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054화 한국시리즈 4
모연비퍼스의 선발은 김재선으로 올해 13승 8패 ERA 3.12를 찍었다. 김재선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FA가 되기 때문에 기량을 보려고 NPB와 mlb 스카우트들이 관람석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필 서든이야 1년 계약이니 기량만 좋다면 언제든 영입이 가능하고 예비 FA 김재선까지 살필 수 있다. 김재선은 140km 대 중반의 공을 던지며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다.
공을 숨기는 동작이 좋아서 타자들은 슬라이더에 맥없이 물러나는 경우가 잦았고 mlb 스카우트들의 관전 포인트 역시 바로 그 슬라이더였다.
mlb 스카우트들은 김재선을 불펜 투수 자원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선발을 맡기에는 공이 느리고 4일 휴식 후, 던져야 하는 살인적인 일정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다만, 좋은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라면 1이닝 정도는 막을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
1회 초, 필 서든이 마운드에 올랐다. 1번 타자는 한국 시리즈 들어 3할 5푼을 치고 있는 조창래였다.
필 서든은 조창래가 자신 있어 하는 몸 쪽을 버리고 철저하게 바깥쪽을 공략했다. 워낙 좋은 타자인 만큼 스트라이크 존을 최대한 넓혀서 공을 하나, 둘 넣었다 뺐다 하면서 예상외의 구질을 선택하는 데 집중했다.
초구부터 커브를 던져 스트라이크를 잡았고 2구 역시 슬라이더를, 3구째는 몸 쪽 높은 공을 하나 보여준 다음, 다시 커브를 던졌다.
조창래는 내심 포심패스트볼을 기다렸지만 원하는 공은 오지 않았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몸 쪽 높은 유인구를 포심패스트볼로 던졌을 뿐이다. 그런 뒤,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연속 세 개의 변화구를 커트해 냈다.
첫 타자와 실랑이를 하다 보니 어느덧 풀 카운트가 만들어졌고 그 후에도 조창래는 커트를 거듭했다. 그리고 필 서든이 던진 12구째의 공이 볼이 되면서 1회 초 선두 타자 볼넷을 허용했다.
필 서든은 서늘한 날씨에도 땀을 닦았고 자신의 투구를 자책하듯 하늘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창래는 1루에 나가서도 리드를 크게 벌리며 필 서든의 신경을 자극했다.
“저 자식을 내보내는 게 아니었어. 더럽게 깐족거리네.”
필 서든은 뛸 듯 말 듯 몸의 중심을 이동해 가며 2루를 노리고 있는 조창래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여튼 KBO 야구는 적응이 잘 안 된다.
1루만 나갔다 하면 뛰려는 놈도 많고 포수는 포수대로 어께가 약해서 주자를 곧잘 살려준다. 도루를 내주지 않으려면 투수가 최대한 방어하는 수밖에 없다.
셋 포지션을 최대한 빨리 해야 그마나 도루자의 가능성이 생긴다. KBO의 타자들은 왜 또 그리 끈질기게 커트를 해가면서 볼넷만 노리는지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다.
대부분 호쾌하게 자기 스윙을 하는 mlb와 달리 조금만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다 싶으면 기다리고 보는 야구,
그래서 루킹 삼진도 많지만 그보다 먼저 투수를 질리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성질 급한 투수는 버티기 힘든 야구를 한다.
“shit.”
필 서든은 속으로 욕을 하며 다음 타자를 맞이했고, 예상대로 조창래는 2루 도루를 감행하여 성공했다.
바로 그때부터 피 서든의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번 타자도 실랑이 끝에 볼넷으로 살아나갔고 이계현 투수 코치가 더그아웃에서 나와 마운드로 향했다. 통역이 따라왔고 포수 이두열도 마스크를 올리고 마운드로 달려왔다.
“필 서든, 마음을 가라앉혀. 한두 점 내줘도 괜찮으니까 타자에만 집중해.”
“OK, OK!”
필 서든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삼호슈파스타즈 관중들은 필 서든을 연호하면서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찬스는 계속 이어졌다.
3번 타자 민경호의 평범한 3루 쪽 번트에 필 서든이 3루수 이한영에 앞서 타구를 잡으면서 공을 한 번 놓친 뒤 1루에 뿌렸으나 간발의 차로 타자가 살아버렸다.
필 서든이 자책하듯 글러브를 땅에 패대기쳤고 주심의 경고가 이어졌다. 급격히 흔들리는 필 서든을 보면서 이두열이 다가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필 서든이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콜을 안 했다는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 볼 배합이 안 좋았다는 건가?’
이두열이 몸을 되돌려 배터 박스로 들어왔고 노아웃 만루의 황금찬스에 모연비퍼스의 다음 타자는 천강조였다.
“더 이상은 안 돼. 이미 평정을 잃었어. 타임!”
허봉호 감독이 타임을 불렀고 이계현 투수 코치는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던 성낙기를 가리켰다. 노아웃 만루의 커다란 위기이기는 해도 1회인 데다 시즌 13승이나 거둔 투수를 내린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만큼 성낙기를 믿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교체였다. 허봉호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가 손을 내밀자 필 서든은 한사코 공을 내놓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였고 이렇게 맥없이 물러나면 두고두고 가슴이 쓰릴 것이다.
“이봐, 필 서든 오늘만 날이 아니야. 기회는 또 있어.”
***
그렇게 필 서든이 물러나고 성낙기가 마운드에 섰을 때,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은 구세주가 등장한 것처럼 높은 함성을 질러댔다.
성낙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공을 넘겨받고는 허봉호 감독이 지켜보는 앞에서 몇 개의 연습구를 던졌다.
“야, 성낙기. 여기서 1점이라도 내주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알았어?”
“하아, 참. 감독님도. 여기서 어떻게 점수를 안 줘요. 상황을 보고 말씀을 하셔야지요.”
“시끄러. 막으라면 막아.”
“위기에 올라온 투수에게 그렇게 부담을 주는 건 명장의 도리가 아니죠.”
“저 소리 들리지? 팬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건 배신이다.”
허봉호 감독은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이상하게 성낙기에게는 감독다운 말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교체를 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이런 위기일수록 더 힘을 내는 투수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위기에 올라가서 막아내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투수와는 달리 부담을 팍팍 주면 더 잘 던진다는 묘한 믿음도 있다.
‘흐흐, 또 너냐? 1차전의 홈런은 잊지 않았겠지.’
천강조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1차전 때 비록 마지막 타석에서 루킹 삼진을 당했지만 홈런을 하나 쳤고 라이너성 타구도 만들어 냈었다. 집중하면 못 칠 공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노아웃 만루로 투수가 도망갈 틈도 없다.
무조건 정면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투수가 위력적인 공을 던지기 힘들다. 다구나 폭투의 위험까지 있는 변화구 사용도 제한된다.
그러므로 천강조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팡.
라이징패스트볼(6cm/10cm).
스트라이크.
천강조는 몸 쪽으로 낮게 깔려오다가 갑자기 솟아오르는 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몸만 움찔했다. 1차전 대결에서 성낙기가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위주의 볼 배합을 가져갔기에 초구의 라이징패스트볼은 낯설었다. 성낙기는 다시 한 번 바깥쪽으로 라이징패스트볼을 던졌다.
따악.
파울.
배트 밑동을 때리는 바람에 파울이 되기는 했지만 라이징패스트볼의 솟아오르는 궤적에 맞춰 타격을 하는 천강조는 역시 보통 타자가 아니다.
성낙기는 고심했다. 여기서 어떤 볼을 던질 것인가.
천강조는 1차전에서도 그랬듯 포심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추면서도 변화구에 잘 대응하는 타자였다.
그의 시즌 타율이 0.297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임기응변도 뛰어나다. 공의 스피드가 150km를 넘어간다면 슬라이더나 체인지업 등의 변화구가 탄력을 받겠지만,
최대 143km의 스피드로는 변화구의 효과가 반감된다는 것을 성낙기는 깨달았다. 결론은 하나.
“전광석화(電光石火).”
팡.
휘잉.
“스트라이크 아웃!”
150km의 강속구가 바깥쪽 낮은 코스를 찔렀고, 천강조는 배트를 헛돌렸다. 이번 공 역시 솟아오를 거라 예상했지만 공은 스트라이크 존의 가장 낮은 곳을 통과해 버렸다.
주심이 주먹을 쥐고 앞으로 쭉 내뻗고 거둬들이면서 삼진을 선언했다.
강타자 천강조를 삼진으로 잡아내자 삼호슈퍼스타즈의 더그아웃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관중들은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응원 소리의 데시벨을 높였다.
성낙기는 강타자를 삼진으로 잡았음에도 마치 당연한 일인 양 로진 백을 만졌다.
타자 하나 잡았다고 들뜰 때가 아니다.
다음 타자 추진규가 어쩌면 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즌 타율 0.301에 27홈런으로 타율은 천강조보다 낫다.
안타 하나면 2점이 나는 상황에서 홈런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성낙기는 바깥쪽 약간 높은 포심패스트볼로 배트를 유도했다.
팡.
볼.
선구안이 좋다. 성낙기는 2구로 라이징패스트볼을 던졌고, 스트라이크를 직감한 추진규가 배트를 휘둘렀으나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공 두 개 정도 벗어날 만큼 위로 꽂혔다.
그런 다음 성낙기는 승부를 걸었다.
치기 좋은 코스로 날아오는 몸 쪽 투심으로. 포심패스트볼과 속도가 별로 차이나지 않는데다가 몸 쪽으로 정직하게 들어오는 공에 추진규는 망설임 없이 배트를 돌렸다.
따악.
배트에 맞은 공은 전진 수비를 펼친 유격수 이정우의 정면으로 굴러갔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2루 포스아웃, 2루수 김석문이 1루 주자의 슬라이딩을 피하며 떠올라 1루로 공을 뿌렸다. 타자는 이를 악물고 뛰어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공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1루심이 잠시 망설이다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아웃!”
“성낙기 투수, 또 일을 냅니다. 노아웃 만루에서 모연비퍼스의 클린업트리오를 잠재워 버립니다. 아,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퍼포먼스입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강타자 천강조를 삼진으로 잡더니 지명타자 추진규마저 병살타로 돌려세워 버렸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변화구에 제구력, 가끔이지만 150km의 강속구까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죠?”
“신인에 불과한 선수가 이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례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워 피처라고 할 수 없는데도 모연비퍼스 타자들이 전혀 공에 적응을 못 합니다.”
[위기 상황 처리 보너스가 지급됩니다]
[체력이 (80/100)으로 오릅니다]
[세기의 강속구가 (79/100)으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69/100)으로 오릅니다]
성낙기가 이닝을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올 때 눈앞에 글귀가 떴다. 참으로 오랜만에 뜨는 스탯의 증가였다.
2군에 있을 때, 아니, 1군에 처음 진입할 때만 해도 체력 때문에 고전했었는데 이젠 80구를 전력투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셈이니 6, 7회까지는 충분히 막을 무기가 생긴 셈이다. 변화구의 강약에 따라서는 9회 완투도 가능하다.
성낙기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며 동료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스포츠가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하는구나, 싶어 새삼 자신에게 자부심이 느껴졌다.
***
-성낙기가 또 해낸 것 맞지? 와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완전 철의 심장이다. 어떻게 쟤는 위기가 오면 더 잘 던지냐.
-한마디로 미쳤다.
-와우!
-거기서 병살… 크하하… 오늘부터 내가 네 아들이다.
-성낙기 나왔으니 오늘 이기는 거?
-기적의 투수다.
-약이라도 한 거냐? 무사 만루에서 저게 말이 돼?
-약은 ㅅㅂ 네가 처먹었겠지.
포털 사이트에도 성낙기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대부분 믿기 어려운 결과라는 반응이었는데 그 상대가 모연비퍼스가 자랑하는 천강조와 추진규라는 점에서 놀람은 더 컸다.
허봉호 감독은 자신의 교체가 옳았다는 걸 증명해 준 성낙기의 어깨를 툭 쳐서 고마움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