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42화 (42/188)

# 42

042화 돈 먹은 거 맞지? 2

“너희들, 안 먹니?”

“저요? 사실은 오빠 오시면 먹으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응. 그렇구나.”

장하연은 주방으로 가더니 국수를 가져와 먹었다. 막 삶은 데다 국물은 멸치와 파, 생강 등이 어우러져서 매콤한 맛이 났고 그 위에 잘게 썰은 호박과 계란 부추무침까지 들어가 먹음직스러웠다.

“올해 수능 보니?”

“네, 아주 죽겠어요. 날마다 보충수업에 주말엔 학원에, 나머지 시간도 독서실에 있어야 하거든요.”

“넌 공부 잘한다며?”

“응, 오빠. 하연이 이번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이야. 아마 서울의 좋은 대학 가겠지.”

“넌?”

“나? 나야 뭐… 알잖아. 원래 공부와 담 쌓은 거. 엄마한테 일 배워서 국수나 말아야지. 장인정신으로 대를 이은 맛나국수, 어때?”

“그보다는 막걸리집이 낫지. 토종닭도 팔고 파전도 부치고… 내가 우리 팀 선수들 싹 끌어다가 매상 올려줄게.”

“에이… 씨. 농담한 거 가지고.”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장하연은 오랜만에 만난 덕분인지 낙기 오빠가 너무 멋있다는 둥, 홈런 레이스 아까워서 혼났다는 둥, 오빠가 우리 어릴 때 놀이 방해하던 그 오빠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둥, 하고픈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말을 하는 장하연의 눈빛이 어딘지 뜨겁다. 전에 준 곰 인형 때문인가?

성낙기는 서희와 장하연이 재잘거리는 틈에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가게에 들어온 초등학생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가게에서 한 시간 남짓 머문 성낙기는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장사가 바빠서 부모님과 얘기할 틈도 없고 실바와 존, 두 유령이 언제 어디든 성낙기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숙소 이외의 곳에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틀간 휴식인데 뭐할래?

“글쎄요, 뭘 할까요. 좀 쉬고 싶은데.”

-그래? 음,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왔으니 좀 쉬어도 되겠지. 하지만 넌 보통 사람과 달라. 죽으려다 살아난 몸이고 네 뒤엔 시스템이 있어. 즉, 쉴 필요가 없다는 거지.

“아이 참, 어깨는 시스템이 보호 한다 쳐도 지친 마음은 다르죠. 두 분은 스트레스도 안 받고 사셨나.”

-정 그렇다면 쉬도록 해. 이거 한 가지는 말해주지. 이제 우리가 떠날 때가 가까웠다.

“정말요?”

실바의 진지한 말에 성낙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래, 그동안 네게는 말 안했지만 우리의 역할은 네 구속이 충분히 올라오고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였지. 그런데 요즘 140km를 찍었고 전광석화 모드를 쓰면 147km까지 나올 정도로 공이 빨라졌어. 메이저리그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KBO에선 제구만 되면 통할 만한 구속이지. 어차피 공은 계속 빨라질 거고 제구도 계곡 좋아지고 있으니 우리의 존재 이유가 많이 약해졌다.

“그게 정말이라면 좀 아쉽네요. 메이저에 도전할 때까지는 계실 걸로 봤는데 말이죠. 아니, 영원히 내 뒤를 붙어 다니는 줄 알았죠.”

-이 슬픈 뉴스를 듣고 울지도 않네. 야, 실바야 내가 전에 말했지? 이놈은 우리가 떠나는 날 막걸리로 자축할 놈이라고.

“아이 참, 왜 그러세요. 가슴엔 홍수가 나고 있어요.”

-지랄, 가슴으로 우는 놈이 체온, 맥박, 숨소리가 그토록 평안하냐?

“그럼, 정확히 언제 가신다는 거죠?”

-그건 몰라. 우리도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신세거든. 네가 충분히 자리 잡을 때까지라고만 들었지.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넌 이미 자리를 잡았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언제 사라지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뜻이다.

“알겠어요. 놀라지 않을게요.”

-존, 들었냐? 놀라지 않는단다. 난 지금 이별이 다가옴을 느끼고 가슴이 미어지는데 말이야.

-흥, 너 하나 사라져 봐라. 쟤가 눈이나 깜짝하나. 모기가 왔다 갔나 할 걸?

***

날은 빠르게 지나 후반기가 시작되었다.

삼호슈퍼스타즈의 지금까지 성적은 4.95의 승률로 6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위인 모연비퍼스는 경찰청에서 올라온 현호석의 합류로 6.22의 승률이 그대로 유지될 거라는 예상이 많고 2위인 세화스쿼럴스 역시 탄탄한 전력 탓에 5.95의 승률을 기록 중이다.

더욱이 3위인 은성캣츠는 역시 군복무를 마친 김동선의 타격이 기대되는 상황.

그 다음이 안강피그스와 화산레빗스스인데, 5위 화산레빗스는 불과 4게임 차이로 가시권이다.

그리고 후반기 첫 3연전이 공교롭게 화산레빗스 전이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충분히 쉰 1선발 피터 레오나드의 등판이 확정되었고 삼호슈퍼스타즈 선발은 강속구 투수 마크 트웰로 정해졌다.

두 팀 모두 놓칠 수 없는 일전이다. 이 3연전의 결과에 따라 가을 야구의 향방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감독들 또한 각오를 다졌다.

-왜 성낙기를 내지 않지? 전반기 방어율이 가장 좋잖아.

-넌 야구 모르는구나. 방어율만으로 1선발을 정하지 않지. 승률과 경기 운영 능력, 수비수들의 안정감도 고려하는 거야.

-너야말로 야구 모르네. 방어율이 짱이지. 수비가 안정감을 느끼니까 방어율도 좋은 거고.

-시즌은 길고 삼호 투수들은 현재 4선발이 강해. 누구를 1선발로 내세워도 상대팀에 꿀리지 않지.

-맞아, 성낙기는 전반기처럼 불펜으로 나올 수도 있어.

-아는 척들 겁나게 하네. 입 처닫고 찌그러져 있어, **들아.

화산레빗스의 피터레오나드는 150km를 넘나드는 속구에 제구력이 좋다는 평이다.

전반기 성적은 6승 4패 4.05의 방어율로 팀의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전반기 막판에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욕을 하다가 퇴장당한 적이 있을 만큼 다혈질의 성격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4:1로 이기고 있던 5회에 그랬으니 더 아까웠다. 그날의 경기가 4:2로 끝났으니 그대로 던졌으면 승리투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마크트웰은 8승 3패 3.68의 방어율로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났다.

‘피터의 슬라이더는 존으로 날아오다가 빠지는 경우가 많으니, 직구를 골라 치도록 해. 슬라이더에 섣불리 손 안 나가면 충분히 공략 가능하다.’

경기 시작 전 박종태 코치의 진단이었다. 전반기에 피터의 슬라이더에 당하면서 9삼진을 헌납한 삼호슈파스타즈의 타선이기에 특히 슬라이더를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고 첫 구가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뭐야,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아?’

직구 위주의 투구로 카운트를 잡고 슬라이더로 스윙을 이끌어내던 지난 경기와는 다른 패턴이다.

아니나 다를까, 피터레오나드는 2구 역시 슬라이더로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었다.

틱.

파울.

다시 몸 쪽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커브에 이정우는 엉거주춤 커트를 했고,

휘잉.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공 몸 쪽 높은 코스의 포심패스트볼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149km의 빠르고 묵직한 포심패스트볼의 궤적과 그만한 높이로 날아오는 슬라이더의 궤적이 비슷해서 속기 쉽다.

피터레오나드는 쾌조의 컨디션으로 빠른 공과 상당한 제구력으로 삼호 타선을 요리해 나갔다. 그 결과 삼호슈퍼스타즈의 타선은 3회까지 무안타로 묶였고 마크트웰은 1회 올라오자마자 맞은 불의의 홈런 한 방으로 0:1로 뒤지고 있었다.

“볼 배합을 역으로 가져가고 있다. 카운트를 슬라이더, 커브로 잡고 있어.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노려 쳐.”

박종태 코치의 진단이 맞았는지 4회에 올라온 이정우는 바깥쪽 커브를 밀어치자 1루수 키를 넘겼다. 그리고 1루에 나가자마자 2루로 뛰었다.

리드 폭이 좁았고 타자도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기에 방심하고 있던 화산레빗스 배터리는 2루 도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뭐야, 시바. 저 선수는 막 뛰었어. 포수 너, 뭐했어.”

“진정해, 피터. 타자만 신경 쓰면 돼.”

“알았어. 타자… 왜 2루에 안 던졌어?”

“타이밍이 늦었어.”

“그래도 던져야 죽지 안 던지면 선수가 죽냐?”

“…….”

포수 진동만은 피터레오나드의 말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히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 미트를 끼는데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 저 개새… 성질 참 개x같은 놈을 데려왔어.”

다음 두 타자를 잘 잡아냈지만, 피터는 바깥쪽 높은 볼을 던지다가 이중호에게 우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허용했다.

피터는 마운드에서 양팔을 넓게 벌리며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이 던지려던 공은 커브였는데 포수 사인 때문에 포심패스트볼을 던지다가 맞았기 때문이다.

“shit!!”

투아웃 2루의 찬스에서 허봉호 감독이 타임을 불렀고, 지명타자 하진수는 스윙 연습을 하다말고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왁! 드디어 떴다!”

“와하하하, 내 저럴 줄 알았어.”

하진수의 눈에 헬멧을 쓰고 나무 배트를 들고 있는 성낙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성낙기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의외의 타격 실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건 사실이지만, 설마 0.278의 32타점의 하진수의 대타로 나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저건, 또 머야.’

피터레오나드는 묘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타석에 들어서는 성낙기를 바라보았다. 피터도 홈런레이스를 봤었고 신기한 투수라고 생각했을 뿐, 자신이 마운드에 설 때 타자로 나설 줄이야.

‘이건 아무래도 날 얕보는 거겠지?’

피터레오나드는 성낙기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초구로 바깥쪽 강속구를 꽂아 넣었다. 아무렴, 투수는 투수로서의 역할이 있고 타자는 타격에 특화된 존재인데 감히 내 앞에서 타석에 서다니.

팡.

스트라이크.

150km의 강속구가 바깥쪽 존을 통과했다. 이어진 2구도 몸 쪽 높은 포심패스트볼이었고 성낙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흥, 안 속아?’

피터레오나드는 포수의 슬라이더 사인을 마다하고 바깥쪽 강속구를 택했다. 강속구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기에 선택한 구종이었다.

따악.

성낙기는 바깥쪽 높은 존으로 날아오는 포심패스트볼을 결대로 밀어 치면서 한껏 팔로스로우를 했다.

배트에 맞은 공이 죽죽 뻗어 외야로 날아갔고 피터레오나드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공을 쫓았다. 공은 담장 앞까지 가더니 라인드라이브(line drive)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가 펜스 상단을 맞고 떨어졌다.

“아… 미쳤습니다. 성낙기 선수가 과연 투수가 맞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광경입니다.”

“야구 해설 10년 동안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정말 판타스틱하네요. 80년대엔 간혹 있었던 일인데 현대 야구에서, 더구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깝거든요. 투수가 대타로 나와 2루타 친다는 게 말이죠. 메이저리그에서나 가능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렇습니다. 성낙기의 적시 2루타로 경기는 2:1로 역전입니다. 무시무시한 선수입니다.”

모두들 성낙기의 타격에 놀라고 있을 때 2루 베이스를 밟고 선 성낙기의 머리 위에 상태 창이 떴다.

[도주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2/5단계)]

[리키헨더슨의 빠른 발로 업그레이드됩니다.]

-크으, 죽인다.

-이거 투수를 하라는 거야, 타자를 하라는 거야.

[리키헨더슨: 통산 도루-1406개. 통산 득점-2295득점]에 빛나는 영원한 도루왕이 그렇게 성낙기의 몸에 들어왔다. 성낙기는 2루 베이스 위에서 더그아웃을 향해 손을 들었다.

다음 타자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3루수 이한영을 대신해 라인업에 포함된 노장 정영훈이었다. 3회에 잘 친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 바람에 안타를 기록하지 못한 그는 신중한 자세로 공을 기다렸다.

‘응? 왜 저렇게 리드가 길지?’

화삼레빗스의 포수 진동만이 초구를 기다리며 본 성낙기는 마치 도루를 하려는 선수처럼 리드가 길었다. 미처 투수에게 알려주지 못한 사이에 와인드업이 들어갔고 진동만은 보았다.

2루에서 3루까지 내달리는 성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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