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037화 별종 투수의 탄생 5
터억.
구문철이 던진 공은 너무 일찍 휘어지는 바람에 강길만이 겨우 잡아낼 만큼 바깥쪽을 완전히 벗어났다. 루이스는 타이밍을 잡느라 공이 미트에 들어간 뒤 배트를 돌렸다.
보기만 해도 다부진 체구에서 나오는 스윙이 위압적이다.
강길만은 긴장을 가라앉히라는 뜻으로 공을 건네준 뒤 두 팔을 펴고 다독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커브.
팡.
이번에도 바깥쪽 존을 조금 벗어났다. 투 볼, 노 스트라이크.
공을 받은 구문철이 돌아서며 심호흡을 했다. 트리플 A에서 고르고 골라 데려온 타자인 만큼 검증할 것도 없이 기본 능력은 우수하다고 봐야 한다.
2구에 미동도 없는 걸 보면 무작정 휘두르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다. 구문철은 겨우 2구를 던지고 등에 땀이 젖어오는 걸 느꼈다.
세화스쿼럴스 관중들은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구문철을 압박했고 삼호슈퍼스타즈 응원단도 구문철을 연호하며 부담을 줬다.
이 정도의 관중에 이런 분위기, 게다가 이런 강팀은 겪어본 적이 없다.
‘구문철, 쫄았냐?’
구문철은 스스로에게 되뇌며 3구로 가장 자신 있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역시 바깥쪽 승부. 이번엔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적절한 공.
따악.
파울.
루이스의 배트는 가차 없이 돌았고 공은 1루 쪽 외야 관중석의 상단을 때리고 앞쪽으로 튀었다. 타이밍만 제대로 맞았으면 홈런이 되었을 것 같은 힘이 느껴지는 공 스피드. 구문철은 공을 받고 한숨을 돌렸다.
‘내 볼에 적응하고 있다.’
상당한 각을 안고 들어간 슬라이더를 가볍게 쳐내는 폼이 역시 좋은 타자라는 걸 알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구문철은 던질 공이 없다는 것을 불현 듯 깨달았다.
어떤 공을 던져도 맞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 들어왔다.
2군에서 상대하던 타자들이나 KBO의 하위 팀 타자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막강한 위압감이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포수 강길만도 구문철의 부담을 느꼈는지 제구가 흔들리는 변화구 대신 몸 쪽 높은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흔히 슬러거 형 타자들이 좋아하는 코스.
하지만 높은 스트라이크 존보다 한 뼘은 더 높아야 헛스윙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슈욱.
퍽.
구문철이 사인대로 몸 쪽 높은 볼을 던졌고 손을 떠난 공은 지면을 긁다시피 솟아오르며 루이스에게 날아갔다. 몸 쪽 높은 볼이면서 극단적으로 붙이는 바람에 공은 루이스의 등에 맞고 홈플레이트에 떨어졌다.
“shit(젠장)!”
루이스가 얼굴을 찡그리고는 욕을 내뱉었다. 구문철이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했음에도 한참을 째려본 뒤 1루로 천천히 뛰어갔다.
이로써 노아웃 1루.
세화스쿼럴스로서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맞았고 구문철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던 제구가 되지 않는다.
-저게 바로 마무리의 힘든 점이야. 1점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과도 싸워야 하고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걸 바라지 않는 상대 관중의 함성과도 싸워야 하고 무엇보다 9회엔 타자들의 집중력이 대단하지. 7, 8회를 던질 때와는 차원이 다르지.
“어? 나도 마무리 해봤는데 아무 느낌 없던데요?”
-넌 원래 생각이라는 게 없는 놈이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마무리로는 맛이 살짝 간 애들을 쓰는 것도 좋아.
실바가 마무리의 부담에 시달리고 있는 구문철의 상태를 설명했다. 세화스쿼럴스의 다음 타자는 지명타자인 나중열로 지명타자답게 한 방이 있다.
지난 시즌 23홈런에 92타점을 기록했고 주자가 있을 시 타율이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장점이 있다. 구문철은 신중하게 사인을 본다. 강길만은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슈욱.
따악.
공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고 나중열은 풀스윙으로 배트를 돌렸다.
구문철이 던진 공은 어정쩡한 높이로 날아갔고 코스마저 타자의 몸 쪽으로 가다가 중앙 높은 곳에 탄착점이 형성되었다.
공은 중견수 키를 넘기고도 쭉쭉 뻗었다.
그리고 담장을 넘어 관중석으로 빨려들었다. 세화스쿼럴스 팬들이 일제히 일어났고 뒤이어 귀청이 터질 듯한 함성이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홈런! 나중열 선수 마지막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대단합니다. 구문철 투수의 초구를 두들겼어요.”
“맞아요. 내내 성낙기 투수에게 눌려 있던 세화스쿼럴스의 타선이 구문철 투수가 올라오자마자 폭발하는군요. 역시 저력이 있는 팀입니다. 구문철 투수 평소답지 않게 공의 구위나 제구가 완전치 못했습니다. 변화구도 밋밋했고요. 허봉호 감독 속이 쓰리겠네요. 확실한 마무리가 없는 약점이 드러납니다. 삼호슈퍼스타즈로서는 빈약한 타선과 함께 가장 큰 숙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경기는 순식간에 1:2로 뒤집어졌다. 그럼에도 허봉호 감독은 홈런을 맞은 구문철을 마운드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리지 않았을 뿐더러 몸을 풀고 있던 모창모마저 철수시켰다. 구문철은 고개를 푹 숙이다가는 더그아웃을 스윽 쳐다보다가 텅 비어 있는 불펜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지랄… 될 대로 되라지.’
홈런을 맞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9회 말에도 연준후가 나올 것을 생각하면 이제 분명 승부는 기울었으니 내 마음대로 공을 뿌리리라, 다짐한 구문철이었다.
포수의 사인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인을 내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는 7, 8, 9번으로 이어지는 하위 타선. 허탈했으나 부담감이 사라진 구문철은 그때부터 제 구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따악.
유격수 땅볼 아웃.
따악.
중견수 플라이.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를 연속으로 잡고 구문철은 씁쓸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성낙기는 구문철을 마중 나가 같이 들어오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8회까지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를 눈앞에 둔 투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표정. 그걸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어느 누가 눈앞에서 승리가 날아가는데 저럴 수 있단 말인가.
***
“정말 알다가도 모를 투수예요. 저에게 와서 한다는 말이 한국 시리즈 3승하면 방출시켜 달라질 않나. 승리가 날아갔는데 히죽거리지를 않나. 정말 괴짜도 저런 괴짜가 없어요.”
“흠… 너에게 그런 말을 하더냐?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승리는 날아갔지만 오늘부터 삼호슈퍼스타즈는 공성진 못지않은 에이스를 얻은 것 같군. 2군에서도 봐왔지만 성장이 멈추질 않아. 어떻게 단기간에 구속이 그리 좋아지는지… 괴짜라기보다는 괴물이다, 괴물.”
“괴물 투수 성낙기? 호, 그럴듯해요. 아니 멋있는데요? 평소 행동도 기행적인데 딱 어울리는 별명이에요.”
삼호 그룹 회장실에서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이 TV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성낙기는 야구 실력만으로는 결코 쌓을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성낙기가 풀이 죽은 구문철을 어깨동무하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TV화면에 여과 없이 잡혔고 더그아웃에 들어가서도 착한 미소로 경기장을 주시하자, 팬들은 성낙기의 인간됨됨이에 감탄했다.
삼호슈퍼스타즈의 선수들도 성낙기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9회 말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성낙기는 구문철이 나중열에게 홈런을 맞을 때,
“하아, 좆 댔어. 내가 열나게 막았는데 거기서 홈런을 내주냐? 저런 망할 놈의 새끼 들어오기만 해봐라.”
불과, 10여 분 전까지만 해도 승리가 날아간 데 대해 열이 잔뜩 받았던 거다.
-야, 성낙기 정신 차려. 니가 이러고 다니면 앞으로는 아무도 네 승리를 지켜주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런 짓은 인성 쓰레기를 증명하는 거야.
“아, 화가 나는데 어쩌라고요.”
존이 성낙기를 타일렀다.
-난 너보다 더한 경우도 다 참아냈다. 퍼펙트를 눈앞에 두고 수비 실수로 깨지기도 했고 안타 하나 맞지 않고도 실점해서 역전패하기도 했지. 이럴 때일수록 구문철을 다독여 주면 널 안 좋게 봤던 사람들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야구 선수도 이미지를 먹고 사는 거야. 그리고 그걸 얻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 구문철이 들어오면 잽싸게 나가서 이미지를 쳐 발라. 알겠나?”
“끄응… 알겠어요.”
성낙기는 마지못해 답을 하고는 헤이드 존의 말대로 야구 선수이기 이전에 인성 갑의 이미지를 구문철과 함께 만들어 냈던 것이다.
선수들과 팬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동안의 이미지는 남의 일에 신경 안 쓰고 지 할 일만 하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데다가 맛도 약간 간 이미지였다면 이번엔 실의에 빠진 약자를 포용하거나 자신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동료를 감싸 안는 엄청난 자제력과 따뜻한 인간미가 돋보이는, 야구 선수 이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놀라기는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박종태 코치도 마찬가지였다.
‘저놈이 저런 면도 있었나?’
사람 파악 잘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허봉호 감독조차 성낙기를 잘못 판단했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단 한 번의 퍼포먼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했다.
성낙기가 그런 따뜻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난 9회 말, 연준후는 변함없이 마운드에 올랐다. 삼호슈퍼스타즈의 타선 또한 변함없이 연준후를 공략하지 못했고 경기는 1:2의 스코어로 끝났다. 연준후의 완투승.
그러나 다음 날의 포털 사이트는 연준후보다는 성낙기의 무결점 투구에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졌다.
<성낙기의 불가사의한 투구, 8회에 144km>
<성낙기의 따뜻한 동료애, 이것이 야구다>
그야말로 칭찬 일색이었다. 원룸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휴대폰으로 자신의 기사를 검색하는 성낙기의 뒤로 드랙실바와 헤이드 존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특히 거구의 헤이드 존은 자기 말 그대로 성낙기가 그런 행동을 한 뒤의 반응이라서 평소의 근엄한 모습을 풀어헤치고 헤프게 웃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봐봐, 내 말을 들으니까 좋은 결과가 생겼지? 다른 놈 말은 쓸데가 없어. 넌 앞으로 내 말만 들으면 인생 피는 거야.
-다른 놈 말……? 혹시 나를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
-너, 넌 참 보기보다 예민하다. 그러니 술 처먹고 빨리 죽었지.
-이런 개새… 음주 운전 한 게 누군데… 확 모가지를 틀어버릴라. 기다려, 이번엔 내가 너를 죽인다.
-…….
실바의 뒤에서 김이 올라오는 걸 본 존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귀신이 된 뒤에도 스팀이 올라올까.
성낙기는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김치를 우적우적 씹었다. 둘이 싸우든가 말든가 나는 아무 상관없다는 표정과 입놀림. 그 모습을 본 실바가 정리했다.
-휴, 관두자. 우리가 이런 놈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다.
***
성낙기는 그날의 승부 이후 이름을 알린 후,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아니, 딱히 에이스랄 것도 없이 뚜껑을 열고 보니 공성진은 기대대로 잘 던졌고, 마크트웰과 필 서든 역시 제몫을 해냈다.
다만, 성낙기는 선발 외에도 자청해서 세이브 상황에 올라가곤 해서 활약이 두드러졌다.
지난 시즌의 에이스였던 김도진에 안민기까지 삼호슈퍼스타즈의 5선발은 리그의 어느 팀보다 막강한 투수력을 자랑했다.
불펜과 타선이 여전히 문제였다.
그나마 타선은 이중호와 엔서니페킨스의 장타력과 테이블세터 이정우의 활약, 그리그 득점권에 강한 김석문의 뜬금포를 바탕으로 조금씩 상승세를 탔다.
그렇게 4월과 5월이 지났고 6월하고도 중순, 습하고 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기상청은 이례적으로 긴 장마를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