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045화 돈 먹은 거 맞지? 5
성낙기에 대한 관심은 포털 사이트에 도배된 기사와 수많은 댓글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반응은 역대급 선수가 나타났다는 거였고 야구 천재도 부족해 괴물로 부르기 시작했다.
미국의 NBC 스포츠 채널에서도 성낙기의 도루 장면이 소개되었다.
투수임에도 타격과 도루 능력을 갖춘 특이한 야구 선수,
그게 성낙기였다.
간혹, KBO리그의 배트 던지기 세레머니가 화제가 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십거리였고 순수한 야구 능력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독님, 괜찮을까요?”
“뭐가?”
“온통 성낙기 이야기뿐입니다. 이거 띄워도 너무 띄우는데요. 이러다가 팀워크에 지장이 없을지 말입니다.”
이계현 투수 코치는 은근히 걱정이었다.
팀원인 선수가 야구를 잘하는 건 좋지만 타자가 아닌, 투수의 타격과 도루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위화감이 생길까도 걱정이고 투타를 겸업했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하나마나한 짓이기 때문이다.
“미리 걱정할 거 없어. 실력대로 가는 거야. 투수도 타격이 좋으면 타자를 할 수 있는 거고 반대의 경우도 같지. 뭐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아무래도 풀타임은 처음인지라 체력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스타의 자질이 있으면 키워주는 게 맞아. 그리고 체력이 떨어지면 쉬면되는 거지. 난 가을 야구를 위해서 야구를 하지는 않아. 선수들이 마음껏 야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우리 역할 아니겠어? 그러다가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란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이계현 코치는 허봉호 감독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모시는 수장의 야구관을 알 것 같았다. 가을 야구는 안중에도 없다는 저 태도를 보면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이계현 코치가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은 어제 보았던 락커 룸의 분위기가 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냥 들뜨고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성낙기가 특별히 완투를 했다고 해서 거들먹거리거나 까불지도 않았는데, 3연전 중 상대적으로 활약이 미미했던 선수들의 말없고 위축된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야구가 안 되면 기분이 잡치는 것도 당연한 거고.’
이계현 코치는 허봉호 감독의 말을 듣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할 일은 겉도는 선수를 북돋아주고 어떻게든 끈끈한 원 팀을 만들어 나가는데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쇄도하는 성낙기의 인터뷰 요청을 적절한 선에서 끊어줘야 하고 오늘 들어온 만능 면도기 광고제의 역시 단장이 수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치솟는 팀의 인기와 차츰 나아지는 성적에도 골치가 더 아픈 건 참 아이러니하다고 이계현 코치는 생각했다.
어쨌든 삼호슈퍼스타즈는 위로 치고 올라갔다. 8월이 되자 화산레빗스를 넘어 어느새 4위 은성캣츠마저 2경기 차까지 쫒아왔다.
오늘 상대는 바로 그 은성캣츠.
삼호슈퍼스타즈는 연진맘모스를 상대로 2연승을 하고 3연승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 3연전을 스윕하면 순위가 뒤바뀐다. 첫 경기 선발은 성낙기였다.
은성캣츠의 선발은 아도니스 마르테였는데 상당한 수준의 상대다.
거금 160만 달러에 세금을 감해주는 조건에 옵션이 붙어서 실제 수령액은 200만 달러를 넘어선다는 게 중론이다. 돈으로 실력이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현재까지의 성적은 돈을 투입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7월까지 9승 5패에 방어율 2.86이면 근사하다. 물론 7승 2패 1.78에 3홀드 5세이브의 성낙기보단 못하지만 말이다. 성낙기의 스탯도 그동안 더 올랐다. 우선은 체력이 77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는, 포심패스트볼을 77개나 전력투구할 수 있는 수치다. 보통의 투수들이, 상대의 클린업 트리오에게나 위기 상황일 때만 전력투구하는 패턴을 유지하면서 120구까지 던지는 걸 감안할 때 성낙기 역시 완급 조절만 잘하면 충분히 120구를 던진다는 계산이 선다. 강속구 역시 (77/100)으로 오른 상태였다.
-성낙기 이제 최고 구속이 142km구나. 거기에 전광석화(電光石火) 스킬을 쓰면 149km까지 던진다는 거고.
-그렇지? 다 컸어. 120km에서 빌빌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아마, 오늘도 완투는 충분할 걸? 말도 안 되는 퀘이볼에 라이징패스트볼까지 있으니까.
-맞아. 헤이드 존, 그동안 고생했다. 띨띨한 놈 사람 만드느라고.
-그래, 드랙실바야. 너도 수고했다. 그래도 후계자를 남기니 보람이 없지는 않지?
“아이 참, 무슨 얘기들을 하시는 거예요. 누가 들으면 내가 정말 띨띨한 줄 알겠네.”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으니 띨띨한 거지. 우린 지금 너와 헤어지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네? 뭘 헤어져요?”
-그동안 서로 노력한 결과, 넌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게 되었어. 그렇다면 우리는 필요가 없는 거지.
“무슨 말입니까. 아직 메이저리그 도전도 못했는데 가시겠다고요?”
-어차피 기초는 다져졌고 앞으론 시스템과 함께 커나가면 되는 거다. 마운드 운용 능력도 그만하면 제법이고.
“두 분은 어차피 귀신인데 헤어지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나 죽을 때까지 붙어 있는 거 아니었어요?”
-응, 아니었어. 우리 귀신도 있잖아. 할 일이 없으면 심심해서 두 번 죽는 거란다. 다른 보람 있는 일을 찾아 봐야지.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에 경기가 시작되었고 타석에 타자가 들어섰다. 성낙기는 충격을 받은 듯 균형이 흔들렸고,
팡.
볼.
연달아 볼을 네 개나 던졌다. 첫 타자 볼넷. 성낙기가 두 사람을 만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중들은 의외의 볼넷에 웅성거렸고, 형편없이 제구 된 볼을 가까스로 막아낸 이두열도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실바, 그만 가자. 애가 정신을 못 차린다.
“가지 마요.”
-헤어질 때는 간결한 게 좋아. 그렇다고 영원히 헤어지는 건 아니야. 혹시 아니? 네가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도 하면 나타날지.
“안 돼!”
성낙기가 마운드에서 허공을 향해 외치자 경기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마치 신인류를 목격한 것처럼 성낙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코치, 전에 내가 말했었지. 성낙기 데리고 가 봤어?”
“어딜… 말입니까.”
“어디긴 어디야. 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했잖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했습니다.”
“사람 참,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증상이 더 심해지면 그땐 신의가 와도 안 된다는 거 몰라?”
더그아웃에서는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코치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 와중에 실바와 존은 공중에 떠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낙기는 그들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었는데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안녕.
-안녕.
실바와 존은 점점 멀어져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그리고 마침내 흐릿해졌다.
성낙기는 모자를 벗고 허공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성낙기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성낙기 선수, 갑자기 모자를 벗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더니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마운드 뒤쪽엔 펜스 위의 관중밖에 없어요. 팬들에게 인사를 한 걸까요?”
“…네에…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허엄… 잘 모르겠네요.”
타임!
보다 못한 주심이 엉뚱한 행동으로 시간을 끄는 성낙기에게 경고를 날렸고 성낙기는 눈물이 맺힌 채로 포심패스트볼을 뿌렸다.
팡.
142km
팡.
퀘이크 볼(3cm/5)
팡.
라이징패스트볼(6cm/10)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
다음 타자를 3구 삼진으로 돌려 세운 성낙기는 은성캣츠의 클리업 트리오를 맞았고, 최고의 구속과 변화구로 연속 삼진을 잡아냈다.
선두 타자 볼넷 이후, 3타자 연속 삼진으로 1회 초를 깔끔하게 지우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저 성낙기라는 선수는 늘 예측을 벗어나는군.”
“자네의 그런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 흥미로운 일인데? 기억나나? 언젠가 랜디존슨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지.”
“그랬던가? 어쨌든 KBO리그는 무척 인상적이야.”
“인상적이면서도 묘하지. 성낙기라는 투수, 봄엔 84, 5마일쯤 던진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88마일이 넘으니까. 게다가 이전 경기들에서 깜짝 투를 던지곤 했는데 자그마치 92마일이었다는군.”
“불가사의한 일이야. 구속이 계속 빨라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혹시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알고 있나?”
“흠… 어디 보자. 어깨 회전근개에 팔꿈치 인대 수술, 그러니까 토미 존 서저리로군.”
“토미 존 서저리라면 최대 4마일(6, 7km)까지는 늘 수도 있지만 이 선수의 경우는 거의 10마일(16km)에 가깝기 때문에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거지.”
“글세… 한국의 스포츠 의학이 그토록 대단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
“맞아, 수수께끼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
LA에인절스(Los Angeles Angels of Anaheim)의 톰과 워싱턴 내셔널스(Washington Nationals)의 울프 마이어의 대화였다.
그들은 포수 뒤편의 테이블 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아까 성낙기의 묘한 행동과 그 후의 삼진 퍼레이드까지를 모두 본 터였다.
스카우트인 그들이 오늘 은성캣츠의 홈구장인 잠실에 나타난 이유는 한때 mlb에서 뛰었던 마크트웰 등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거포인 이중호와 요즘 갑자기 떠오르는 성낙기도 그 안에 포함돼 있었다.
1회 말이 시작되었고 아도니스마르테 역시 삼호슈퍼스타즈의 타선을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스카우트가 보는 앞에서 깔끔한 출발이었다.
KBO에 온 외국인 선수라면 누구나 mlb로의 복귀를 꿈꾸기 때문에 스타우트가 떴다 하면 최선을 다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마이너리그 출신이 KBO에서 기량이 늘어 mlb와 계약을 맺은 사례로 여럿이니 KBO는 말하자면 돈도 벌면서 mlb 무대를 위한 중간 기착지로 훌륭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뭐, KBO로서는 장단점 코치해 주고 쓸 만해 졌을 때, 빼앗기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2회 초에 성낙기가 마운드에 오르자 은성캣츠의 타격 코치 손정교는 타자들을 불러 모았다.
“자, 1회처럼 휘두르면 오늘 못 이긴다. 내 말 잘 들어. 투 스트라이크 이전엔 웬만하면 치지 마. 또 하나, 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공은 무조건 버려. 알아들었어?”
“…네.”
“대답이 시원찮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2회에 나온 타자들은 1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투 스트라이크까지 치지 말라는 말은 야구를 하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어서 내심 불만이면서도 그 말을 어길 수는 또 없어서 소극적인 배팅 모드로 돌아섰다.
성낙기는 4번 타자 이강환을 맞아 첫 구로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제구만 제대로 되면 좀처럼 장타를 맞지 않는 코스다.
팡.
이두열은 바깥쪽으로 내민 글러브를 빨리 거둬들이지 않았다. 방금 공은 분명 스트라이크 존에 걸쳤다고 봤는데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1회엔 타자들이 배트를 휘둘러 줬기 때문에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할 새가 없었다.
성낙기 역시 공을 돌려받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바깥쪽에 인색한 주심이 있는 반면, 몸 쪽에 인색한 주심도 있다. 높은 공에 후한 주심이 있고 낮게 제구 된 공에도 손이 잘 올라가는 주심도 있다.
어쩌면 주심의 성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조금씩은 선호하는 코스가 차이가 난다. 그래도 스트라이크 존이 두 팀에 일정하게 적용되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이해하고 넘어간다.
가령, 바깥쪽에 인색한 주심은 몸 쪽이 후한 경우가 많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높은 공을 안 잡아주는 주심은 상대적으로 낮은 공에 후하다고 봐야 한다.
만약 모든 코스에 인색하거나, 모든 코스에 후한 주심이 있다면 그는 프로야구 협회나 심판진의 시즌 계획을 무시하고 혼자만의 스트라이크 존을 만들게 되는 셈이어서 타자와 투수, 또는 KBO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