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038화 별종 투수의 탄생 6
그때까지 삼호슈퍼스타즈는 4할 7푼 5리의 승률로 7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막강한 선발 투수진만을 생각한다면 재앙과 같은 수준이었지만,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타선이 살아났고 불펜 역시 구문철이 마무리로 어느 정도 역할을 해주는 가운데 모창모와 이오수가 차츰 나아지는 기미를 보였다.
물론, 이만큼이나마 승률을 올린 것도 성낙기가 5승 5홀드 4세이브를 올렸기에 가능했던 수치다. 그렇게 전천후로 뛰면서도 1.98의 평균 자책점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모든 사람이 놀라기에 충분했다.
방어율로만 따지면 모연비퍼스의 에이빌드런 다음으로 낮은 수치였다.
에이빌드런은 메이저리그 콜로라도의 로키스의 40인 로스터에 들었었고 시범 경기 방어율도 좋았던 투수였는데 워낙 탄탄한 투수력을 자랑하는 팀인 탓에 훗날을 기약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왔다.
모연비퍼스는 끈기 있게 접촉하면서 25인 로스터에서 빠지자마자 거액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그를 데려왔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2시즌 동안의 mlb 경력과 4시즌 동안의 마이너리그 경력으로 나이보다 풍부한 경험을 자랑했다.
콜로라도로키스에 부상자가 생기거나 부진하면 언제든 콜업을 받을 0순위 선수를 모연비퍼스는 영입했다. 연봉 250만 불이라고 발표했지만 훨씬 상회한다는 추측이 있을 정도로 거물급 투수.
모연비퍼스로서는 공성진을 FA로 빼앗기고 더 많은 지출을 한 셈이었는데, 그는 기대대로 벌써 8승 1패에 방어율 1.75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 시즌 중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KBO 외인투수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방어율과 승률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성낙기와 에이빌드런의 맞대결이 성사되었다. 에이빌드런은 2m를 상회하는 키에 불같은 강속구로 KBO 타자들을 윽박질렀는데 워낙 볼을 놓는 타점이 높아서 구질을 알고도 치지 못하는 언터처블급 투수였다.
얼마 전, 170만 불의 사나이 마크트웰이 맞붙었지만 6이닝 3실점, 겨우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고 마운드를 내려간 반면에 에이빌드런은 완봉으로 삼호슈퍼스타즈 타선을 잠재워 버렸다.
‘오늘이 바로 복수의 날이다.’
성낙기는 모처럼 전의를 불태웠다. 사실, 방어율 1.98은 상대를 만만하게 보고 설렁설렁 던지다가 실점을 한 것이라고 성낙기는 믿고 있었다.
오늘은 지난 시즌 한국 시리즈 챔피언이자 6월 20일 현재,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모연비퍼스와의 경기이니만큼 강타선과 상대한다는 사실이 성낙기를 설레게 했다.
모연비퍼스 전이 처음은 아니다. 6월 초, 2:2로 팽팽한 가운데 불펜 등판을 한 차례 했고 무실점으로 구문철에게 바통을 넘겼지만 2:3으로 역전패.
팀으로서는 이번 시즌 5차례 붙어 5전 전패를 기록 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늘 지난 시즌 홈런왕 천강조가 있었다.
“워… 마운드에 깃대 하나 꽂은 것 같네.”
에이빌드런이 1회에 마운드에 서자, 2루수 김석문이 중얼거렸다.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 역시 에이빌드런을 보는 표정들이 심각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메이저리그 0순위 선수라 해도 KBO를 씹어 먹을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빌드런은 상대적으로 느린 KBO타자들의 배트스피드로는 대응하기 힘든 최고 구속 158km의 강속구에 쭉쭉 뻗어오는 볼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KBO 타자들에게 최적화된 선수인 셈이다.
거기에 각이 큰 슬라이더와 폭포수 커브까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팡.
휘잉.
스트라이크.
이정우가 타석에 서자마자 거침없이 내리꽂히는 공.
이정우의 근육으로는 무리인 듯 손목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배트가 돈다. 공을 숨겨 나오는 디셉션도 좋은 편이어서 이정우는 타이밍 조절에 애를 먹었다.
3할이 넘는 타율이 무색하리만큼 이정우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2번 타자 이한영도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3번 타자 엔서니페킨스가 우익수 플라이를 쳐낸 것이 위안이 될 정도의 구위.
“와, 시*… 오늘도 완봉할 기세네. 저 공을 어떻게 치냐.”
“배트를 짧게 잡고 밀어치는 수밖에 없어.”
“그래봐야 파울플라이일 걸?”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성낙기도 마운드에 올라 1번 타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1번 조창래부터 6번 미카엘 오르티스까지 3할을 넘기고 있는 가공할 타선으로 2019년 시즌 역시 7할에 가까운 승률로 독보적 1위를 하고 있는 모연비퍼스.
오죽하면 외국인 타자가 6번을 치는가가 타 팀 팬들의 관심사일 지경이다.
성낙기는 경기가 경기인 만큼 평소의 히죽거림 없이 인상을 팍 쓰면서 강길만이 내는 사인마다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 저거 오늘따라 왜 저래?’
강길만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포심패스트볼 두 개를 연달아 던진 후에 변화구 사인을 냈더니 이런다. 투 스트라이크를 잘 잡았으면 변화구를 던지면 딱인데 체인지업도 싫다, 커브도 싫다, 잘 던지는 라이징패스트볼도 싫다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강길만은 하는 수 없이 포심패스트볼 사인을 다시 냈다. 또 싫단다. 강길만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너, 도대체 뭘 던지려고 사인마다 고개를 흔드는 거냐?”
“쟤들이 내 공 연구해 왔을 거예요. 경기 전에 오늘은 다른 구질을 많이 던지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뭐?”
“포크볼, 그리고 투심패스트볼 던질게요.”
“휴… 니 맘대로 해보셔.”
팡.
볼.
팡.
볼.
그리고 또 볼.
포크볼 연속 세 개에 속지 않은 조창래.
포크볼에 속지 않는다는 건 제구가 안 된다는 증거다. 공이 홈플레이트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꺾여버리기 때문에 조창래 같은 선구안 좋은 교타자는 잘 속지 않는다.
‘또 포크볼을 던지겠다고……? 미쳤나.’
하지만, 성낙기는 투 스리 풀카운트에서도 변함없이 포크볼 사인을 냈다. 그리고 힘차게 공을 뿌렸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삼진을 당한 조창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성낙기를 바라보다가 더그아웃으로 발을 돌렸다. 그가 알기론 성낙기는 포크볼이 아니라도 여럿의 피니쉬 블로를 가지고 있다.
그런 투수가 볼넷을 감수하면서까지 제구가 안 되는 포크볼을 던질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풀카운트에선 무조건 친다고 마음먹었던 생각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지, 성낙기. 봐, 하니까 되잖아.
마운드 뒤에서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는 존과 달리 실바는 자신의 주 무기로 삼진을 잡은 성낙기가 기특한지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성낙기는 누구의 주 무기를 쓰느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모연비퍼스 강타선을 흔들어놓을 참이다.
투구 레퍼토리가 예측 가능하면 게스히팅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고 만약 그렇다면 타이밍부터 맞아나갈 것이 뻔하다. 즉, 잘 던진 체인지업 같은 공도 예측 가능한 수준이 되면 안타를 쳐낼 수 있다는 것.
사실 이건, 모연비퍼스 타자들의 동영상을 전날 밤 돌려본 결과 실바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존은 그런 게 무슨 필요냐면서 강속구로 맞대결을 권했지만, 상대 투수가 에이빌드런인 마당에 재수 없이 홈런이라도 하나 맞으면 그걸로 경기가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낙기는 6월 초에 맞붙은 연진맘모스와의 경기에서 뜬금포를 한 방 허용했었다. 경기에 지장은 없었지만, 상대가 구질을 예측하는 순간 평소 칠 수 없었던 공도 공략이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다른 공도 아니고 아주 잘 떨어진 체인지업이었는데도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 두 타자 모두에게도 잘 던지지 않던 포크볼과 투심을 적절하게 섞어 던지며 체인지업과 라이징패스트볼로 삼진을 잡은 성낙기의 1이닝 3삼진으로 관중석은 뜨거웠다.
***
“오늘 성낙기 투수,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막강 모연비퍼스 타선을 상대로 연속 삼진을 솎아냅니다. 그야말로 현재 방어율 1, 2위 간의 투수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타자들을 압도하는 투수끼리의 대결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단하네요. 에이빌드런 투수가 1회 2삼진을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3삼진을 잡아내는 성낙기 투수, 참으로 점입가경입니다. 올해도 역시 타고투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할 지경이에요. 두 투수만 본다면 완전한 투고타저입니다. 그만큼 대단한 투수들의 대결입니다. 과연 승자는 누가 될지 저도 궁금해지는데요. 투수만을 생각한다면 이번 시즌 최고의 빅 매치라고 하겠습니다.”
개막전 이후 석 달이 되어가는 시점에 성낙기는 벌써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물론,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은 정도는 아니지만 팬들이나 야구 관계자들은 올 시즌 혜성처럼 나타난 선수, 혹은 앞으로 리그를 대표할 선수로 인식하고 있다.
그 이면엔 아직 한 시즌을 통째로 치러본 적이 없으므로 체력적인 문제나 멘탈 등의 부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덧붙여 모연비퍼스 전에 선발로 나선 적이 없기에 검증이 덜 되었다고 봤다.
그러므로 오늘의 맞대결은 그런 인식을 바꿀 분수령이 되는 경기나 다름없다.
“중호야, 넌 오늘 분명히 홈런 칠 거야. 맞지?”
“야, 내가 무슨 수로 저 볼을 때리냐? 아참, 넌 타석에 안 서봤지? 강속구는 공에서 바람 소리가 날 정도야. 메이저에선 제구가 안 돼서 애먹었다는데 누가 잡아줬는지 제구만 좋아. 기대는 접어주라.”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아무리 승리투수에 목이 말라도 그렇지, 아예 날 죽여라.”
“앞으로 KBO를 이끌어갈 슬러거가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잡소리 말고 하나 날려. 오늘 점수 안 뽑아주면 너랑 나랑 절교다.”
“끄응.”
2회 초, 이중호는 성낙기의 *같은 소리를 듣고 타석에 섰다. 2군에서도 그러더니 지가 선발로 던지는 날이면 하나 날리라며 부담만 팍팍 주는 놈이다.
그런 이야기도 상대를 보고 해야지, 에이빌드런이 어디 지나가는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자그마치 1.75의 방어율이다.
이중호는 성낙기 때문에 기분이 잡친 나머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타석에 섰다.
에이빌드런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포수의 사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강속구를 뿌렸다.
슈우욱.
따악.
회전이 걸린 공은 정말 바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고 이중호는 다짜고짜 초구를 휘둘렀다.
에이빌드런이 던진 초구는 몸 쪽에 약간 높게 형성된 포심패스트볼이었다.
타자들에게 치기 좋은 코스지만 지금까지는 워낙 구위가 좋은 탓에 배트가 밀리기 일쑤였다. 평소의 이중호라면 구위가 구위이니만큼 신중하게 승부했을 것이다.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애매한 높이의 공을 휘두르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거 다 젖혀두고 냅다 휘둘렀고 공에 배트를 맞혔다.
‘어어……?’
이중호가 친 공은 공의 밑동을 맞고 높이 솟아올랐다. 좌익수 민경호는 뒤로 슬슬 물러나면서 공을 받기 위해 글러브 낀 손을 쳐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공이 더 날아온다.
그러더니 자신의 키를 넘어가는 게 아닌가.
때마침, 외야 쪽으로 바람도 알맞게 불었다.
“저, 저거 어어어……?”
더그아웃에 있던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도 날아가는 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높게 솟아올랐던 공은 좌익수 키를 넘고 펜스 근처까지 가더니,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펜스와 관중석 사이의 공간에 떨어졌다.
“넘어 갑니까? 홈~런! 아, 여기서 홈런이 나오네요. 이중호 선수, 에이빌드런의 초구를 당장 밖으로 넘겨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