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56화 (56/188)

# 56

056화 한국시리즈 6

“에이, 시발.”

“아, 죄송합니다. 사인을 잘못 봤나. 포심패스트볼 던지라 했는데 업슛을 던지네.”

이두열은 정말 미안한 듯 머리를 약간 굽히면서 말했다. 마성남은 흔들어보려다가 자신이 당하자 열불이 나서 씩씩거렸다. 생긴 건 머리에 든 게 없어 보이는 놈인데 생각보다 약은 구석이 있다.

마성남은 한숨을 쉰 뒤, 방망이를 휘두르며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대략적인 패턴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타격 자세를 취했다. 구문철의 공이 날아왔다.

파앙.

스트라이크 아웃!

마성남의 예상과 달리 공은 정직하게 몸 쪽으로 들어와 박혔다. 몸 쪽으로 오다가 휠 것이라는 판단은 완전한 미스였다.

마성남은 3구 삼진으로 당한 것이 분했는지 이두열을 한 차례 흘겨본 후에 자기 뒤쪽으로 배트를 패대기쳤다.

“너, 뭐야. 어디서 꼬장을 부리고 있어.”

“…….”

주심이 마스트를 벗고 주의를 주자, 마성남은 배트를 주워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서는 헬멧을 바닥에 또 패대기쳤다.

어깨를 두드려 위로라도 해 주려던 선수들이 마성남을 슬금슬금 피했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젓는 선수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찍혔다.

“어, 저런 모습은 좀 그렇습니다. 지금 중계방송 중이거든요. 어린이들이 저런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불같이 화를 내는데요.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모연비퍼스입니다.”

해설자와 캐스터의 말처럼 마성남의 행동에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고 구문철은 나머지 두 타자를 내야 땅볼로 잡아내어 경기를 끝냈다. 이로써 시리즈 전적 2승 2패로 삼호슈퍼스타즈와 모연비퍼스는 호각을 이루었다.

그리고 삼호슈퍼스타즈의 팬들은 물론, 각종 미디어조차 놀라움을 나타냈다. 1차전에서 승리할 때만 해도 성낙기의 공에 적응을 못한 타자들의 방심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4차전을 8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자 성낙기의 독특한 공의 궤적은 이제까지 없었던 신의 마구라며 추켜세우기 바빴다.

***

“마단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모연비퍼스를 상대로 2승 2패라니.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아.”

“감사합니다. 허 감독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열심히 한 결과입니다.”

“허허허, 난 아경이가 허 감독님을 1군으로 모셔야 한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었지. 내 우리 허 감독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나 김현중이오.”

“네, 회장님. 허봉호입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날 밤, 삼호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 마영진 단장과 허봉호 감독은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봉 승(零封勝) 경기를 보고 기분이 급 좋아진 김현중 회장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자리.

그도 그럴 것이, 내심 1승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김현중 회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김아경을 2군 스카우트로 보낸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여자만 아니었으면 그룹을 그대로 이어받을 자질과 결단력을 고루 가지고 있는 김아경이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더니 요즘 내가 아경이에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2군에서부터 선수 수급을 어찌나 적재적소에 맞게 하는지… 이게 결국 그룹 일하고도 비슷하지요. 누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아이, 아빠. 그런 얘기는 저랑 있을 때 하세요.”

“그럴까, 하하. 내가 아경이 말이라면 아주 끔벅 죽는다오.”

“네, 회장님. 아가씨가 워낙 야구에 해박한 분이십니다. 허 감독님뿐만 아니라 코치들까지 그대로 1군으로 모셔 오리라고 누가 감히 생각했겠습니까.”

“아이 참, 단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허 감독님 계신데서… 저 얼굴 빨개졌잖아요.”

‘염병들 하고 있네. 피곤해 죽겄구만.’

“모연비퍼스는 여전히 강팀입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것입니다.”

허봉호 감독은 속엣말을 삼키고 이제까지는 운이 좋았다는 투로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낙기의 원맨쇼가 아니었다면 4전 전패를 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전력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렴, 쉬운 일이라는 게 없지요. 하나,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내친 김에 최고의 자리가 욕심나기는 합니다. 허허.”

김현중 회장은 한국 시리즈 진출과 4차전 중 2승 2패의 성적으로도 만족을 못하는 듯 우승을 들먹였다.

저런 끝없는 욕심이 자수성가의 발판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격려와 칭찬을 위한 자리의 성격에 맞지 않는,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그때부터 마영진 단장과 허봉호 감독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김아경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려 놓은 식사가 무색하게 부담만 잔뜩 껴안은 채 자리가 파했고, 5차전의 날이 밝았다.

“선발투수로만 보면 삼호슈퍼스타즈 쪽이 밀리는 감이 좀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모연비퍼스의 에이빌드런과 삼호슈퍼스타즈의 마크트웰의 대결인데요. 에이빌드런은 1차전에서 1:2로 패하긴 했지만 잘 던진 반면에, 마크트웰 투수는 2차전에서 5이닝 5실점으로 무너졌었거든요. 정규 리그 성적에 비하면 저조한 투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죠. 그만큼 모연비퍼스 타선이 강하다는 말도 될 겁니다. 한국 시리즈에서 모연비퍼스 타선을 틀어막은 선수는 성낙기뿐이었어요.”

“그렇군요. 어쨌든 오늘 경기 기대됩니다. 삼호필드파크에서 열리는 올해 마지막 경기에서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팀을 대표하는 두 외국인 투수끼리의 대결입니다.”

에이빌드런은 1회 초에 나오자마자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를 올렸다.

공에 힘이 있었고 150km가 넘는 강속구에 이은 슬라이더 승부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메이저리그 로스터에서 떨어지자 KBO로 온 케이스였는데 미국에서 들쭉날쭉하던 제구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게다가 변화구의 각도 훨씬 예리해졌다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KBO는 참 묘한 리그야.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기량이 여기만 오면 좋아진단 말이야.”

“그렇지? 아마 코치들이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서 세밀하게 체크하는 점이 mlb와 다를 거야. 거기에다 적응에 충분한 시간도 주지.”

“아무튼 에이빌드런의 공은 mlb 타자들과 상대할 가치가 있는 공이야.”

“글쎄, 그렇다고 보고해도 구단 수뇌부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 오늘도 재미있는 경기가 되겠어.”

mlb 스카우트들의 말처럼 에이빌드런은 mlb 진입 1순위였다.

페넌트레이스와 한국 시리즈 모두 인상적인 성적을 내고 있고 그는 입버릇처럼 때가 되면 mlb에 다시 가고 싶다고 말해온 터였다.

마크트웰 역시 정규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한국 시리즈 2차전의 투구 내용이 좋지 않아서 관심에서 조금 멀어진 상태.

올해 마지막 등판인 두 투수가 강한 집중력과 의욕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는 이유도 스카우트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상대 타선을 잠재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승리투수라는 이름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1회 말의 마크트웰의 공은 에이빌드런 못지않은 위력이 있었다. 2차전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1회부터 전력투구였다. 그 결과,

“스윙 아웃입니다.”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 마크트웰 투수 2차전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파울플라이 아웃! 아, 양 팀 투수들의 공을 공략하지 못하는 타자들, 마크트웰 투수 1회를 깔끔하게 막아냅니다.”

1회부터 전력으로 투구하는 에이빌드런과 마크트웰은 5회까지 실점 없이 던지고 있었다. 두 투수 모두 올해의 마지막 등판에 후회 없는 공을 던졌고 타자들은 덧없이 물러났다.

5회까지 0:0의 스코어.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에이빌드런이 5회까지 68수를 던지며 거의 완투 페이스로 가고 있는데 반해, 마크트웰은 산발 6안타 볼넷 2개를 기록하며 91구를 던졌다는 것이었다.

“투구 수가 좀 많은데요.”

“대안이 없어. 조금 더 두고 보자고.”

이계현 코치의 말에 허봉호 감독의 대답이었다.

불펜에서 안민기가 몸을 풀고 있고 2차전에 스윙맨으로 잘 던졌지만 6회부터 투입은 빠르다. 선발이 6회까지는 막아줘야 그런대로 계산이 선다.

마크트웰 역시 아직은 그만 던질 마음이 전혀 없었고 6회에도 변함없이 마운드에 섰다. 120구를 대략적인 한계로 삼는다고 할 때 아직 30구 가까이 남았고 경제적인 피칭이 된다면 7회까지 던진다는 생각이 마크트웰의 머리에 가득했다.

물론, 그 전에 타선이 분발해서 1점이라도 뽑아주면 더 좋겠지.

따악.

“아, 2루타입니다. 초구를 공략해 좌익수 키를 넘깁니다.”

“6번 타자 미카엘오르티스 선수 노리고 들어왔어요. 마크트웰 선수가 초구에 포심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로 던지는 경우가 많다는 걸 계산한 배팅입니다.”

노아웃 2루의 찬스를 잡은 모연비퍼스의 더그아웃이 시끌벅적해졌다.

허봉호 감독의 기대와 달리 마크트웰이 던진 몸 쪽 포심패스트볼은 타자가 치기 좋게 가운데로 몰렸고 미카엘오르티스는 주저 없이 배트를 돌렸다.

모연비퍼스로서도 오늘 경기 중 가장 좋은 찬스를 맞았다. 다음 타자 우익수 주영진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번트 자세를 취했다.

에이빌드런의 체력으로 보아 9회까지 던지는데 무리가 없는데다가 볼 끝도 아직 살아 있다. 여기서 1점 이상 득점하면 그만큼 승리 확률이 높다.

‘빠지는 볼을 던지라고?’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포수의 사인을 보던 마크트웰이 낮게 중얼거렸다. 쉽사리 주자를 3루에 보내지 않겠다는 벤치의 작전인데, 초구에 대한 타자의 대응을 보겠다는 거였다.

만약, 스트라이크 존에서 빠지는 공에 번트가 나오면 파울 확률이 높고, 그렇지 않더라도 타자가 어떤 마음으로 타석에 임하는지 알 수 있다.

마크트웰은 바깥쪽 높은 코스로 포심패스트볼을 뿌렸다. 타자가 조급한지 바로 번트를 했다.

탁.

데그르르르.

삼호슈퍼스타즈 벤치의 의도대로 타자 주영진은 볼에 번트를 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바깥쪽 볼에 배트를 쭉 빼면서 댄 번트는 1루 쪽 파울라인을 구르면서 밖으로 나갈 듯 나가지 않았고 2루 주자는 여유 있게 3루 베이스에 들어갔다.

마크트웰은 급히 공을 잡아 타자를 아웃시키는데 만족해야 했다.

원아웃 3루의 득점 찬스. 타석엔 8번 타자인 포수 마성남이 들어섰다.

그동안 쌓아 올린 명성에 못 미치는 한국 시리즈 성적에 매우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1차전도 그렇고 4차전에서도 성낙기에게 당한 것이 컸다.

‘짧고 간결하게… 공을 끝까지 본다.’

마성남은 스스로에게 되뇐 뒤 연습 스윙을 몇 차례 하고는 숨을 골랐다. 마트트웰이 연속 두 개의 볼을 던지고 나서 생각대로 안 들어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90구를 넘기고부터 공의 위력도 떨어졌지만 흔들리는 기색이 보인다. 그런 뒤 던진 3구 슬라이더를 마성남이 받아쳤다.

몸 쪽으로 오다가 가운데로 휘면서 떨어지는 슬라이더는 배트에 정확하게 맞아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그렇게 1실점을 하고 다음 타자와 실랑이 끝에, 깊은 유격수 내야안타로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타임!”

허봉호 감독이 타임을 불렀고 마운드엔 마크트웰 대신 안민기가 올라갔다. 그런데 결과적으론 안민기의 교체 투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안민기는 1번 타자 조창래를 맞아 2차전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원아웃 1, 2루에서 큼지막한 3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주자가 모두 들어오며 3실점 째를 허용했고 추가 1실점을 더 내주고 나서야 겨우 이닝을 끝냈다.

“에이, 뭐야. 순식간에 경기가 기울었어.”

“저리 쉽게 얻어 터지냐.”

“저 타선을 막아낼 투수는 성낙기뿐이야.”

“모레부터 잠실인데 안 되겠네.”

“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봐야지.”

실망한 팬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이미 승부가 난 게임이라고 판단한 허봉호 감독은 그동안 쓰지 않았던 불펜을 투입한 끝에 0:9로 경기를 내줬다.

에이빌드런의 완봉승.

시리즈 전적 2승 3패인 채로 6, 7차전은 모연비퍼스의 홈인 잠실 경기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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