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046화 돈 먹은 거 맞지? 6
팡.
성낙기가 이번엔 몸 쪽으로 던져 카운트를 잡으려 했지만, 주심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던진 포심패스트볼 역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그러나 볼이 선언 되었고 성낙기와 이두열은 혼란스러웠다. 바깥쪽과 몸 쪽이 모두 인색한 경우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뭐야, 또 볼이야?”
더그아웃에서 보던 허봉호 감독도 놀랄 만큼 잘 제구 된 슬라이더가 또다시 볼 판정을 받았다. 의도치 않게 스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만들어졌고 마운드에 선 성낙기는 슬슬 스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팡.
스트라이크.
팡.
스트라이크.
성낙기는 작심하고 퀘이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을 연달아 한가운데로 던졌고, 그럼에도 타자는 배트를 내밀지 않았다.
스리 투 풀카운트에서 무슨 공을 던질까 생각하다가 가장 제구력이 올라와 있고 타자가 속기 쉬운 체인지업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이두열도 같은 생각인지 사인이 체인지업이다.
팡.
볼넷!
몸 쪽으로 깊지 않게 형성되었고 높이도 타자 허벅지로 떨어진 체인지업조차 볼 판정을 받았다. 성낙기는 어이가 없어서 주심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스크 뒤에 숨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다.
“아니, 이게 안 들어 왔다고요?”
“그래, 조금 벗어났어.”
“홈플레이트에 정확히 걸쳤는데 뭐가 벗어났단 말입니까. 이건 너무 하잖아요.”
“니가 심판할래? 응?”
이두열이 항의를 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이동연 주심이다. 별 볼일 없는 실력으로 90년대에 이 팀, 저 팀 떠돌다가 일찌감치 은퇴하고 심판으로 길을 틀었는데, 설화가 끊이지 많은 심판이었다.
작년에도 스트라이크 존이 들쑥날쑥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고 특히 1, 2루심을 보면서 숱한 오심으로 야구팬들의 원성은 물론, 2군 심판으로 밀려나는 징계를 받은 바도 있을 정도였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시작하는 낌새가 보인다.
‘아, 시바… 도대체 어디에 던지라는 거야.’
이 정도의 스트라이크 존이라면 성낙기가 노력해 온 제구력은 별 쓸모가 없게 된다. 성낙기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음 타자를 맞았고, 거의 가운데로 형성된 공 두 개를 던져 투 스트라이크를 만들었다.
다음 공 역시 같은 코스로 퀘이크 볼을 던졌지만,
따악.
파울.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못 치는 타자는 없다. 더구나 프로야구 선수들이다. 변화가 좋고 구속이 빨라도 정 가운데는 위험하다.
5번으로 나온 채철균은 만만한 타자가 아니니 더 그렇다. 제 4구 라이징패스트볼을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던졌지만 또다시 1루 쪽으로 커트해 낸다.
문제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라인에서 야구 공 두 개 이상, 가운데로 몰린 코스다 보니 언터쳐블급 구질인 라이징패스트볼도 딱딱 커트가 된다는 것이다.
-야, 이럴 땐 체인지업 던져. 그거면 바로 삼진이다.
헤이드 존이라면 이런 경우에 자신의 주 무기를 강조했을 것이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좋아, 체인지업이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가까스로 채철균을 잡아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나치게 좁아지고 불규칙적인 스트라이크 존에 성낙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가운데로 형성된 공이 맞아나가 3유간을 뚫었고 다음 타자에게는 최대한 제구 된 공을 뿌렸으나, 또다시 스리 볼, 투 스트라이크 풀카운트로 몰렸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허봉호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튀어 나왔고 코치들이 우르르 따라 나왔다. 삼호슈파스타즈 팬들도 합세해 야유를 보냈다. 허봉호 감독은 주심에게 머리를 바짝 들이대며 따졌고 이동연 주심도 같이 소리쳤다.
“스트라이크 존이 왜 이래. 어디다 던지라는 거야.”
“존이 뭐가 어떻다고 그래요. 들어오는 대로 하고 있는데 뭔 소리야.”
“아니, 지금 가운데 아니면 다 볼이잖아. 투수가 던질 곳이 없어.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거요?”
“이전 주심 권한이야, 볼이니까 볼 판정을 하는 거지. 볼인데 스트라이크라고 할까?”
“어지간히 하라는 얘기야, 이건 누가 봐도 편파 판정이라고. 계속 이러면 문제 제기 할 거니까 알아서 해.”
“맘대로 해보슈. 어디 주심한테 대들어서 경기 잘 풀리는지 보라지.”
“…너 지금 선배가 우습게 보이지. 주심 자리 차고 앉아 있으니까 위아래도 없어지네. 화, 시팔. 이 개새끼를 죽이고 깽값을 물어? 말어?”
“뭐, 뭐요? 이 개새… 끼? 시발, 은퇴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선배 찾고 있어. 퇴장!”
급기야 말싸움이 허봉호 감독의 퇴장으로 이어졌고, 허봉호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의자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허봉호 감독이 빠진 채로 경기는 속개되었고 풀카운트에서 던진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이 볼 판정이 되면서 원아웃 만루가 되어버렸다.
***
“이동연, 돈 먹은 거 맞지?”
경기가 끝나고 마영진 단장은 직원들에게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마케팅과 관리, 운영 팀장과 과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모인 자리였다.
단장이 되고 나서 가장 뼈저린 패배였다. 김아경에게서 전화가 왔었고 김현중 회장이 경기를 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말을 전했다.
“둘 중 하나입니다. 토토 아니면, 머니죠.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고민영 마케팅 팀장이 말했다.
본사 영업부 대리로 근무하다가 프런트에 지원했는데,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대학 야구단까지 뛴 데다 리틀 지도자 자격증까지 갖춘 스펙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나, 여자가 과연 야구판에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김아경의 추천이 없었다면 아마 야구단 입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스트라이크 존은 정말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식이면 제 아무리 강한 팀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냥 두면 또 그럴 겁니다. 고발은 못해도 제소는 해야겠습니다.”
차기식 차장이다. 마연진 단장의 후배로 불같은 성격이 문제지만, 의리파이면서 야구단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치우는 불도저다. 마영진 단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프로야구 협회에 제소한다 해도 얻을 게 많지 않을 텐데? 일단은 증거가 불분명하지. 루심이라면 오심이 명백히 가려지는데 스트라이크 존, 이거는 주심의 재량이라고 오리발 내밀면 그만이거든.”
“그럼, 어떻게 할까요.”
“KBO에 항의는 해야지. 대신, 괘씸죄에 걸리더라도 한번만 더 그러면 검찰에 고발해 버릴 거야. 오늘부터 운영부는 이동연 오심 부분을 집중적으로 찾아 줘. 앞으로도 그 사람 나오는 경기 중에 재량권 남용이나 비합리적인 부분도 편집해서 모아 놓도록 해. 이건… 구단주 지시 사항이야.”
이렇게 따로 회의를 열어야 할 만큼 경기는 비정상적이었다.
2회 원아웃 만루에서 성낙기가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진 공이 연속으로 볼 판정을 받았고 이어 한가운데 던진 공이 2루타가 되면서 주자가 모두 들어왔다.
1루타로도 막을 수 있는 타구의 낙구 지점을 잘못 잡은 좌익수 김화성이 앞으로 돌진하다가 키를 넘어갔고 펜스까지 데구르르 구르는 틈에 주자 싹쓸이 2루타가 완성되었다.
다음 타자에게 던진 공이 또다시 볼이 되자 성낙기는 폭발했고 마운드에서 주심 쪽으로 걸어가며 항의했다.
“그렇게 안 보이면 돋보기를 하나 사 드릴까요?”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퇴장!”
그렇게 허봉호 감독에 이어 성낙기가 퇴장 당했고 이계현 투수 코치는 선수들을 더그아웃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다가 경기가 속개되었지만, 추격조 투수들을 내보낸 끝에 2:11로 경기가 끝났다.
원정 경기 숙소로 돌아온 성낙기는 이중호, 구문철, 그리고 엔서니페킨스와 맥주를 마셨다. 엔서니페킨스 또한 열이 받은 나머지 더그아웃에 있는 물통을 집어 던지고 고함을 마구 질러댔었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한, 게 눈깔 주심이 많은 마이너리그에서도 이토록 편파적인 판정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오늘 주심 뭐야? 이런 판정은 고교 야구에서도 못 겪어봤어. 이건 프로 야구가 아니야.”
이중호가 말을 마치고 열불이 나는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중호, 나도 맞는 생각이다. 주심이 이상해. Match fixing(승부조작) 맞아. 증거 많아.”
엔서니페킨스가 이중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성낙기의 공을 스트라이크로 잡아주지 않았을 뿐더러 타자들에게는 태평양 존이었다.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은 비슷하게만 들어와도 손을 들기 일쑤였으니 엔서니페킨스 같은 좋은 타자도 루킹 삼진을 두 개나 당했다.
허봉호 감독이 퇴장 당하고 성낙기까지 퇴장을 당한 2회에 사실상 경기가 끝나 버렸다. 에이스급 투수가 퇴장 당하고 스윙맨으로 필승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3, 4회에 점수를 따라갔지만 이내 실점하고 말았다.
“말도 마, 나도 일본에 있을 때 당했어. 쪽바리 심판들 내가 한국인이라고 확실한 공 아니면 스트라이크를 안 잡아줘서 애 먹었지. 당연히 항의했어. 그 덕에 퇴장도 여러 번 당했는데 나중엔 같은 팀원도 날 경원시하더군. 심판 말이 법인데 그걸 왜 안 따르느냐는 거야. 몇 번 그러고 나니 정이 뚝 떨어졌고 마침 스카우트의 제의가 있어서 여길 오게 됐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오늘은 그때보다 심해. 이건 아예 대놓고 도둑질하는 수준이야.”
구문철이 여럿의 말을 듣더니 일본 독립 리그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좀체 자기 이야기를 않는 구문철에게도 오늘의 편파 판정은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성낙기도 구문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야아, 가끔은 편파 판정도 당할 만한데? 덕분에 네 이야기도 듣고 엔서니랑 이렇게 좋은 시간도 갖고 말이야. 이러면서 팀워크가 굳어진다면 난 크게 불만 없다. 그러고 보면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따라온다는 게 정말이었네. 우리 아버지가 늘 강조하시는 말씀이거든.”
“애는 속도 좋아. 타자들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멘탈이 안 나갔네. 역시 이래서 내가 성낙기를 좋아하는 거지.”
이중호가 성낙기의 말을 듣고 감탄하는 동안, 삼호 그룹의 전무 하인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의 고향 후배 최민후 서울지검 부장검사였다.
“오, 최 검사. 나 하인호일세.”
-아이고, 선배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이 사람, 부장 되더니 얼굴 보기 힘들군. 라운딩 한 번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아하하, 죄송합니다. 요즘 워낙 뒤숭숭한 일들이 많아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헌데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선배님께서 전화를 다 주시고.”
“흠… 좀 말하기 애매하긴 한데, 자네 혹시 승부조작 들어 봤나?”
-승부조작이라면……?
“우리 삼호슈퍼스타즈 얘길세. 그걸 살펴봐 줬으면 하네만. 우리 법무 법인이 직접 나서기엔 겸연쩍기도 하고 그래서 말이지.”
-아, 그렇습니까. 제 분야는 아니지만 내사는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내일 접수하도록 하겠네. 워낙 회장님이 야구광이라서 나도 난감해. 잘 부탁하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회장님 취미야 워낙 유명하시죠, 하하.
“고맙네, 자네처럼 유능한 사람이 우리 팀에 어서 들어와야 하는데… 흠.”
-말씀 감사합니다. 차질 없도록 지시해 놓겠습니다.
김현중 회장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인호 전무는 자신의 역량으로 천규순의 비리를 파헤칠 생각이었다. 증거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거지만, 어설프게 걸어서는 파장이 없을 수 없다.
하인호 전무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일단, 계좌를 털어보면 무엇이 나와도 나올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천규순 주심의 계좌에 은성캣츠의 돈이 흘러들어 간 내역이 발견되었고 천규순은 곧바로 구속되었다.
천규순이 먼저 돈을 요구했고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 받게 될 불이익 때문에 돈을 줬다고 판단한 검찰은 천규순을 가해자로 은성캣츠 구단은 피해자로 보고 돈을 송금한 운영 팀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