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047화 에이전트가 되어 주세요 1
불미스러운 일이 일단락 된 후, 삼호슈퍼스타즈는 원팀으로 더 강해졌다.
은성캣츠에 스윕 당한 결과가 진짜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이 낱낱이 밝혀졌고 그 3연전 스윕 패가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도 자신감 저하 등의 후유증을 가져왔었는데,
그게 결국 자신들의 실력 부족이 아니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듯 선수들은 그 일로 더 끈끈해졌고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도 새로워졌다.
여기엔,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사건이 빠른 속도로 마무리 된 것도 심기일전하는데 도움을 줬다.
그런 후, 삼호슈퍼스타즈는 한때 4.5게임 차까지 벌어진 은성캣츠와의 간격을 차근차근 좁혀갔고 마침내 9월 중순에 이르러 은성캣츠를 0.5게임 차로 밀어내고 4위를 차지했다.
이대로만 가면 가을 야구였는데 허봉호 감독과 선수단은 더 높은 곳까지 올라서길 원했다.
와일드카드 전을 치르고 바로 준 플레이오프를 맞게 되는 일정상, 투수력 소모가 누적된다. 결국, 죽을힘을 다해 한국 시리즈에 올라간다한들, 미리 결승에 직행해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는 페넌트레이스 1위의 밥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대한 순위를 올리는 것이 지상 과제다.
삼호슈퍼스타즈가 4위에 올라선 후 맞이하게 된 팀은 3게임 차 3위를 달리고 있는 안강피그스. 어느덧 13승에 3.06의 준수한 ERA를 기록하고 있는 마크트웰이 선발로 나섰다.
-오, 성낙기 오늘은 5번으로 나왔어. 한 계단 상승이야.
-성낙기 타율이 어떻게 되지?
-0.368이야. 비공식 수위타자.
-수위타자ㅋㅋㅋ 몇 게임이나 뛰었다고.
-요즘 클린업 트리오가 부진해서 연결이 툭툭 끊겼는데 그래서 전진 배치 했나보다.
-오늘 경기 볼 맛 나겠네. 근데 성낙기 삽질이 많아졌지?
-맞아, 가끔 변화구에 약점을 보여.
성낙기는 경기 시작 전 배트를 휘두르면서 스윙을 가다듬었다. 요즘 들어 투수들이 자신에게 변화구를 많이 던진다.
그중에서 커브나 슬라이더는 자신 있었고 곧잘 안타로 연결했는데 포크볼이나 싱커 등의 변화구는 생소하게 느껴졌고 헛스윙도 제법 나오고 있었다.
“참 묘하단 말이야. 다른 공은 수박만 하게 보이는데 왜 싱커나 포크, 투심 같은 공은 적응이 잘 안 되지?”
성낙기는 스윙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 놈의 스탯이 변화구도 가려가면서 오르는 것인지 차이가 심하다.
[행크아론의 타격은 포심패스트볼과 커브, 슬라이더 등의 그 당시 투수의 공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성낙기의 의문을 알았다는 듯 시스템이 반응했다.
“그런 거였어? 그럼, 행크아론이 겪지 못했던 구질엔 약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네.”
그제야 이해가 갔다. 포심패스트볼이나 슬라이더 등의 구질엔 곧잘 반응하던 몸이 그 당시에 없었던 구질이었기 때문에 대처가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런 구질은 경험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쩔 수 없지. 닥치는 대로 헤쳐 나가는 수밖에.’
상대 팀인 안강피그스의 데런카이글은 KBO리그 2년차 선수로 지난 시즌 12승을 올렸고 완전히 적응된 지금 현재 14승에 ERA 2.77로 안강피그스의 실질적인 에이스였다.
안강피그스 역시 세화스쿼럴스와 3게임 차이였으므로 이번 3연전은 추격을 뿌리치고 2위로 올라가려는 팀과 어떻게든 순위를 뒤바꾸려는 팀 간의 중요한 일전이었다.
마크트웰은 1회부터 149km에 달하는 강속구를 뿌려댔다. 하지만, 강속구에 비해 제구에 문제가 생겨 원 아웃 뒤에 볼넷을 하나 내주고 안타마저 허용했다.
원 아웃 1, 2루에서 4번 오장룡이 타석에 들어섰다. 2019시즌 현재 23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강타자.
삼호슈퍼스타즈의 포수는 강길만으로 마크트웰과의 호흡이 이두열보다 낫다는 배터리 코치 최광규의 판단에 따라 시즌 내내 손발을 맞춰오고 있다.
강타자를 의식한 강길만은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연속으로 요구했고, 2구째 던진 공이 우익수 쪽으로 날아갔다.
따악-
오장룡이 친 공은 우익수 이중호 앞, 애매한 위치에 떨어졌는데 원 바운드로 받자니 안타로 1점을 내줄 것 같고 슬라이딩으로 노 바운드 아웃을 시키자니 모험인 그런 위치였다.
그리고 이중호는 후자를 택했다.
1회부터 점수를 내주면 오늘 경기가 넘어간다는 생각이 강했고 발 빠르고 강견인 엔서니페킨스가 백업을 해줄 테니 빠지더라도 1루 주자는 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판단이 그의 욕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 판단은 결과적으로 무모했다.
“아, 이중호 선수 달려 나옵니다. 잡느냐, 잡느냐… 원 바운드로 글러브 맞고 공이 굴절됩니다. 엔서니페킨스 선수 급히 달려오지만 2루 주자 홈을 밟습니다. 1루 주자는 3루까지 타자 2루까지 안착합니다. 주자 올 세이프!”
“하아… 이중호 선수 1회부터 에러는 범하고 마네요. 의욕은 좋습니다만, 그보다는 타구 판단이 더 중요한데 말이죠. 이중호 선수의 발로는 잡기 힘든 볼이었어요.”
“그렇습니다. 한 점을 내고도 원아웃에 주자 2,3루 절호의 찬스를 맞는 안강피그스입니다. 마크트웰 투수, 1회부터 커다란 위기입니다.”
“에이스급끼리 맞붙는 타이트한 경기에서는 수비력이 승패의 향방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중호 선수, 그동안 상당한 타격에 수비도 괜찮았는데요. 자신의 능력을 너무 믿었을까요?”
마크트웰은 생각지도 않은 실점과 계속되는 위기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포수의 사인을 바라보았다. 5번 강수성 역시 0.322의 타율에 18홈런을 기록 중인 강타자였다.
마크트웰과의 상대 전적도 0.275로 상당히 좋은 편이다.
강길만은 최대한 어렵게 가는 길을 택했다. 볼 질에 따라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볼넷을 주더라도 다음 타자 김규진과 상대할 생각이었다.
‘만루 작전이 최선이다.’
팡.
볼.
강길만이 바깥쪽으로 빠져 앉은 것은 당연했다. 마크트웰 역시 강길만의 의도대로 던져서 볼넷을 내줬다. 1회초 원아웃 만루의 위기.
삼호슈퍼스타즈의 배터리가 고른 김규진은 0.265의 타율에 마크트웰과의 상대 전적도 2할 초반에 그칠 만큼 강속구에 약점을 보이는 선수였다.
하나, 아무리 상대 전적이 좋아도 이런 위기에선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마크트웰도 신중하게 사인을 받고 와인드업을 했다.
팡.
스트라이크.
거포가 아닌 김규진의 약점을 몸 쪽으로 간파한 강길만의 생각이 적중했다. 김규진은 배트를 내밀 생각도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런 뒤, 원 스트라이크를 잘 잡아놓고 마크트웰의 제구가 흔들렸다. 연속 세 개의 볼을 던진 것. 강길만이 급히 타임을 외치고 마운드로 올라갔고 이계현 투수 코치도 올라왔다.
“마크, 구위 좋으니까 자신 있게 던져. 점수 내줘도 괜찮아.”
끄덕끄덕.
이계현 코치는 마크트웰의 눈을 보고 고개를 마주 끄덕여준 후, 마운드를 내려왔다. 평소 자신 있어 하던 마크트웰의 눈빛이 아니다.
1회부터 실점에 만루 위기가 이어지는 건 처음이어서 일까. 강길만을 돌려보내고 숨을 몰아쉬던 마크트웰이 와인드업을 했다. 그리고,
틱.
김규진이 하나를 더 기다리지 않고 과감하게 배트를 내밀었다. 3루 주자가 스타트했고 공은 유격수 쪽으로 바운드를 튀기며 느리게 굴러갔다. 김규진이 힘껏 휘두른다고 휘둘렀으나, 번트를 댄 것과 같은 볼 속도와 코스였다.
“안강피그스 3루 주자, 홈인! 유격수 이정우 1루로 던져 타자 주자를 아웃시킵니다. 아, 이렇게 되면 번트를 댄 것과 같은 결과입니다. 투아웃에 주자 2, 3루! 위기가 계속되는 삼호슈퍼스타즈 마크트웰 투수입니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타구 속도가 더 빨랐으면 6-4-3 병살타 코스인데요. 느린 타구 속도 때문에 타자 주자만 아웃이 되었네요. 안강피그스 오늘 경기가 잘 풀리는데요? 그에 비해서 삼호슈퍼스타즈는 수비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어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수비입니다.”
그랬다. 해설자의 말처럼 수비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었다.
1선발인 마크트웰이 1회부터 난조를 보이고 거기에 운마저 따라주지 않으니 삼호슈퍼스타즈의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봉호 감독은 이마를 찌푸린 채 마운드를 주시하고 있고 이계현 코치는 안절부절 못하며 난간을 잡고 한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
따악.
깨끗한 안타가 터졌고 우익수 이중호가 공을 잡아 홈으로 뿌리고 있었다.
이미 3루 주자는 들어온 상황이었고 2루 주자 역시 투아웃이므로 볼 것도 없이 스타트를 빨리 끊고 홈으로 내달렸다.
이중호가 수비에 재능이 있고 강견이지만 2루 주자의 슬라이딩 타이밍도 나쁘지 않다. 홈 플레이트에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었고, 잠시 머뭇거리던 심판의 손이 들렸다.
아웃!
그나마 이중호의 송구로 공수 교대가 되었으나, 1회에만 3실점을 한 마크트웰은 굳은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안강피그스의 선발을 허덕수였다.
12승 3패에 2.84의 방어율로 안간피그스의 3위를 견인하고 있는 선수였다. 선발로 나서는 날의 승률도 높아서 허덕수가 나오는 날이면 야수들이 ‘아, 오늘은 이기겠구나’ 할 정도라니 그동안 그가 쌓아온 신뢰를 짐작케 한다.
팡.
예상대로 허덕수는 초구로 145km의 묵직한 공을 뿌리며 이정우를 돌려세웠다. 이어 다음 타자들을 간단하게 삼자범퇴 시키고 밝은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안강피그스의 박재신 감독은 싱긋 웃으며 허덕수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허어, 오늘 경기는 쉽게 끝나겠군. 허덕수야 6회까지는 무너질 리가 없고 상대 선발은 저 지경이니 불펜만 잘 투입하면 되겠어.’
박재신 감독이 믿는 필승조의 ERA가 2점 대였으니 믿을 만도 했다. 허덕수가 6회까지만 막아주면 나머지는 1이닝씩 돌아가며 막을 수 있다.
생각하면 참으로 간단하다.
삼호슈퍼스타즈가 전통의 약팀이니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박재신 감독은 시즌 초반 최 하위권에서 어느덧 4위까지 치고 올라온 삼호슈퍼스타즈라는 팀의 저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생각처럼 마음대로 되는 팀이고 야구였다면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4일을 휴식한 허덕수를 하루 앞당겨 투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박재신 감독의 안이한 생각과 투수를 당겨 쓴 행동은 다분히 이율배반적이다.
그만큼 삼호슈퍼스타즈를 꺾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으면서도 내심은 예전의 약 팀이었던 이미지를 애써 떠올려 보는 것이다.
박재신 감독의 그런 생각은 2회 말 수비에서 보기 좋게 깨지고 있었다.
일단은, 이중호가 허덕수의 초구를 두들겨 2루타로 단숨에 득점권 찬스를 만든 거였는데 실은 이중호보다 그 뒤에 나오는 타자가 골칫덩이였다.
그 타자는 바로 성낙기.
투수로 두각을 나타내더니 어느 날 갑자기 대타로 나와 홈런을 쳤고 나중엔 올스타브레이크에 홈런레이스 참가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뿐이면 말을 안 하지.
후반기엔 아예 투수와 지명타자를 병행하다시피 하면서도 홈런을 자그마치 10개나 터뜨렸다. 특히 득점권 타율이 4할을 넘어가는 중이다.
허덕수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성낙기를 보았고 신중하게 첫 구를 바깥쪽 슬라이더로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