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044화 돈 먹은 거 맞지? 4
성낙기가 3루까지 가는 동안 화산레빗스의 팀워크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야구 역시 멘탈의 게임이다. 성낙기가 안타를 치고 나간 후, 좌익수의 안일한 플레이로 안 내줘도 될 2루를 내줬고,
“fucking(빌어먹을)…….”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쉬길버트는 분명 그런 소리를 냈고 야수들 역시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 3루 도루를 훔치고 세이프 판정을 받았을 때도 3루 도루를 저지하지 못하는 포수를 보고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진동만은 진동만대로 셋 포지션을 1.3초 내로 끊지 못했기 때문에 도루를 허용한 것이라고 믿었다.
점수를 준 것은 아니지만, 위기를 초래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했기에 서로의 감정이 미묘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타자 김석문이 6구만에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화산레빗스 배터리는 서로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감정의 날이 서 있었다.
“성낙기 선수가 의도한 걸까요?”
“뭘?”
“우연인지 모르지만 어제 경기도 그랬고 오늘도 묘하게 상대 배터리를 흔들고 있어요. 도루를 하는 타이밍도 절묘하고.”
“네 말대로 정말 그랬다면 성낙기는 타고난 야구 선수이기 이전에 천재라고 봐야지. 그런데 과면 1군에 갓 올라온 선수가 그런 걸 노리고 베이스러닝을 할 수가 있는 걸까?”
“전 생각보다 영리한 선수라고 봐요. 좌익수의 보이지 않는 실수가 있었지만 보통은 2루까지 뛰지 못하는데 성낙기 선수는 승부를 건 느낌이 있어요. 연이은 도루도 그렇고요. 야금야금 금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둑이 무너지게 되어 있죠.”
“우리 딸이 야구를 아주 잘 아는구나. 역시 야구단에 보내길 잘했어. 성적도 쑥쑥 올라가는 중이고 말이야.”
김아경과 김현중 감독은 회장실 옆방에서 함께 TV를 시청하면서 성낙기의 등장에 흥미진진해 했다. 비록 2회는 득점 없이 끝났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더 기대되는 오늘 경기다.
“참, 성낙기 지명타자는 네 생각이냐?”
“음… 아니에요. 저도 성낙기 선수가 웬만한 타자보다 낫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엔트리에 넣으라는 말은 못하죠. 허봉호 감독님이 저지른 일이에요.”
“그래? 그 사람 참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과감해도 너무 과감해.”
“그 과감함으로 2군을 2위까지 이끌었죠.”
“인정해야지.”
두 팀 모두 3회까지 점수가 나지 않았다. 대충 예상된 결과였다.
공성진은 워낙 잘 알려진 거물급 투수였고 그동안 보여준 능력을 감안하면 7회는 무난히 막을 걸로 보였다.
조쉬길버트 또한 KBO에 안착한 이래로 퀄리티스타트 이상의 경기 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5회부터 약간의 변수가 생겼는데, 2회에 화산레빗스를 흔들어 놨던 성낙기가 선두타자로 나선다는 거였다.
‘또 이 새끼야?’
포수 진동만은 성낙기가 타석에 들어서자 마스크를 벗고 자기 앞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러고는 배트를 휘두르는 성낙기를 힐끔 쳐다봤다. 긴장한 구석도 별로 없고 아주 평온하고 여유로운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 아까 뭘 쳤더라. 맞아,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걷어 올려 안타를 만들었지. 최고 레벨에 도달한 타자가 아니면 보여주기 힘든 퍼포먼스였다.
“넌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하냐?”
“아, 죄송합니다. 아까 도루로 인사드린 줄 알았는데… 부족했나 봅니다. 그럼, 이번엔 연속 2도루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뭐, 2연속 도루?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동안 누구는 앉아서 노는 줄 아나.”
“놀게 만들어 드리죠.”
“아니, 근데 이 새끼는 꼬박꼬박 말대꾸야. 너 야구 그렇게 배웠어?”
포수 진동만은 성낙기를 흔들기 위해 시비를 거는 거였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성낙기는 조쉬길버트가 초구로 던진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밀어 쳐 안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루에 도착한 성낙기가 진동만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저런 씹새가…….”
진동만은 투수에게 견제 사인을 보냈고 조쉬길버트는 연속으로 1루 견제를 했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음 김석문의 타석에 1구는 바깥쪽 피치아웃. 하지만, 뛸 듯하던 성낙기는 뛰지 않았고 진동만은 머쓱하게 2루로 던지려던 송구 동작을 멈췄다.
제 2구에서 김석문은 번트 자세를 취했고 내야수들은 전진 수비를 펼쳤다. 그리고 조쉬길버트가 와인드업을 하는 순간,
“악, 또 뛴다.”
성낙기는 스타트를 끊었다. 김석문은 그사이 1루 쪽으로 번트를 댔고 공은 라인을 따라 떼굴떼굴 굴렀다. 공 스피드를 감안해 마지막 순간 배트를 거둬들였기 때문에 공은 투수와 포수 사이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마이!”
진동만이 마스트를 벗고 공을 주워들었을 때, 성낙기는 2루를 통과하고 있었다. 진동만은 망설임 없이 2루로 공을 뿌렸다.
감히, 내 앞에서 또 3루를 훔치려 들어?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나머지 타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2루와 3루 사이에서 런다운에 걸린 성낙기를 잡을 거라 상상했다.
그런데 진동만이 2루로 공을 던지려는 순간, 성낙기는 3루로 달리던 걸음에 급제동을 걸어 2루를 향해 되돌아왔고 송구가 2루에 닿을 때 성낙기는 슬라이딩으로 발을 베이스로 뻗었다.
2루심의 콜이 지체 없이 이루어졌다.
세이프!
무사 주자 1, 2루의 황금 찬스가 만들어졌다.
지나치게 성낙기를 의식한 진동만의 판단 착오였다. 덕분에 김석문은 1루에서 더그아웃을 향해 세레머니를 할 기회를 얻었고 투수인 조쉬길버트는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 포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운드로 되돌아가 죄 없는 흙만 스파이크로 파헤쳤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음 타자 이두열이 타석에 들어서서 한 마디 거들었다.
“하, 성낙기 저 자식 상도덕도 모르나. 무식하게 베이스를 훔쳐대면 뭐 먹고 살라는 거야? 미안합니다 선배님, 제가 교육을…….”
“입 닥쳐!”
볼 카운트 투엔 투에서 조쉬길버트는 자신의 장기인 체인지업을 던졌다.
그의 주 무기인 체인지업은 포심패스트볼과 똑같은 투구 폼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분이 어렵고 타자에게 가까워질수록 느려지다가 떨어지는 변화로 높이만 일정하면 가장 속기 쉬운 구종이었다.
그런데 성낙기는 마치 다음 공의 구종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또다시 3루로 뛰었고 이두열은 헛스윙 했다.
그 스윙이 진동만의 송구를 약간이나마 지체시켰고 성낙기는 간발의 차로 3루에서 살았다.
“……!”
이두열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포수 진동만은, 타자를 잡았다는 기쁨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심정이었다.
아, 도대체 이틀 동안 3루를 3번이나 훔치게 내버려 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열을 받을 대로 받아서 경기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술이나 뒈지게 마시고 싶다. 저런… 쳐 죽일 놈.
***
다음 타자로 오늘 라인업에서 빠졌던 정영훈이 나왔다. 좌익수 김화성의 대타다. 노장 정영훈의 강점은 타격도 쏠쏠하지만 오랜 경력 탓에 얻은 전천후 수비였다.
3루를 맡기도 하고 외야수로도 쓰임새가 있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순간, 대타로 투입해도 부담이 없는 선수였다. 원 아웃에 주자 1, 3루로 외야플라이라도 쳐준다면 오늘 경기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괜찮냐?”
이번엔 정영훈이 포수 진동만에게 물었다. 그로서는 같은 베테랑급인 진동만의 멘탈이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진동만은 그런 진심 어린 걱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 참, 선배까지 왜 이러십니까. 사람 가지고 놀면 재밌어요?”
“어쭈, 애 봐라. 월광고 직계 선배한테 기어오르네. 끝나고 남아 새끼야.”
“제가 그만… 미안합니다.”
“됐고, 치기 좋은 볼이나 줘.”
정말 야구하기 싫은 날이다. 이놈 저놈한테 다 당하고 막판엔 고교 선배라는 작자까지 시비를 턴다. 이게 다 저 성낙기 때문이다.
진동만은 조쉬길버트에게 3루 견제 사인을 보냈다. 사인을 받은 조쉬길버트가 짜증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하다하다 백인 투수 새끼까지 말을 안 들어 처먹네.’
정영훈은 조쉬길버트의 3구째 공을 쳐서 크게 바운드 된 유격수 앞 땅볼을 만들었고 그사이 성낙기는 홈을 밟았다. 타자는 아웃되고 1루 주자는 2루에서 세이프.
투아웃에 2루의 상황으로 아직 찬스가 이어지는 가운데 요즘 컨디션이 올라온 이정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정우의 강점은 컨택 능력도 능력이지만 볼넷도 잘 골라내는 선구안이다.
그리고 그런 이정우를 맞아서 조쉬길버트의 열폭이 시작되었다.
1구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이 존에 걸쳤다고 봤는데 주심의 손이 올라가려다 말았다. 그 멈칫 하는 동작이 더 신경을 긁었다.
진동만은 공을 받은 뒤 미트를 스트라이크 존으로 미세하게 옮기면서 받은 동작 그대로 버텼고, 조쉬길버트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판정에 불만을 나타냈다.
주심인 박문식이 가만 보니 투, 포수가 쌍으로 지랄하고 있다.
2구째인 바깥쪽 슬라이더는 낮게 잘 떨어졌는데 기분 나빠서 손을 안 올렸고 3구째인 몸 쪽 패스트볼도 내키지 않아서 안 잡아줬다.
투수와 포수가 잔뜩 인상을 쓰고 더그아웃에서 감독이 불만을 나타내는 가운데 들어온 정 가운데 4구째 포심패스트볼은, 한참 생각하다가 마지못해 팔을 올렸다.
“스트… 라이크.”
볼 카운트, 스리 원에서 이정우가 친 공은 깨끗한 중전 안타로 연결되어 야수 선택으로 1루에서 살았던 이두열이 홈을 밟았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존에 걸쳤잖아요!”
마침내 포수 진동만이 폭발했고 조쉬길버트 역시 배터 박스 쪽으로 걸어오며 돈 먹었어, 돈 먹었어를 연달아 외쳤다.
얼마 전 주심으로 나왔던 심판이 각 구단과의 돈 거래로 영구 정지 및 구속까지 된 일이 있어서 심판에 대한 믿음도 많이 무너져 있었다.
“야, 인마. 니가 심판이냐? 응? 내가 볼이라면 볼인 거야, 알아?”
주심이 진동만에게 그렇게 말할 때,
“너 눈이 삐었어? 아우, 시발 엿 먹이는 거야, 뭐야!
감독인 김영춘이 뛰어나와 악을 써댔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이젠 모두 은퇴한 입장이고 같이 늙어 가는데 그런 말을 듣고 가만있을 박문식이 아니었다. 팔을 세차게 들어 경기장 밖을 가리켰다.
“퇴장!”
“두고 보자. 니가 언제까지 심판하는지 두고 볼 거다.”
김영춘이 돌아섰고 진동만은 그 틈에 주심에게 바짝 다가가 배로 밀면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관중석에서 캔이 두어 개 날아왔고 박문식은 두 번째 퇴장을 명령했다.
포수 진동만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면서 마스크를 벗어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에 세워진 철망으로 집어 던졌다.
“우우, 심판 물러가라.”
“저거 돈 먹었네, 개새끼.”
“저런 게 주심이야. 잡아 죽여!”
관중석에서 팬들의 고함이 빗발치는 가운데 백업이 포수 마스크를 썼고 조쉬길버트는 포수의 사인에 연신 고개를 젓더니 이한영에게 빗맞은 안타를 맞은 데 이어 투아웃 1, 3루에서 3번 타자 엔서니페킨스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순식간에 스코어가 4:0을 벌어졌다.
공성진은 침착하게 7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8회 원아웃에서 모창모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그리고 모창모, 구문철로 이어진 불펜에 그대로 셧아웃, 경기는 원사이드하게 4:0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2차전에서 성낙기는 선발로 나와 9이닝 동안 106개를 던지며 1실점을 하면서 2019년 시즌 처음으로 완투승을 거두었다. 게임 스코어 6:1로 3연전 스윕을 했고, 이 승리로 삼호슈퍼스타즈는 화산레빗스와의 게임 차를 1경기로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