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051화 한국시리즈 1
에이빌드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어 달 전, 성낙기와 맞붙어 패배했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날, 투수로 나왔던 성낙기는 8회까지 1실점했고 에이빌드런도 그랬다.
스코어 1:1인 상황에서 8회 좌익수 수비로 들어간 지명타자 하진수 대신 9회 초 타석에 들어선 성낙기는 에이빌드런으로부터 솔로 홈런을 때려냈고 경기는 2;1 삼호슈퍼스타즈의 승리로 끝났었다.
에이빌드런으로서는 상대 투수에게 맞은 홈런이 뼈아팠고 이제나저제나 복수를 꿈꾸던 차에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 딱 만난 것이다.
“에이빌드런이 좀 긴장한 것 같은데?”
“당연하지, 전에 성낙기에게 홈런을 맞고 졌었거든.”
“자넨 어찌 그리 잘 알아?”
“그때 내가 운 좋게 관전 중이었지. 코리아리그 1차전에서 둘이 맞붙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워싱턴 내셔널스(Washington Nationals)의 울프 마이어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San Francisco Giants)의 스카우트 하프오링으로 에이빌드런의 공이 아주 좋아졌다는 아시아 담당 직원의 언질을 받고 경기를 관전하러 온 것이었다.
한국 시리즈가 끝나면 스토브 리그가 시작되는데 KBO리그 선수들 중에서 쓸 만한 자원을 찜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LA 다저스(Los Angeles Dodgers)나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 같은 강팀의 스카우트들도 스피드건을 세워두고 경기를 관전 중이었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가 되지 않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투수들이 KBO 팀의 코칭을 받고 나면 몰라보게 달라진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기본적인 것만 얘기하고 선수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mlb 스타일과 달리 KBO는 1년 농사가 걸린 영입이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적이 나지 않아도 믿음을 갖고 기다려 주는 미덕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런 믿음 위에 선수는 성장하게 마련이었고, 실제로 mlb로 돌아가 쏠쏠한 활약을 펼친 투수들이 있었다.
그들이 오늘 관심을 갖는 에이빌드런 역시 그런 경우였다.
안 그래도 빨랐던 공은 더 빨라졌고, 변화구의 각은 날카로워졌으며 투구폼 교정으로 일정한 타이밍에서 나오는 공의 제구력 또한 몰라보게 달라졌다.
벌써부터 동영상을 입수한 미국 현지에서는 2020년 mlb에서 충분히 통할 만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 기대를 안고 마운드에 오른 에이빌드런은 자신의 역량에 걸맞는 공으로 이정우부터 시작된 삼호슈퍼스타즈의 1회 말 공격을 연속 3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힘이 다소 부족한 1, 2번 타자에게는 윽박지르는 강속구를, 3번 엔서니페킨스에게는 강속구를 보여준 후, 변화구 위주의 볼 배합으로 타이밍을 빼앗았다.
“대단한데? 타자에 따라서 완급 조절까지 하고 있어.”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의 하프오링이 감탄을 터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에이빌드런의 컨디션은 최고로 보였다. 거기에 mlb 스카우트까지 잔뜩 왔으니 동기부여적인 측면으로도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오를 수밖에 없다.
2회 초, 성낙기가 맞이한 타자는 KBO 최고 타자로 일컬어지는 천강조였다.
모연비퍼스가 거액을 투자해 NPB나 mlb를 노리던 그를 붙들었는데 지난 시즌처럼 좋은 성적을 거뒀다.
0.297의 타율에 47홈런 134타점으로 작년에 이어 홈런왕과 타점왕을 휩쓴 슬러거 중의 슬러거다.
185cm에 107kg으로 다부진 체격에 1루 수비도 수준급이라는 평가였다.
다만, 다소 독선적인 데다 냉정하기까지 한 이기적인 성격으로 팀워크를 해친다는 지적도 있다.
워낙 좋은 타격 성적 탓에 그런 단점들이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파앙.
볼.
1구, 143km 포심패스트볼이 볼 판정을 받았다. 바깥쪽에 걸쳤다고 봤는데 역시 원정 팀에 약간 인색한 안두영 주심의 성향이 잘 나타나는 판정이었다.
다른 팀과의 경기에선 거의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던 코스인데, 천강조는 으레 볼일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한 표정이다.
퀘이크볼(3cm/5cm)
팡.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었다. 천강조는 자신이 원하는 볼이 아닌 듯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방금 볼은 볼수록 묘하단 말이야. 타격 포인트에서 떨림이 분명히 있어.’
천강조는 예전에 성낙기와의 대결에서 퀘이크볼을 걷어 올렸다가 연속으로 힘없는 외야 플라이를 쳤던 걸 기억해 냈다. 성낙기는 3구로 역시 몸 쪽 체인지업을 던졌다.
연속 두 개의 빠른 볼 다음의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이라면 어떤 타자라도 속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그 같은 패턴으로 상대해서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따악.
그러나 그건 성낙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마치 변화구를 기다렸다는 듯 천강조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걷어 올렸고 배트에 맞은 공은 라이너성으로 죽죽 날아가 좌익수 키를 넘기고 그대로 관중석에 빨려 들어갔다. 그야말로 불의의 일격이었다.
“홈런입니다. 천강조 선수 성낙기 선수의 공을 받아쳐 그대로 담장을 넘겨 버립니다. 대단합니다.”
“야아. 정말 대단하네요. 그걸 넘기나요? 제가 보기엔 아주 잘 제구 된 체인지업이었거든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타자입니다. 이번 시즌 왜 홈런왕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천강조 선수네요.”
천강조는 홈런을 치고는 배트를 높이 던졌는데 거의 10m는 되는 높이로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배트를 던진 뒤 1루를 향해 천천히 걷는 천강조의 입이 한쪽으로 찢어지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다.
그러면서 슬쩍 성낙기를 흘겨본다. 성낙기가 천강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고 천강조는 1루를 밟고 나서 말했다.
“불만 있어? 뭘 봐? 인마.”
1루를 돌다 말고 성낙기와 한 판 붙을 모양새였다. 천강조의 성격을 익히 아는 모연비퍼스 선수들은 벤치클리어링에 대비해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맞붙는 낌새만 있으면 바로 돌진해서 이제 처음 한국 시리즈에 올라온 풋내기들을 눌러놓을 참이다.
“그만하시죠, 선배님.”
그라운드를 돌던 발을 멈추고 성낙기에게 다가가려는 천강조를 뒤에서 돌려세우는 손이 있었다. 천강조는 자신의 양어깨를 잡는 손아귀의 힘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선 거구를 발견했다.
“너, 이 새끼 뭐야. 이거 안 놔?”
천강조가 억센 손을 뿌리치며 상대의 허리를 잡고 넘어뜨리려는 동작을 취했다. 107kg의 몸무게에 학창 시절 한때 유도를 했던 천강조의 힘은 장사급이었는데 어지간한 씨름 선수도 가뿐히 넘긴다는 완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만큼, 벤치클리어링은 자신의 주특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천강조의 그런 자신감은 상대가 상대다울 때의 얘기였다.
천강조를 돌려세운 거구는 바로 이중호였다. 힘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천강조는 이내 자신의 힘이 상대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 새끼 봐라? 너 죽을래?”
급기야 다급해진 천강조는 이중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에 들어갔으나, 이중호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허리를 잡고 천강조를 위로 들어 올렸다.
193cm의 키에 118kg의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이중호의 몸. 118kg 중에는 뱃살 무게도 없고 오로지 근육과 머리 무게다.
천강조의 몸이 버둥거리며 땅에서 30cm나 떠올랐고 그 광경을 본 나머지 선수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놔… 크윽!”
“뭘 놓습니까. 선배가 먼저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요.”
107kg의 거구가 허리가 꺾인 채 버둥거리게 만드는 괴력에 모연비퍼스 선수들은 더그아웃에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리고 천강조가 힘이 풀려 움직임이 잦아들 때에서야 이중호는 들어 올렸던 상대의 몸을 내려놓았다.
“후욱, 후욱. 너 이 새끼 두고 보자.”
땅으로 내려온 천강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이중호가 등을 살짝 밀자, 어기적거리며 그라운드를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김정환 감독이 주심에게 항의를 하다가 돌아갔다. 팀의 최고 선수인 데다 완력으로는 톱인 천강조가 두말없이 그라운드를 도는 마당에 이미 벤치클리어링의 타이밍을 놓친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중호, 잘했어.”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성낙기가 이중호를 칭찬했고, 이중호는 머쓱한지 뒤통수를 만졌다.
홈런을 맞고 나서 시무룩해진 삼호슈퍼스타즈의 팬들은 천강조와 이중호의 실랑이 이후로 기세가 올라 소리를 높였고, 그에 반해 모연비퍼스 팬들은 천강조가 홈을 밟을 때에도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주심은 망설이다가 둘 모두에게 경고를 날렸다.
“아주 묘한 벤치클리어링이군 그래. 이게 KBO 식인가?”
“글쎄, 나도 저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단둘이 시작해서 단둘이 끝내다니. 마치 서부 영화에서 일대일로 결투라도 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어.”
“동감일세. 아주 멋진 퍼포먼스였어. 그나저나 저 친구는 괴력의 소유자군. 상대 선수의 몸도 만만치 않은데 가뿐하게 들어 올려 버리다니. 저런 건, mlb에서도 보지 못했어.”
“어디보자. 이중호라는 선수야. 0.314의 타율에 33홈런이라, 타고투저라고는 해도 이 정도면 대단해. 더 중요한 건 이 선수가 이제 겨우 23세라는 거야.”
“그래? 아깝군. 그 정도 실력이면 관심을 가져볼 만도 한데 타깃은 아니야.”
“그렇지. 몇 년 후, 포스팅시스템이라면 몰라도.”
천강조는 홈을 밟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자, 선수들은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 소리를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천강조는 마지못해 손바닥을 부딪고는 더그아웃에 앉아 물을 마시면서 좀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이, 시팔. 저 괴물은 도대체 뭐야. 등치만 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무엇보다 팀 사기를 이끌어야 할 강타자가 못 볼꼴을 보인 것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경기는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성낙기가 홈런을 허용하여 0:1로 지고 있음에도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과 팬들은 에너지가 넘쳐흘렀고, 성낙기의 공을 때린 타구들이 내야를 구를 때마다 호수비를 펼쳐 좀처럼 1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 모연비퍼스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강한 수비를 갖추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맥이 살짝 풀린 느낌이었다.
“좋아, 흐름은 우리에게 넘어왔어. 에이빌드런을 최대한 빨리 내리면 역전 간다.”
“에이빌드런… 아직 생생한데요?”
“타자들에게 좀 더 물고 늘어지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되었습니다.”
5회 말, 더그아웃에서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투수 코치, 박종태 타격 코치는 말을 주고받으며 그라운드를 주시했다.
5회 말까지 77구를 던진 에이빌드런을 7회 이전에 내린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2회에 뜻하지 않은 일격을 맞은 성낙기 역시 5회 초까지 1실점으로 잘 막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