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39화 (39/188)

# 39

039화 별종 투수의 탄생 7

에이빌드런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땅을 쳐다보았고,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모연비퍼스 선수들도 느닷없이 한 방 맞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중호는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성낙기가 잽싸게 나가 홈플레이트 뒤에서 기다렸다.

“하니까 되잖아, 인마. 내 덕에 홈런 쳤다고 감독님께 말해줘.”

“시끄러!”

성낙기의 어깨동무를 뿌리치며 이중호가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성낙기는 부리나케 따라 들어와서 다시 한번 어깨를 토닥였다.

팬들은 그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았지만, 선수들은 이제 느끼고 있었다. 거구의 이중호가 유독 성낙기에겐 한풀 죽는다는 것을.

2군에서부터 성낙기가 워낙 앞장서서 자잘한 문제들을 해결해 왔고 그것들은 이중호는 쉽게 못하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야구 실력까지 압권이니 아무리 덩치가 차이난다해도 힘으로 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은 이미 2군에서 한 방을 쓸 때부터 서열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친구끼리 무슨 서열이냐 하겠지만 아무튼,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꽃길이 펼쳐지는 거야. OK?”

“니가 시켜서 홈런 친 거 아니야…….”

이중호가 말끝을 흐렸다. 이중호는 성낙기의 말에 사소하게 반항 하지만 어쩐지 성낙기의 언질이 없었더라면 홈런을 때려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약간 들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묘해서 기술은 그대로라 해도, 그때그때의 기분이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 역시 야구는 멘탈의 운동이다.

에이빌드런은 홈런을 맞고 각성했는지 나머지 타자들을 연속 삼진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두 투수 모두 5회까지 내달렸다.

에이빌드런은 이중호에게 홈런을 맞은 이후, 단 2안타만을 내주며 삼진 9개를 잡아냈고 성낙기도 3안타에 삼진 7개로 무실점인 가운데 6회 초를 맞았고, 6회 초 선두 타자는 모연비퍼스의 1번 타자 조창래였다.

앞 선 두 타석에서 맥없이 삼진과 투수 땅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현재까지 3할 4푼의 타율에 5홈런 11도루를 기록한 타자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1점대의 방어율을 찍고 있다 한들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성낙기에게 철저히 당한 자신을 참을 수 없는 조창래.

“이번엔 어떻게든 살아 나간다.”

조창래는 배트를 짧게 쥐고 마운드의 성낙기를 노려보았다. 여유로운 모습과 함께 설렁설렁 공을 던지는 듯한 성낙기에게서 선배에 대한 예우라든지 최강 팀의 리딩히터에 대한 조심성은 찾을 수조차 없다.

그런 모습에 조창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피땀을 흘려가며 지금의 자리까지 온 자신과 달리 성낙기는 가진 재주만 믿고 건방을 떠는 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성낙기는 조창래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네 야구 하듯 힘들이지 않고 초구를 던졌다.

톡.

따악이 아니라 톡, 하는 소리.

그리고 데구르르 구르는 볼에 3루수가 뛰어 들어왔고 포수 강길만은 헬멧을 벗어던지고 앞으로 뛰어갔다.

성낙기도 급히 달려들어 왔지만 워낙 3루 라인에 가깝게 붙어 구르는 공은 투수가 처리할 공이 아니었다.

3루수 이한영이 대시한 뒤, 맨손으로 공을 잡아 던졌지만 조창래는 벌써 1루 베이스를 밟고 있었다.

“아, 조창래 선수 기습적인 드롭번트를 시도해 살아나갑니다. 이한영 선수가 맨손으로 처리했지만 워낙 타구 방향이 좋았어요. 역시 모연비퍼스의 1번 타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성낙기 투수 방심했죠? 앞선 두 타석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쉽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조창래 선수가 누굽니까. 바로 우승 팀의 1번 타자이고 지난 시즌의 골든글러브 수상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몫을 하는 선수란 말이죠.”

캐스터와 해설자는 기다렸다는 듯 조창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오늘 JNK의 해설자로 나온 김석범은 조창래의 고등학교 동문 선배이면서 평소 사적인 만남이 있는 사이로 듣기에 따라 편파적인 해설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낙기야, 조창래 분명히 뛴다. 바깥쪽 알지?”

강길만이 마운드로 와서 성낙기에게 다짐을 하고는 바깥 쪽 포심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2번 타자가 번트 모션을 하다가 강공으로 자세를 바꿔 기다렸다는 듯 초구를 때렸다.

타구는 1루 쪽 파울라인을 벗어나 관중석 펜스에 부딪혔다. 조창래는 2루에 거의 다 가서 되돌아왔다.

‘번트를 대지 않고 강공으로 가? 코스가 읽혔어.’

성낙기는 강길만의 사인을 모연비퍼스 타자들이 읽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깨가 약한 강길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코스이며 구질이라는 것을.

강길만이 다시 천연덕스럽게 같은 코스의 사인을 냈다. 이번엔 글러브를 좀 더 위로 들어 올렸다는 게 다른 점이다. 어떻게든 2루 도루를 막아보려는 심산이었다.

-쟤는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무조건 바깥쪽 직구야? 예측 가능하면 150km도 배팅 볼이나 다름없다는 걸 모르나.

실바가 바깥쪽으로 빠져 앉은 강길만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길만으로선 최선의 선택이라 할 만하다. 약한 어깨와 순발력을 커버하기 위해선 바깥쪽 직구밖에 없으니까.

다만, 구위가 상당한 성낙기의 초구가 거침없이 맞아 나갔다는 것이 문제다. 성낙기는 사인대로 바깥쪽을 던졌다.

강길만이 원하는 곳보다 더 높게.

타자는 흠칫, 번트 모션을 하다가, 하다가 동작을 거둬들였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성낙기는 견제구를 하나 던진 다음 강길만과 사인을 교환했다.

‘바깥쪽으로 하나 더.’

강길만의 사인은 변함없다. 조창래가 꼭 뛸 것만 같은지 이번엔 아예 피치아웃을 요구했다. 성낙기는 고개를 저었지만 강길만은 재차 같은 공을 요구했다.

‘포수가 저렇게 조바심을 내니 투수가 흔들리지.’

성낙기가 사인대로 공을 던졌다. 강길만이 벌떡 일어나 공을 받자마자 2루로 던지려 했으나 조창래는 뛰는 시늉만 하고는 1루로 귀루해 버렸다. 볼 카운트만 나빠졌다.

성낙기는 강길만의 다음 사인이 궁금해졌다.

‘또 바깥 쪽 포심패스트볼?’

이번엔 스트라이크 존에 글러브를 위치시키는 강길만. 성낙기가 고개를 저었고 강길만이 마운드로 뛰어왔다.

“야, 어쩌려고 그래. 쟤 분명히 뛴다니까.”

“뛰라 그래요. 난 타자만 잡으면 돼요.”

“조창래가 누군지 몰라? 작년에 도루 2위야. 가만 놔두면 3루까지 훔치려고 할 걸? 그러고 나서 스퀴즈 하나면 동점이야.”

“잡을 자신 있어요?”

“잡으려고 이런 사인 내는 거야, 내가. 하지만 변화구 던지면 절대 못 잡아.”

“좋아요. 선배 뜻대로 해 봐요.”

강길만이 돌아가 앉자 성낙기는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아니, 와인드업을 할 때 조창래가 2루로 뛰었다.

모연비퍼스 2번 타자 김오준이 번트를 댔고 공은 바운드를 튀기며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굴러갔다. 성낙기는 1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고 1루수 이중호가 공을 잡은 뒤, 슬쩍 2루를 보았다. 조창래는 2루를 넘어 3루로 뛰려다가, 이중호의 시선을 2루로 던지려는 모션으로 알고 급히 발을 멈췄다.

뜻을 이룬 이중호는 1루로 던져 타자를 아웃시켰다. 조창래는 2루 베이스를 밟고 서서 타자인 김오준을 향해 왜 번트를 댔느냐며 두 팔을 내밀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번트가 아니라도 2루에서 살 수 있었다는 뜻.

2루 도루에 성공한 뒤 번트가 나왔더라면 최상의 결과였겠지만, 어쨌든 오늘 경기 처음으로 득점권 찬스를 잡은 모연비퍼스의 관중석이 떠들썩해졌다. 3, 4번이 차례로 나오기 때문에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팡.

볼.

다음 타자에게 슬라이더로 바깥쪽 볼을 꽂아 넣었을 때 조창래는 또 뛰었다. 강길만이 3루로 던졌으나 공이 뜨는 바람에 슬라이딩 세이프.

1사 3루의 절호의 찬스를 맞은 모연비퍼스, 아까 강길만이 우려했던 대로 스퀴즈 하나면 동점이다. 강길만이 또다시 피치아웃 사인을 냈고 타자는 강공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성낙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 도대체 선배는 뭐가 무서워서 저러는 거야.’

피치아웃을 했다가 실패하면 볼 카운트만 불리해진다. 모연비퍼스 감독 김정환은 용의주도해서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는 타이밍에 작전을 걸기로 유명하다.

하물며 원 볼에서 스퀴즈를 댈 정도로 섣부른 사람도 아니다. 상황이 유리해진 만큼 볼 카운트를 봐가면서 볼넷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0:1로 지고 있고 3루에 주자가 있는 이상 한 점에 연연할 생각이 없는 것.

라이징패스트볼.

틱.

성낙기가 던진 라이징패스트볼을 건드려 파울을 만드는 민경호. 이로서 상대의 공격 의도가 분명해졌다. 스퀴즈보다는 강공으로 가겠다는 거다.

성낙기는 다시 한번 라이징패스트볼을 던졌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겨냥하고 던졌으나 생각보다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톡.

민경호가 배트를 쭉 뻗으며 번트를 댔고 공은 1루수와 투수 중간에 애매하게 굴렀다. 성낙기가 뛰어 들어와 잡으면서 그대로 홈 송구를 했고,

그사이 3루 주자 조창래는 빠른 스타트를 끊고 홈에 거의 들어와 있었다. 송구와 슬라이딩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고 주심의 콜이 떨어졌다.

세이프!

1루!

포수 강길만은 주심의 세이프 선언에 이게 왜 세이프이냐는 듯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고 그동안 타자는 1루를 밟았다. 뒤늦게 강길만이 던지려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

삼호슈퍼스타즈의 9회 초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7, 8, 9로 이어지는 하위 타선이었으므로 허봉호 감독은 별 기대가 없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면 7번인 뜬금포 김석문이 일을 저지르는 것인데 요즘 들어 타격 슬럼프가 왔다.

KBO의 하위 팀과의 경기에선 곧잘 치는데 모연비퍼스 같은 강적에 에이스가 나오면 그날로 개판이다. 에이빌드런은 9회에도 변함없이 마운드에 올랐다.

투구수가 98개이고 1:1의 상황이라 김종환 감독이 말렸지만 9회 말 역전을 노리는 에이빌드런의 욕심이 이겼다. 더불어 성낙기에 대한 묘한 경쟁심도 생겼다.

‘쟨 뭔데 날 괴롭히지? 6회에 점수를 더 뽑았어야 했어. 그 찬스에서 모조리 삼진을 당하다니. 크으.’

그랬다. 스퀴즈번트로 한 점을 내준 뒤 1사 1루에 주자를 두고 성낙기는 4번 타자 천강조에게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를 내줬는데 김화성이 그 공을 놓쳐 찬스는 1, 2루로 이어졌다.

열받은 허봉호 감독이 김화성 대신 지명타자 하진수를 좌익수로 내보냈고 성낙기는 아랑곳 않고 내리 2삼진을 잡아 이닝을 끝내 버렸다.

팡.

155km

9회인데도 엄청만 공을 던지는 에이빌드런 앞에서 김석문은 속수무책,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 있다.

그런 다음, 바깥쪽 빠지는 슬라이더로 꾀는 볼을 김석문이 용케 참아낸다.

2군에 있을 땐 마구 휘두르는 스타일이었는데 박종태 타격 코치에게 단점을 지적받고는 참을성이 생겼고 그 덕에 1군의 주전 2루수를 꿰찼다.

전 경기 출장은 아니지만 타율도 0.278로 나쁘지 않다.

에이빌드런은 김석문만 잘 넘기면 1실점 완투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신중한 승부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미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놨으니 스트라이크 같은 볼로 배트만 이끌어내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야, 성낙기. 찬스다. 배트 들고 감독에게 가.

실바의 목소리.

“뭔 소리예요?”

-그래 어서가 봐. 너 이대로 지고 싶어? 대타 보내달라고 해 어서.

이번엔 존의 목소리. 둘의 마음이 맞아서 똑같은 말을 하는 건 처음이다. 마치 먹을 것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둘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아니, 지금 내가 대타로 어떻게 나가냐고요. 강길만 선배가 저렇게 떡하니 서서 스윙 연습 중인데 말입니다.”

-너 참 야구 모르는구나. 너 대신 타격하던 지명타자가 좌익수로 갔으니까 대타로 나갈 수 있어.

“……!”

성낙기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허겁지겁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이중호의 배트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허봉호 감독 앞으로 가서 스윙을 한 차례 했다.

허봉호 감독 옆에 박종태 타격 코치와 이계현 투수 코치가 함께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다.

-좋아,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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