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055화 한국시리즈 5
필 서든에 이어 모연비퍼스의 투수 김재선이 마운드에 올랐다. ERA 0.312에 13승 8패가 말해주듯 수준급 투수였다. 그러고 보면 모연비퍼스는 에이빌드런과 필 브라이드, 이강천과 김재선으로 이어지는 4선발이 모두 10승을 넘어섬으로 모연비퍼스가 왜 강팀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5선발인 소찬성이 9승에 머물지 않았다면 선발 전원이 10승 이상을 하는 드문 기록이 만들어질 뻔했다.
김재선은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와 커브를 주 무기로 하는 선수. 포심패스트볼 구속은 140km대 중반에 머물렀지만 직구처럼 날아오다가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에 많이들 당하곤 했다.
그리고 1회 말,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상황에서 이정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한국 시리즈 들어 유독 손맛을 보지 못한 이정우의 시리즈 타율은 0.256으로 페넌트레이스 0.323에 27도루의 위용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따악-
그런 이정우가 김재선의 2구를 노려 쳐 중견수 앞 안타를 만들었다. 1구로 던진 몸 쪽 커브가 스트라이크로 판정을 받은 뒤, 다음 공인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이 가운데로 약간 몰렸는데 이정우가 놓치지 않았다.
“위기 뒤의 찬스라고 했던가요? 이정우 선수, 김재선 투수의 포심패스트볼을 제대로 맞춰냅니다.”
“공이 가운데로 좀 몰렸어요. 이게 파울이라도 되면 투 스트라이크에서 주 무기인 슬라이더로 타자를 충분히 요리할 수 있거든요. 볼 카운트가 몰리기 전에 적극적인 배팅이 주효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시리즈 내내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오늘은 첫 타석부터 치고 나가네요.”
“음… 모연비퍼스의 1, 2, 3 선발이 모두 강속구를 지닌 투수들이거든요. 제가 시즌 중에도 지적을 했었지만, 이정우 선수의 약점이 바로 강속구입니다. 게스히팅을 할 때는 타이밍만 잘 잡으면 되는 반면에, 그게 되지 않을 때는 결국 배트 스피드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김재선 투수의 스피드는 이정우가 딱 치기 좋은 그런 스피드예요. 페넌트레이스 맞대결도 0.365로 이정우 선수가 아주 잘 쳐냈죠.”
“그렇군요. 삼호슈퍼스타즈가 1회 말부터 좋은 기회를 잡습니다.”
2번 타자 이한영은 착실하게 번트를 댔고 1루 주자 이정우를 2루로 보냈다. 일단 선취점이 팀 사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허봉호 감독의 의중이 잘 묻어나는 대목이다.
주자를 득점권에 두고 3번 타자 엔서니페킨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엔서니도 시리즈 성적이 페넌트레이스에 못 미친다.
상대 투수가 강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자기 스윙이 무너져 시원스러운 장타를 날리지 못했다.
타석에 들어선 엔서니페킨스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페넌트레이스에서는 밥값을 했다지만 가장 중요한 한국 시리즈에서 죽을 쓰고 나면, 몸값이 떨어짐은 물론 다음 시즌 계약도 못한 채 방출될지도 모른다.
KBO 리그에서 시즌 내내 잘하다가도 한국 시리즈 들어서 졸전을 펼치고 재계약이 무산된 사례들을 엔서니페킨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후욱, 집중하자.’
엔서니페킨스는 스스로에게 되뇌며 투수의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 1구가 날아왔을 때,
휘잉.
스트라이크!
헛스윙을 하고는 자책하듯 헬멧을 두드렸다. 몸 쪽 치기 좋은 높이로 들어오던 공이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며 떨어졌다.
2구는 포심패스트볼이 바깥쪽 높게 들어온 볼이었고 3구는 다시 슬라이더를 던졌으나, 이번엔 엔서니페킨스가 참아냈다. 그러고 나서 맞이한 4구는 커브볼이었는데 몸 쪽으로 오다가 뚝 떨어졌다.
따악.
“아, 라인드라이브로 쭉쭉 뻗어가는 공입니다.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 성 타구! 2루 주자 이정우 홈으로 들어오고 타자는 2루까지 살아나갑니다. 2루타!”
“엔서니페킨스, 모처럼 좋은 타격을 했습니다. 뚝 떨어지는 커브를 골프를 하듯이 걷어 올려 버리네요. 삼호슈퍼스타스, 오늘 출발이 아주 좋은데요?”
이정우가 홈을 밟고 들어오자 삼호슈파스타즈 선수들은 마치 끝내기 홈런 친 선수를 대하듯 이정우를 격하게 환영했다.
더불어 선수들마다 오늘은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활활 타올랐다.
투수가 성낙기인 데다 상대 투수는 그런대로 해볼 만한 김재선이고 1차전 선발이었던 에이빌드런은 내일이나 등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점수를 벌려 놓으면 불펜 필승조를 투입할 리도 없으니 어차피 오늘 나오는 투수들은 충분히 두들길 수 있으리라는 게 모두의 생각이다.
그러니 1회부터의 득점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이중호 역시 김재선이 스리 원에서 던진 포심패스트볼을 두들겨 우익수 앞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사이, 엔서니페킨스는 홈으로 들어왔다.
다음 타자 구종욱이 다시 안타를 쳐내어 무사 1, 2루가 되었고 지명타자 하진수의 1루 땅볼 아웃, 원아웃 주자 2, 3루에서 김석문의 깊은 중견수 플라이 때,
이중호가 다시 홈을 밟았고 후속타 불발로 이닝이 넘어갔지만 1회부터 3:0의 스토어로 산뜻한 출발을 알렸다.
그리고 성낙기는 2회부터 상대 타선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며 7회까지 5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눈앞에 뒀다.
***
“팀장님, 오늘도 성낙기가 승리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2승 2패인데, 이제 만약 불펜으로라도 나와서 1승을 더 추가하기라도 하면 3승이 되는 것 아닙니까. 3승하면 풀어달라고 했다면서요.”
홈 플레이트 뒤의 지정석에서 마영진 단장이 김아경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섣불리 약속 비슷하게 해버린 김아경을 다소 책망하는 듯한 말투다.
“오늘 이후로는 성낙기 선수에게 선발 기회는 없어요. 불펜으로 나온다고 해도 승리가 어디 그리 쉬운가요? 자신이 던지고 있을 때 역전이라도 해줘야 가능한 얘기죠.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선수입니다. 솔직히 성낙기가 팀을 한국 시리즈까지 견인하는 데 가장 역할이 컸습니다. 저런 선수를 풀어줘 버리면 이번 시즌 같은 기적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아뇨. 허봉호 감독님이라면 하실 수 있어요. 성낙기 투수 하나 없다고 무너지면 팀이라고 할 수도 없죠.”
“그 말씀은……?”
“때에 따라서는 풀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mlb에서 이름을 날린다면 삼호슈퍼스타즈의 위상도 올라가죠. 다년 계약을 한 뒤에 다시 삼호로 오는 조건 정도는 있어야 하겠고요. 어쨌든 지금은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일단 시리즈가 끝나고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
마영진 단장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을 닫았다.
저런 투수 하나 키워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생짜로 그냥 보낸단 말인가. 팀의 에이스로 올라선 선수를, 그것도 1년 차 신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보낸다고?
mlb에서 통할만한 선수라면 누구든 보내겠다는 말이 아니고 뭔가.
그렇게 따지면 삼호슈퍼스타즈는 그럼 mlb에 선수를 수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팀이란 말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단장인 나에게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지 맘대로 선수를 보내? 생각할수록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다.
언젠가, 마영진 단장과 허봉호 감독이 있는 자리에서 성낙기가 김아경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었고 완전한 또라이의 말로 일축해 버리고는 단장실에서 내쫓았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mlb가 아니라 mlb 할아비라도 보내준다고. 그러니 미친 소리 고만하고 공이나 던지라고.
옛설.
성낙기는 단장실을 나가면서 제 말을 접수했다고 여겼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지.
그땐, 그게 다 농담이었는데 똑같은 말을 김아경은 진짜로 받아들였고 만약 3승을 하면 mlb에 보내준다는 거다.
마영진 단장은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3승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마영진 단장은 혼자 계산을 해보았다.
오늘 4차전까지 양 팀 전적이 2승 2패로 끝난다고 보면 내일은 누가 이기든 6차전까지 가게 되어 있다. 두 팀의 전력 상 6차전에 끝난다면 승자는 모연비퍼스가 유력할 것이고 삼호슈퍼스타즈는 잘해야 7차전까지 가서 물고 늘어질 것이다.
1차전 등판 후, 3일 쉬고 오늘 다시 던지는 성낙기의 로테이션을 생각하면 7차전엔 성낙기가 나온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7차전에서 혹시라도 승리하면 말도 안 되는 우승을 해버림과 동시에 성낙기도 보내줘야 한다는 것인데,
‘아, 머리 아파. 어쩌다가 저런 꼴통이 튀어나와 가지고 별걸 다 신경 쓰게 만드네.’
마영진 단장의 스트레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아경은 8회 말에도 올라온 성낙기를 보고는 싱글벙글했다. 보면 볼수록 희한하다.
2군에서 120km대를 던지더니 어느새 140km대의 공을 던지는 불가사의한 투수, 오늘 경기를 승리하면 막강 모연비퍼스를 상대로 2:2 동률이 된다.
꿈으로나 생각했던 일들이 자신이 스카우트 팀장을 맡자마자 현실이 되고 있으니 기분 나쁠 턱이 없다. 게다가 요즘 언론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김아경이라는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
-삼호슈퍼스타즈의 김아경 스카우트 팀장이 알고 보니 김현중 회장의 셋째 딸로 밝혀져 화제다. 일찌감치 높은 위치에 올라 그룹의 경영 수업을 받는 보통의 재벌 2세와 달리, 야구광으로 알려진 그녀는 삼호슈퍼스타즈의 스카우트 팀장을 자원했다는 후문. 마영진 단장과 함께 2군에서부터 선수 수급에 적극적이었고 현재 1군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이고 있는 성낙기, 이중호, 구문철, 안민기 등의 재목을 발굴했다고 한다. 특히 구문철 투수의 경우, 일본 독립리그에서 스카우트해 올 정도로 팀을 위해서는 열일을 마다 않는 모습으로… 중략… 프런트의 노력이 얼마나 팀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인다.
-김아경, 재밌는 캐릭터네.
-역시 비싼 외국인 선수들이 온 이유가 있었어.
-성낙기도 저 여자가 데려온 거야?
-선수 보는 안목이. ㄷㄷㄷ
-대단한 여자네. 사귀고 싶다.
-얼굴도 예쁘다. 모델 해도 되겠다.
-야구에 미친년이래.
성낙기는 8회를 무실점으로 막고 구문철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8회 초에 1점을 추가해 스코어 4:0으로 삼호슈퍼스타즈의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허봉호 감독은 8회까지 87구만을 던진 성낙기를 내렸는데 4점 차이면 구문철이 충분히 막을 거라는 계산과 6차전까지 가게 되면 성낙기를 불펜으로 쓰려는 생각이 더해진 결정이었다. 9회 초는 삼호슈퍼스타즈의 삼자범퇴로 끝났고 모연비퍼스의 9회 말 마지막 공격은 8번 타자인 포수 마성남부터였다.
“야, 니들 시리즈 우승하려고 하냐? 어지간히 해라.”
“못할 것도 없죠.”
마성남의 말을 이두열이 맞받았다.
“애 봐라. 아주 간댕이가 부었구만. 길만이 대신 주전 꿰차니까 봬는 게 없지?”
“좋은 공 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마성남은 포수인 이두열을 흔들면서 내심 정면 승부 위주의 승부를 바랐다.
공이 140km 초반에 머무는 구문철의 공은 생각보다 변화가 좋아서 유인구에 말려든 적이 여러 번이다. 하지만, 정면 승부라면 나름 해볼 만한 구위라고 생각했다. 투수에게는 말이 닿지 않으니 포수라도 흔들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참이다.
파앙.
휘잉.
그러나 구문철의 초구에 헛스윙을 한 마성남은 이두열이 자신의 꾀에 전혀 놀아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사인으로 낸 것이다. 포심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마성남은 공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 이 새끼가 선배를 가지고 노네. 초구부터 유인구 질이냐?”
“유인구 싫어하시면 정면 승부 갈게요.”
2구는 정말 치기 좋은 코스의 몸 쪽이었다. 높이도 알맞다. 마성남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냅다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허공을 가르는 배트의 바람 소리뿐, 공은 마지막에 솟아오르며 자신에 어깨 높이에 꽂혔다. 구문철이 후반기 들어 주 무기로 사용하는 업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