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049화 에이전트가 되어 주세요 3
세이프!
1루심의 팔이 세이프를 선언했다. 간신히 병살타를 면했지만, 투아웃 1, 3루로 안강피그스에게는 좋은 흐름이다.
다음 타자 성낙기가 타석에 들어섰다. 긴장되는 순간인데도 뭔 일 있냐는 듯 여유로운 표정. 하태문은 그 얼굴을 보고 살짝 빡쳐서 정면 승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러나, 배터리 코치의 사인은 고의 볼넷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희한한 놈이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더그아웃의 판단.
‘어차피 볼넷 줄 바에야 옆구리나 맞히는 게 낫겠는데.’
하태문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연속으로 볼 네 개를 던졌다. 성낙기가 걸어 나갔고, 투아웃 만루에서 다음 타자는 뜬금포 김석문이었다.
타율은 0.252으로 별로였지만 홈런은 16개나 쳐냈다.
그중 결승 홈런이 3개나 되는데, 모두 사람들이 별로 기대하지 않던 순간에 터졌다. 그런가 하면, 기대를 잔뜩 하고 있을 때는 파울플라이나 삼진으로 공격의 맥을 끊었다.
2군부터 그런 패턴이어서 선수들 모두 그러려니 했다. 아예 기대를 접고 차분하게 공수 교대를 준비하는 것이 뜬금포 김석문의 타격을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이었다.
투아웃 만루가 채워지자,
박재신 감독은 타임을 걸고 나종무로 투수를 교체했다. 공은 140km 중반이 멕시멈이지만, 제구력이 좋아 마무리 바로 앞에서 필승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종무의 낮게 깔리는 제구력이라면 김석문을 땅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계산. 그런 감독의 기대대로 나종무는 첫 구부터 바깥쪽 포심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를 꽂았다.
제 2구는 볼, 3구는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았고 원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김석문은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두 번 연속으로 커트해 냈다.
‘생각보다 질기네.’
포수 위현욱은 여기서 승부를 걸 생각이었다.
승부구인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이 연속으로 커트당한 마당에 또다시 몸 쪽 낮은 포심패스트볼 승부구가 들어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유인구를 던지는 것이 정석이지만, 위현욱은 타자의 의표를 찌르는 쪽을 택했다.
‘제구만 되면 무조건 삼진이다.’
투수인 나종무 역시 그 뜻을 알아차렸다. 유인구가 먹히지 않으면 볼 카운트만 불리해지고 질질 끌려가다 보면 타자의 게스히팅이 가능해진다.
차라리 여기서 승부를 걸자. 둘의 뜻은 통했다. 그리고 몸 쪽으로 공이 날아왔다.
따악.
몸 쪽으로 낮게 형성된 볼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현욱이 간과한 것은 김석문이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라는 것이었다. 볼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타율은 좋지 않아도 못 치는 공은 없을 만큼 의외성이 있는 타자, 그게 바로 김석문이었다.
“와앗! 2루타다.”
“역시 뜬금포 지리네요.”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의 말처럼 김석문이 골프스윙으로 친 타구는 3루수 키를 넘기고 라인을 따라 펜스까지 굴러갔다.
좌익수가 펜스까지 따라가 공을 던졌지만,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왔고 리키헨더슨의 도루 능력을 부여받은 1루 주자 성낙기는 이중호를 거의 따라잡을 만큼 빠른 속도로 홈에 들어와 이중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김석문의 3타점 2루타. 홈런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역전타였다.
“하, 내가 이 맛에 쟤를 쓴다니까.”
허봉호 감독은 절로 신이 났다. 2루수로는 KW치타스에서 온 이영민도 있었다. 그동안 둘을 경쟁시키면서 김석문에게는 각성을, 25세의 이명민에게는 기량 향상을 원했다.
타격 재능은 이영민에게 더 있었지만, 김석문은 이영민이 가지지 못한 탄탄한 수비와 뜬금포가 있었다.
2군에서부터 김석문을 데리고 있었던 허봉호 감독은 한 방씩 터뜨려 주는 김석문을 믿었고 오늘 그 판단이 제대로 적중했다.
***
<삼호슈파스타즈 기적의 3연승 - 스포츠 나인>
<3위 안강피그스와 승차 없는 4위, 삼호슈퍼스타즈의 끝은 어디인가? - 야구닷컴>
<성낙기의 완투승으로 대미를 장식한 3연전 스윕 - 이브닝 스포츠>
“정말 대단한 3연전이었습니다. 1차전은 연장 혈투까지 가서 기어코 7:6으로 경기를 잡아낸 삼호슈퍼스타즈의 투혼이 빛났고 사실상, 1차전의 승부가 2차전, 3차전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허덕수라는 에이스를 투입하고 필승조까지 총동원된 1차전에서 대미지가 너무 컸습니다. 결과적으로 2차전도 불펜이 무너졌죠. 3차전은 거의 원맨쇼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2천 년대 중반까지 은성캣츠의 레전드 타자였던 서인호 해설은 이번 3연전의 스윕 원인을 1차전의 패배 때문으로 이유를 들었고,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저는 3연전의 결과를 성낙기로부터 시작되어서 성낙기로 끝난 경기였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1차전도 성낙기의 투런 홈런으로 2:3으로 따라붙으면서 나머지 선수들이 힘을 냈고 나중에 이중호나 김석문의 적시타가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3차전은 어떻습니까, 3:1 완투승을 거뒀잖아요. 이 선수 미쳤습니다.”
이번엔 투수로 이름을 날린 송신우 해설가, 그는 같은 투수 출신인 성낙기의 활약에 높은 점수를 줬고
“그건 아니죠. 야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성낙기 선수가 대단한 기여를 했습니다만, 나머지 선수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스윕은 아예 꿈도 못 꾸죠. 1차전만 해도 결국, 역전 적시타를 터뜨린 선수는 김석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삼호슈퍼스타즈의 사기가 확 올랐고 연장 가서도 뒷심을 발휘한 겁니다. 이중호와 앤서니페킨스는 또 어땠나요. 2, 3차전에서 2안타씩을 때려내면서 1차전 승리의 분위기가 넘어가지 않게 만들었죠. 그뿐입니까? 이정우는 3연전 동안 4할이 넘는 출루율로 테이블세터로서의 역할을 120% 해냈죠. 이게 바로 야구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은 90년대 홈런왕 장종운 해설자였다. 말 중간에 사회자가 중재에 나서야 했을 만큼 삼호슈퍼스타즈의 경기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만큼 그들에게도 삼호슈퍼스타즈의 경기력은 경이로운 데가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에도 그들은 인사 대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다가 우승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왜 이렇게 잘하지? 1차전은 마치 영화 한 편 같았어.
-3위로 올라가도 힘들어. 모연비퍼스가 좀 강해야 말이지. 준플레이오프에 플레이오프까지 치르고 한국 시리즈 올라가서 7차전을 견딜 수 있겠어?
-야구는 모르는 거야. 기세라는 게 있는 거다.
-풋, 애들 야구 모르네. 다 틀렸다. 안강이 다시 치고 올라간다. 이대로 주저앉을 팀이 아니라니까.
포털 사이트도 삼호슈퍼스타즈의 3연전 스윕이 단연 화제였다.
시즌 초반 7연패를 하며 최하위권에 머물던 팀이 어느 순간 6위로 올라오더니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5위의 덜미를 잡고 4위마저 잡아낸 후, 3위 안강피그스에 승차 없는 4위까지 치고 올라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국의 CBS스포츠 채널은 투수와 타자를 병행하고 있는 성낙기를 현대 야구에서 사라진 희귀한 선수로 소개했다.
“요즘 KBO리그에서는 보기 드문 선수가 화제입니다. 자, 이게 바로 성낙기라는 투수가 홈런을 치는 장면인데요. 그는 투수로도 15승에 2.11의 ERA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롭죠?”
“그러네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타격으로도 거의 수위타자에 가깝습니다. 저런 선수가 나타나면 흥행에 매우 도움이 되죠.”
“메이저리그에 오면 어떻게 될까요.”
“성낙기라는 선수 말입니까?”
“네.”
“글쎄요. 일단 평균적인 공 스피드가 90마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스피드는 싱글A 선수들도 가지고 있어요. 동양의 작은 나라 리그에서 화제가 된 거지, mlb와의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어느 나라든 스포츠 스타는 있게 마련이지만, mlb는 세계적인 선수들만 오는 곳입니다.”
“제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KBO의 배트플립으로 유명한 영상 보내면서 마칩니다.”
한때 mlb 선수였던 해설가와 진행자가 KBO의 투타겸업을 화제로 이야기할 만큼 성낙기는 자신도 모르는 새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분히 가십거리일 뿐 KBO의 실력 자체를 폄하하는 멘트였다.
어쨌든 성낙기는 NPB의 오타니 쇼헤이의 이도류처럼 KBO의 투타겸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삼호슈퍼스타즈는 안강피그스와의 3연전 후,
최하위권인 연진맘모스와 3연전을 가져 또다시 3연승을 거두고 안강피그스 전부터 6연승을 달리며 마침내, 안강을 밀어내고 3위에 올랐다.
더불어 2위인 세화스쿼럴스에 2게임 차로 따라붙었다.
전반기에 투타 균형이 맞지 않아 부침이 있었지만 후반기 들어 타선이 올라왔고 불펜도 성낙기의 가세로 제법 탄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2위까지 넘보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문제는 엄청난 기세에도 불구하고 페넌트레이스가 이제 겨우 9게임밖에 남았다는 것.
그 7게임 중에 세화스쿼럴스와의 경기가 있다면 역전을 노려보겠지만 모연비퍼스를 필두로 은성캣츠, 화산레빗스와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세화스쿼럴스는 안강피그스를 빼고는 연진맘모스와 KW치타스라는 약 팀과의 경기여서 2위로의 도약은 그야말로 행운에 행운이 겹쳐야 가능했다.
“조금만 더 경기가 남았더라면 치고 올라갈 텐데… 아쉽습니다.”
“우린 최선을 다했어. 이제 강팀과도 해볼 만한 전력이 되었다는 게 가장 중요해.”
“그렇습니다. 만년 하위 팀을 3위까지 올려놓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지금 팬들은 감독님더러 명장이라고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박종태 코치는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만족해하면서도 남은 경기 수와 상대 팀을 감안할 때 2위로의 도약은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말투였다. 어쨌든 삼호슈퍼스타즈는 창단 이래 가장 좋은 성적에 올랐고 그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결국, 삼호슈퍼스타즈는 80승 62패, 승률 0.563으로 시즌을 마쳤다. 세화스쿼럴스와의 승차는 3게임이었고, 모연비퍼스는 6할이 훨씬 넘는 승률로 1위를 차지했다. 이제 남은 것은 포스트시즌뿐이었다.
***
1위-모연비퍼스.
2위-세화스쿼럴스
3위-삼호슈퍼스타즈
4위-안강피그스
5위-은성캣츠
2019년의 순위는 2018년과 대동소이했다. 1, 2위는 그대로였는데 3위를 삼호슈파스타즈가 차지했고 그 바람에 안강피그스가 4위로 밀려났다. 그리고 성진재규어스 대신 은성캣츠가 5위로 와일드카드를 차지한 것뿐이었다.
10월 3일, 안강피그스와 은성캣츠의 경기가 열렸고 예상외로 피를 말리는 12회 연장 접전 끝에 7:6으로 은성캣츠가 승리했다. 이어진 2차전 역시 치열한 공방이 오갔는데 기본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안강피그스가 5:3으로 준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다. 은성캣츠는 2연전 동안 1승 1패의 호각을 이루었으나 5위는 4위 팀에 2연승을 거둬야만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는 규정 탓에 아깝게 탈락했다.
준플레이오프는 삼호슈퍼스타즈와 안강피그스의 5판3선승제로 치러졌고, 삼호슈퍼스타즈는 성낙기를, 안강피그스는 허덕수 대신 데런카이글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첫 판에서 성낙기는 8이닝 2실점으로 4:2로 1차전을 따냈다. 구문철의 세이브.
2차전 역시 강속구 투수 마크트웰을 내세워 5:3으로 또다시 승리했고, 3차전도 필 서든이 나섰기에 3연승을 기대했으나 의외로 난조를 보여 일찌감치 경기를 그르쳤다. 3차전은 9:3으로 안강피그스의 승리였다.
“공성진, 컨디션 어때?”
“팔꿈치에 염증이 있었지만 현재는 많이 좋아졌고 공을 던지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좋아, 더 끌면 힘들어. 내일 끝내자.”
공성진은 묵직한 느낌 때문에 MRI를 찍었고 염증이 발견되었다. 그 후, 로테이션을 거르고 치료에 전념한 결과 던지는 데 별문제가 없을 거라는 의사의 소견이 떨어졌다.
많은 팬들이 모인 삼호필드파크에서 공성진은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뿌려댔고 6회까지 1실점으로 막아낸 뒤, 불펜을 총동원한 끝에 2:1, 신승을 거뒀다.
관중은 열광했고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은 샴페인을 서로 뿌려대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다음 날, 허봉호 감독은 이례적으로 하루 휴식을 결정했다. 회복 훈련이랍시고 지친 선수들 굴려봐야 득 될 게 없다는 허봉호 감독다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