 가져가서 스트라이크 존의 공만 친다면 3할은 거뜬히 넘을 타잔데, 처음부터 잘못 배운 버릇 때문에 2군을 전전해야 했다.

다행히 허봉호 감독과 박종태 타격 코치를 만났기에 1군에서 2할 8푼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던 터였다.

그런 배드볼 히터에게 무심코 던진 슬라이더는 담장을 넘어갔고 쇼헤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의 무명 투수가 워낙 잘 던졌기 때문에 1점도 커 보인다.

그리고 지금은 8회.

뜬금포 김석문의 홈런으로 기세가 오른 한국 타선이 니혼햄의 마무리 가가와를 연속 2안타로 두들기고 있다.

노아웃 1, 2루에 4번 타자 천강조가 들어섰고 일본은 투수를 교체했다. 천강조의 1루 땅볼 때 주자는 2, 3루 베이스를 밟았고 다음 타자는 거구 이중호.

오릭스버팔로스의 마무리인 니카무라는 피해가는 공을 던지다가 스리볼로 볼 카운트가 몰렸다. 그런 뒤 던진 4구도 바깥쪽 높은 곳에 걸치는 포심패스트볼이었다. 나름 제구가 잘된 공.

따악.

그러나 140km대 후반의 포심패스트볼은 이중호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이중호가 친 공이 우익수 키를 넘기고 펜스로 구를 때 2루 주자 여태호는 벌써 3루를 돌고 있었다.

8회 초, 경기 스코어 3:0.

더그아웃에 있던 일본 코칭스태프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또다시 투수 교체로 나머지 타자를 삼자범퇴 시켰으나 경기는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하아, 오늘에야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확실히 알았다. 뜬금포 한 방으로 분위기를 바꿔놓네.”

이종엄 타격 코치의 말처럼 김석문의 한 방으로 쇼헤이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 일본은 기가 죽었다. 그만큼 쇼헤이가 가진 이미지는 절대적이었다.

성낙기는 어쨌냐고? 성낙기도 7회에 꿋꿋이 마운드에 올랐고 일본의 4번 타자에게 전광석화(電光石火)를 연달아 던지며 자신에게도 150km대의 공이 있음을 알려준 뒤, 7회 원아웃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투구 수 64개.

‘……!’

일본 팀은 성낙기가 7회에 보여준 강속구를 보고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다. 저런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가 6회까지 140km대 초반의 공으로 자신들을 농락했다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성낙기에 이어 던진 연준후는 두 타자를 잡아 7회를 마쳤고, 8회에도 올라와 원아웃에 연속안타를 맞고 마운드를 구문철에게 넘겼다.

구문철은 올라오자마자 적시타를 허용, 3:1로 일본이 따라붙은 가운데 두 타자 연속 유격수 땅볼 아웃으로 8회를 마감했다.

“한 점을 따라붙었으니 9회엔 2점도 따라갈 수 있어요. 왜냐하면 무라타 선수가 선두 타자이고 이 선수가 후반에 강합니다.”

“네, 기백이 있는 선수죠.”

“칠 수 있는 공을 한국 투수들이 던지고 있어요. 9회가 끝나야 시합이 끝나는 것이고 사무라이라면 결코 포기는 없습니다. 이길 수 있다, 전 그렇게 봅니다. 8회에 한국이 해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본은 강합니다.”

일본 해설자의 말이 무색하게 일본타자들은 모연비퍼스의 마무리 투수 안유민에게 삼자범퇴 당했고 경기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허망한 결과 앞에 잠시 침묵하던 일본 해설진은 마지막 멘트를 날리는 것으로 패배의 쓴맛을 달랬다.

“이것이 야구죠. 강팀이 약팀에게 질 수도 있기 때문에요. 아직 팀워크가 다져지지 않은 결과라고 봅니다. 오타니 선수의 기백이라면 완봉이 쉽게 되는데요. 투구 수 제한이 아쉽네요.”

“네, 그러네요.”

“이걸로 정신 무장은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위로 올라가서 다시 만나면 좋겠네요. 한국 팀을 4강 정도에서 만나면 두 번 실패는 없다, 일본이 결국 해낸다고 봐야 하거든요.”

***

“이봐, 경기 어떻게 봤어?”

“매우 독특해. 특히 저 한국 투수는 종잡을 수가 없는 공을 던졌어.”

샌프란시스코 자인언츠의 스카우트 제프케인의 물음에, 마이애미 말린스의 스카우트 윌슨의 대답이다. 그는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성낙기를 보고 있었다.

한국 투수 중에

트리플A 급이라 평가 받는 타선,

정확히는 올스타 선수들을 모았으므로 메이저리그에 근접했을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타자들을 모조리 돌려세우는 투수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성낙기라는 투수는 스피드건에 찍히는 140km 초반대의 공만으로도 일본 타선을 농락했다.

“나도 믿기 어려웠네. 7회의 그 공은 도대체 뭐였지? 자그마치 152km가 찍혔어.”

“뭐긴, 6회까지 140km 초반대의 공으로 타자들을 가지고 논 거지. 150km를 던지는 투수가 힘을 아꼈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런데 힘을 줄인 그런 공으로도 타선을 잠재웠다? 난 이게 너무 놀라워.”

“포심패스트볼이 살아 들어왔고 라이징패스트볼로 보이는 공은 아예 솟구쳤어. 그뿐인가, 변화구는 던지지 못하는 구질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제구력도 기가 막혀. 당장 mlb로 데려오고 싶을 만큼.”

“아쉽지만 저 선수 이름은 성낙기인데, 이제 프로야구 1년 차야. 포스팅시스템은 아직 멀었어.”

“그래? 보기보다 젊은 선수였군. 휴~ 아쉽다. 일찌감치 다른 선수들을 알아봐야겠어.”

mlb 스카우트인 그들에게도 성낙기의 투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이애미의 윌슨은 그래도 뭔가 아쉬웠는지 성낙기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작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타급 메이저리거가 대거 출격했고 이례적으로 2주간의 합숙 훈련까지 한 A조의 미국 대표 팀은, 올림픽에서 NBA농구 스타들이 상대 팀을 가지고 놀았듯, 여럿의 메이저리거가 포함된 멕시코를 콜드게임으로 셧아웃 시켰다.

강자로 여겨지는 도미니카 역시 멕시코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는데 8:2의 경기 스코어가 말해주듯 강력한 타선 앞에 투수진이 붕괴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C조에서는 쿠바가, D조에서는 푸에르토리코가 호주와 베네수엘라, 이태리, 캐나다 등을 상대로 가진 역량을 마음껏 펼쳤다.

8강이 가려졌고 B조에서는 다수의 메이저리거가 포진한 네덜란드를 누르고 한국과 일본이 올라갔다.

일본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이 네덜란드를 제친 것은 mlb 전문가들 사이에서 약간 의외로 받아들여졌는데, 올림픽 전승 우승 등 국가대항전에서 특별한 성과를 내왔던 경기력을 돌이켜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태호와 천강조, 이중호가 포진한 클린업 트리오는 막강한 공격력을 과시했고 공이 까다로운 모연비퍼스 소속 이강천 투수 등이 호투한 결과였다.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시작되었고 한국이 속한 A조는 한국, 푸에르토리코, 쿠바, 캐나다가 올라왔다. 미국이 속한 B조는 미국, 도미니카, 일본, 호주가 올라와 각 조의 두 팀이 4강으로 가는 대진표가 짜여졌다.

***

그리고 한국은 오늘 강적인 푸에르토리코를 4강 문턱에서 만났다. 경기장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홈구장인 PNC 파크.

푸에르토리코는 주전 타자들이 모두 현역 메이저리거로 이루어져 있고 투수도 마찬가지인, mlb의 한 팀을 옮겨놨다고 해도 될 만한 팀이다.

거기에 한국의 선발 투수는 공성진, 8강으로 오는 동안 3이닝씩을 끊어 던지며 좋은 활약을 펼친 투수다. 푸에르토리코의 선발은 벨로 산티아고로 mlb에서 14승을 거둔 우완 투수.

한국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산티아고는 시속 157km에 이르는 빠른 강속구로 한국 타자들을 윽박질렀고 한국 타자들은 3회까지 무안타로 묶였다. 공성진 역시 잘 던져서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공성진 투구 수가 어떻게 되지?”

“3회까지 48구였습니다.”

“4회 막으면 잘 막겠구만, 누가 컨디션이 좋아 보여?”

“허덕수의 공이 괜찮아 보입니다.”

“좋아, 준비 시켜.”

허봉호 감독과 투수 코치 봉준구의 말대로 허덕수는 지난 시즌 한창 때에 가까운 140km 후반대의 구위를 되찾았다. 봉준구가 허덕수를 준비시키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순간,

따악.

경쾌한 타격음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경기장을 바라보니 배트에 맞은 공이 관중석으로 날아가고 있고 공성진은 고개를 숙이면서 땅을 고르고 있다.

푸에르토르코의 4번 타자 데라투르의 솔로 홈런, 이로써 0의 행진이 깨어지고 무언가 팽팽하던 긴장감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홈런 후에 공성진은 볼넷을 내줬고 다음 타자를 땅볼로 잡은 다음 다시 안타를 맞고 추가 실점했다.

-푸에르토리코가 이제 몸이 풀렸네.

-ㅇㅇ

-한국 뭐냐? 거기까지 놀러 갔나.

-ㅋㅋㅋ

-내 저럴 줄 알았다. 메이저리거한테 싱글A가 붙으니 상대가 되겠냐.

-공성진 바꿔야겠는데? 감독은 작전도 없고 가만 놔두는 게 작전이야? 마운드에 누가 올라가 봐야지.

-그런 거 알면 KBO감독이 아니지.

공성진은 그 다음 타자가 2루수 앞으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쳐주는 바람에 운 좋게 병살타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관중석은 썰렁했다.

미국 팬들은 한 수 아래로 여기는 푸에르토리코와 한국의 경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미국으로 넘어온 푸에르토리코 사람들과 한국 교포들만 시들한 응원을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같은 시각,

LA에서 펼쳐지는 미국과 일본의 경기엔 관람석의 3/2가 넘는 사람들이 들어찼다. 한국과 푸에르토리코의 경기는 어느덧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국은 허덕수가 2이닝을 1실점으로 막고 내려간 뒤 불펜을 가동했고 푸에르토리코도 현역 메이저리거로 구성된 불펜 진을 투입했다.

3:0으로 질질 끌려가던 한국은 7회 초에 선두타자 여태호가 볼넷으로 나가면서 기회를 잡았다. 이어진 공격에서 천강조가 스윙아웃을 당했고 이중호의 안타로 원아웃에 1, 2루의 찬스가 만들어졌다.

딱, 딱, 딱,

6번 타자 오장룡이 끈질기게 상대 투수를 괴롭혔고 빗맞은 3루 땅볼 때, 맨손으로 공을 잡으려던 3루수가 공을 떨어뜨려 원아웃에 만루의 찬스가 이어졌다.

한국으로서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 푸에르토리코는 투수를 내리고 아르딘 세페다를 올렸다. 지난 시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서 불펜으로 뛰며 5승 3패 23홀드 2.74를 기록한 정상급 투수였다. 묵묵히 경기장을 쳐다보던 허봉호 감독이 주심을 손을 들며 외쳤다.

타임!

“뭐야? 왜 갑자기 타임을 부르지?”

“대타를 내려는 모양인데… 김석문?”

“아니야, 일본전 땐 얻어걸렸지. 지금은 정교한 타자가 필요해.”

“아르딘 쟤, 작년에 158km까지 던졌어. 쉽지가 않아.”

“어?”

“어랏?”

“뭐야? 저 선수, 투수였잖아? 그런데 대타로 내는 거야?”

교포가 대부분인 한국 더그아웃 위의 팬들이 웅성거렸다. 허봉호 감독이 내보낸 대타가 아주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성낙기였다. 이종엄, 장종운 타격 코치는 허봉호 감독의 선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감독님, 성낙기를 대타로 내면 다음 회엔 대수비를 내보낼 겁니까?”

“아니, 성낙기가 좌익수로 간다.”

“네? 성낙기는 투수 아닙니까. 구멍이 생길 텐데요.”

“쟤도 수비 좀 해.”

“…….”

허봉호 감독의 말에 타격 코치들은 입을 다물었다. 합숙 훈련을 할 동안 성낙기도 외야 수비훈련을 간간히 했고 그건 당연히 이벤트성이거나, 외야로 날아오는 타구의 질을 직접 겪어보라는 감독의 배려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코치들이 입을 다무는 동안 성낙기는 배트를 붕붕 돌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걸 본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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