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053화 한국시리즈 3
“반드시 이겼어야 할 경기를 놓쳤어. 도대체 성낙기라는 놈은 어디 처박혀 있다가 튀어 나온 거야. 투수로 못 던지는 공이 없고 뛰어나다는 건 인정한다 쳐도 타격은 뭐야. 어떻게 에이빌드런의 공을 그렇게 쳐내는지 정말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KBO에 희귀종이 나타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즌 중에도 타격을 곧잘 하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한국 시리즈에서 에이빌드런의 공을 두들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앞으로가 걱정이야. 1차전 승리 팀이 우승할 확률이 70%가 넘어. 더 큰 문제는 삼호의 외국인 투수들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는 거지.”
“삼호가 선발은 좋습니다만, 타격은 약한 팀입니다. 성낙기 혼자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 이강천 컨디션 점검하고 선수들 소집 시켜줘. 아무래도 정신교육이 필요하겠어.”
모연비퍼스 김정환 감독은 선수들을 소집 시켜 한국 시리즈에 임하는 각오와 꼭 이겨야 하는 이유 등을 주제로 일장 연설을 한 후에 숙소로 돌아와, 코치들과 동영상을 보면서 내일 삼호슈퍼스타즈의 선발로 내정된 마크트웰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그리고 2차전의 날이 밝았다. 경기 시간은 오후 6시였다.
김정환 감독은 선수들과 동영상을 함께 보며, 어젯밤 코치들과 연구한 마크트웰의 공 배합과 셋 포지션의 약점 등을 선수들에게 주지시켰다.
잠실 경기장은 어제에 이어 연속 매진이었다. 경기장 밖에 암표상들이 득시글할 정도로 2차전 경기의 인기를 하늘을 찔렀다.
모연비퍼스가 1차전에서 진 것이 뜻밖이었던 데다가 성낙기라는 희대의 캐릭터가 흥미를 배가시켰다.
그런 흥분 속에서 경기는 시작되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성낙기는 싱킹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삼는 이강천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행크아론의 타격 재질과 실력이 몸에 들어왔지만 싱킹패스트볼의 궤적은 아무래도 낯설었기 때문에 4타수 1안타에 만족해야 했다.
지난 시즌 14승 5패 ERA 2.77의 토종 에이스 이강천은 성낙기뿐 아니라 삼호슈퍼스타즈 타자들을 맞아 호투했다. 반대로 마크 트웰은 1회부터 점수를 주기 시작하더니 5이닝 5실점을 한 뒤, 불펜에게 공을 넘겼다.
안민기가 3이닝 동안 1실점으로 잘 막았지만, 8, 9회에 나온 추격조가 무너지면서 승부의 추는 완전히 기울었다. 삼호슈퍼스타즈의 2:10 패배. 한국 시리즈 2차전은 그렇게 힘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끝났다. 이두열의 7회 투런포가 아니었다면 영봉 패를 당했을 것이 분명한 졸전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모연비퍼스의 홈인 잠실에서 1승 1패의 기록은 삼호슈퍼스타즈로서는 성공적이라 할 만했다. 최강 팀을 맞아 2연패를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만년 하위 팀이 말이다.
2차전이 끝난 다음 날,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단은 강릉의 삼호필드파크에 모였다. 내일 있을 3차전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1, 2차전을 나눠 갖기는 했지만, 1차전도 2차전도 빈타였다. 본래 가진 타자들의 기량이 모연비퍼스에 비해 약하다고는 해도 주축 선수들마저 두드러진 활약이 없다.
믿었던 테이블세터 이정우는 물론이고 엔서니페킨스와 이중호도 기대에 못 미친다.
페넌트레이스에서 2위까지 치고 올라올 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제 몫을 해내던 타격 사이클이 가라앉았다는 판단 아래 허봉호 감독은 오후까지 직접 선수들의 타격을 지도했다.
물론, 성낙기도 1안타밖에 때려내지 못한 어제를 되새기며 열정적으로 타격에 임했다.
훈련을 마치고 경기장을 나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오빠, 안녕하세요.
“누구… 아, 하연이구나. 웬일이야?”
-오늘 강릉에 오셨죠?
“응, 그렇지. 어떻게 알았어?”
-내일부터 삼호필드파크에서 시합 있는 거 다 알아요.
“그렇구나.”
-지금 어디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오빠 얼굴 좀 보려고요.
***
성낙기는 장하연과 커피숍에서 만났다. 불과 얼마 전에 보았는데도 그때보다 훨씬 성숙미를 풍긴다. 부쩍 몸이 크는 중인지 자세히 보니 몸의 굴곡이 장난이 아니다. 동생 서희를 빼고 단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다 보니 ‘저 오빠 좋아해도 돼요?’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참, 그런데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공부 안 하니?”
“공부요?”
“곧 수능이잖아. 이렇게 나랑 시간 보내도 괜찮아?”
“아하하, 저 미국에 있는 대학에 원서 접수 했어요. 내년에 발표해요.”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대학을 미국으로 갈 생각을 했지? 그런 결심 아무나 못 하는 것인데 말이야.”
“서희한테 그러셨다면서요. 오빠는 곧 메이저 갈 거니까, 갔다 올 동안 시집가지 말고 부모 곁에 꼭 붙어 있어라, 이렇게요. 맞죠? 구단하고 약속했다고 들었어요. 한국 시리즈 잘 치르면 보내주기로요.”
“그거… 술 마시고 한 소린데. 서희 애가 입이 짧네.”
“그래서 생각했죠. 오빠가 가면 나도 가야겠다. 그렇잖아도 미국 대학 생각은 있었는데 부모님도 적극 찬성하시고 그래서 결심을 굳혔어요. 오빠 실력이면 미국에서도 야구 할 수 있겠죠?”
“하연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아녀요. 전 믿어요. 그리고 오빠가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꼭 봤으면 좋겠어요.”
“너도 서희 닮아 가는지 약간…….”
“약간 뭐요……?”
“아니다. 뭐 미국에서 만나면 좋겠지. 그런데 어느 대학 갈 건데?”
“코넬대학교요. 농업생명과학대학 지원했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애가 무데뽀다. 대관령에서 목장을 하는 아빠의 뒤를 잇는다는 이야기를 설핏 들은 적은 있었지만, 정말인 줄은 몰랐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국 시리즈 3차전이 열렸다. 모연비퍼스의 선발은 14승 9패의 필 브라이드로 ERA 3.34의 수준급 투수였다.
그에 맞서는 삼호슈퍼스타즈의 투수는 거액의 FA 공성진. 15승 7패에 ERA 2.99로 삼호슈퍼스타즈라는 약 팀에서 그런대로 이름값을 해냈다는 평이 많다.
1회는 삼호슈퍼스타즈의 선공. 구위보다는 제구력과 경기운용능력이 돋보이는 필 브라이드를 맞아 이정우는 9구까지 가는 실랑이 끝에 안타를 치고 나갔다. 투구 수도 늘리고 첫 타자부터 출루한 출발은 좋았다.
하지만 2번으로 나온 이한영이 번트를 댄다는 것이 투수 정면으로 향했고 타구 또한 빠른 편이어서 이정우가 2루에서 포스아웃(force-out)을 당했고 이어 타자마저 아웃, 1회부터 병살타가 만들어졌다.
좋은 찬스에서 맥없이 연결이 끊긴 뒤,
엔서니페킨스가 다시 안타를 때려냈지만 4번 이중호의 깊은 중견수 플라이 아웃으로 2안타를 치고도 득점에 실패했다. 거기서부터 경기가 꼬이기 시작했다.
2회에는 5번 지명타자로 나온 성낙기가 2루타를 치고 나가서 순식간에 노아웃에 2루가 되었는데, 후속 타자들의 삽질로 점수를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먼저, 성낙기가 2루로 나가자마자 투수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전에 성낙기에게 2루 및 3루 도루를 허용해 체면을 구겼던 포수 마성남은 철저하게 바깥쪽 빠른 공 위주로 사인을 내면서 성낙기의 도루를 경계했다.
성낙기가 아무리 리키헨더슨의 도루 능력을 이어받았다 해도 아직은 레벨 3으로, 레벨 5가 완성되지 않은 데다가 곧 죽어도 작년 챔피언 팀의 포수인 마성남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3루 도루는 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섣불리 뛰다가 객사라도 하면 찬스를 잃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도루를 자제하는 성낙기의 마음도 모른 채,
1루수 구종욱은 얕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고 뜬금포인 6번 타자 김석문은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배트를 휘두르다가 삼구 삼진으로, 이두열도 2차전의 홈런을 또 치겠다고 큰 스윙으로 일관하다가 포수 파울플라이로 기회를 날려 버렸다.
***
“아니, 타격 연습을 시켜놨더니 누가 지들보고 홈런을 치라 그랬어? 왜 한결같이 스윙이 큰 거야?”
“스윙을 좀 간결하게 가져가라고 했는데도… 투수의 공이 치기 좋은 코스로 오기 때문에 더 그런 듯합니다.”
“필 브라이드가 원래 맞춰 잡는 투순데 마구 휘두른다고 점수가 나나? 그리고 안타는 8개나 치면서 도무지 연결이 안 돼.”
“…….”
허봉호 감독과 박종태 타격 코치의 대화처럼 삼호슈파스타즈는 6회까지 8개의 안타를 쳤지만 전광판은 0의 행렬이었다.
그에 반해서 모연비퍼스는 공성진에게 뽑아낸 5안타만으로 3점을 뽑아낼 만큼, 주자들의 주루 능력과 작전 수행이 적재적소에 잘 이루어졌다.
적은 안타로 최대한의 점수를 뽑는 경제적인 야구, 역시 지난 시즌 우승 팀다운 탄탄함이 빛났다.
모연비퍼스의 투수 필 브라이드는 145km내외의 포심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쓰면서 커브와 체인지업으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었다.
삼호슈퍼스타즈 타자들은 그런대로 잘 때려내며 대응했지만 거의가 땅볼 타구로 내야에서 잡히거나 코스가 좋아 내야를 통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8안타 중 장타는 성낙기의 2루타 하나뿐이었고 2안타를 때려낸 선수도 성낙기뿐이었다.
루상에 주자가 있을 때 필 브라이드의 퀵 모션은 평균 1.22초에 불과해서 도루도 쉽지 않은 데다, 5회에 안타를 치고 나간 성낙기의 후속 타자 구종욱은 초구를 건드려 성낙기의 도루 기회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
타선에서 이런 식의 엇박자가 나니 점수가 날 리 없다.
결국 공성진은 7회까지 6안타만을 내주고도 3실점하며 마운드를 내려갔고 필 브라이드는 7회 2사 후, 필승 불펜에 마운드를 넘겼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칭찬할 일이지만 이래가지고 우승은 힘들겠다. 약 팀이 강팀을 이기기 위해서는 팀워크밖에 없는데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부족해.”
“이제 겨우 3차전인걸요.”
“아니야. 투수들은 좋은데 타선 응집력이 너무 떨어져. 상대 팀은 클린업 트리오 정도만 막으면 되니 땅 짚고 헤엄치기나 같지.”
“객관적인 전력은 사실 힘들죠. 그래서 저는 관전 포인트를 성낙기 선수의 3승에 두고 있어요. 과연 호언장담한 것처럼 한국 시리즈 3승을 해낼 것인가, 하는 거요.”
“그런 뒤에 방출해 주면 너를 에이전트로 삼아서 메이저리그에 간다는 꿈같은 이야기 말이냐?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평균 구속 140km 언저리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뼈도 못 추릴 거다. 우선은 한국 시리즈에 세 번 등판해서 모두 승리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로테이션을 앞당기면 투수는 얻어맞게 되어 있어.”
“하핫, 성낙기 선수는 보통 선수가 아니라 괴물 투수예요. 전 믿고 싶어요.”
“아경이 너, 성낙기를 메이저리그에 보내고 싶은 거냐? 저놈 말대로 에이전트가 되어서?”
“글쎄요. 메이저리그에서 통한다는 확신만 심어 준다면야 생각할 여지는 있다고 봐요.”
“허허허… 애가 아직 메이저리그를 모르는구나. 거긴 진짜 괴물들이 득시글한 곳이란다. 세계에서 야구를 가장 잘한다는 선수들로만 구성된 데다가 주전으로 뛰기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워.”
1차전에 이어 3차전에도 특별석에 자리 잡은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이 성낙기라는 선수의 처리 문제를 놓고 약간의 이견을 보이는 사이,
경기는 서로의 불펜을 공략하지 못한 채 0:3의 스코어로 끝나 버렸다. 이로써 한국 시리즈 전적 1:2로 서서히 모연비퍼스 쪽으로 우승의 추가 기울고 있었다.
***
“내일 선발로는 누가 좋겠어.”
“로테이션으로는 필 서든입니다. 다만, 포스트시즌을 앞두고부터 볼 끝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ERA 3.26이 말하듯 꽤 던지는 투수인데 모연비퍼스를 상대로 긴 이닝은 던지기 힘들 겁니다.”
“그렇지. 당연히 필 서든인데, 성낙기가 선발을 자청했단 말이지. 1차전에서 승을 따냈고 모연비퍼스 타선을 잠재웠어. 3일 쉬고 또 던지겠다는 건데 고민되는군.”
“3일 쉬고 컨디션이 돌아올까요? 4일을 쉬어도 제 공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도 많은데 말입니다.”
“이 코치 말이 맞아. 그런데 말이야. 성낙기는 2, 3일만 쉬고도 승을 따낸 적이 꽤 있다는 게 문제야. 2군에서부터 그랬지.”
“저도 고민이 됩니다. 어떤 선택이 좋을지 말이죠.”
“좋아, 일단 필 서든으로 가지. 그 대신 성낙기를 불펜으로 대기 시켜. 위기를 맞으면 1회부터 바로 교체야. 어차피 타선이 안 터지는 이상, 모연비퍼스를 상대로 점수를 주면 그대로 지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4차전 선발은 필 서든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