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036화 별종 투수의 탄생 4
LA에인절스(Los Angeles Angels of Anaheim)의 톰에게 성낙기에 대한 질문을 한 워싱턴 내셔널스(Washington Nationals)의 울프 마이어는 생각지도 못한 발견에 잠시 흥분했다. 하지만 곧 성낙기가 신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입맛을 다셨다.
마음에 들었다 해도 성낙기를 스카우트하려면 많은 세월의 벽이 존재했다.
7회까지도 두 팀 모두 점수를 뽑지 못하고 8회에도 성낙기가 마운드에 올라오자 세화스쿼럴스 팬들은 의구심 반, 경이감 반에 찬 시선으로 성낙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은 공성진 급 뉴 페이스의 등장에 흥분한 나머지 휘파람을 불어댔다.
세화스쿼럴스의 선두 타자는 다시 김수권이다. 그는 보잘것없는 투수에게 3타수 무안타인 것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냥 무안타라면 그나마 운이 없었다고 생각할 것인데 세 번 타석에 서면서 공을 제대로 때려본 적이 없고 4회엔 삼진까지 당했다. 김수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배트를 평소보다 짧게 쥐었다.
‘건방진 놈이 실실 쪼개고 있어.’
그랬다. 성낙기는 1회부터 줄곧 소풍 나온 어린아이마냥 싱글거렸다.
삼진을 잡을 땐 주먹을 쥐고 우우, 하는 소리를 냈고 범타로 처리할 때는 내, 외야수들을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삼호의 야수들도 평소답지 않게 큰 실책 없이 성낙기의 뒤를 받쳤다.
1볼넷을 얻어내고 5안타를 때렸지만 그마저 공격의 맥이 툭툭, 끊겼다.
연준후도 한계 투구 수가 다가오고 있는 이상, 8회엔 어떻게든 출루해서 삼호슈퍼스타즈의 내야를 흔들어 놓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팡.
커브(70/100).
스트라이크.
바깥쪽으로 뚝 떨어지는 공에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김수권이 주심을 슬쩍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배터 박스의 흙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주심이 그런 김수권에게 짧게 물었다.
“뭐?”
“조금 낮지 않았어요?”
“넌 포수 미트만 보냐? 공 궤적은 스트라이크야, 괜히 딴소리 하지 마.”
성낙기는 강길만과 사인을 교환하고 2구를 던졌다. 138km의 몸 쪽 꽉 찬 포심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존에 걸칠 듯 말 듯 높은 공에 김수권이 반응했다.
톡.
김수권의 배트에 맞은 공은 3루수 이한영 앞으로 떼굴떼굴 굴러갔다. 라인을 타고 흐르는 타구였기 때문에 투수인 성낙기가 잡기엔 거리가 멀었고 포수인 강길만이 쫓아갔지만 마주 달려오는 이한영을 보고는 몸을 틀어 피했다.
전력 질주로 들어온 이한영이 공을 잡고 글러브에서 빼는 순간, 김수권은 이미 1루에 거의 다다랐다.
세이프!
“에이 뭐야. 저런 볼은 맨손으로 잡아야지, 글러브에 넣고 뺄 틈이 어딨어.”
“아직 경험이 부족해. 이럴 때를 대비해서 김광렬을 방출시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야.”
“아… 김수권 저거 나가면 골치 아파 지는데.”
1루심의 세이프 선언에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이 웅성거렸다. 내내 위기가 없이 진행되던 경기에 생채기를 낸 김수권.
그가 리그를 주름잡는 테이블 세터인 이유다.
김수권은 1루에 나가자마자 리드를 크게 벌리며 성낙기의 신경을 긁었다. 2번 타자 서일화는 유격수이면서 2할 후반의 타격에 작전 수행 능력이 발군이다.
지난 시즌 번트를 가장 많이 댄 선수 중 하나였는데 그게 모두 선두 타자 김수권의 출루에서 비롯되었다.
김수권의 심상치 않은 리드를 본 강길만은 초구부터 피치아웃 사인을 냈다. 성낙기가 고개를 저었다.
‘저 똥고집 새끼, 선배가 선배같이 안 보이나.’
강길만은 초구 번트 사인이 나올 확률이 크다고 봤고 성낙기는 피치아웃으로 피해 갈 생각이 없었다. 김수권처럼 빠른 주자를 강길만 포수가 잡아내리라는 확신도 없을뿐더러 여차하면 공을 빠뜨려 3루까지 내달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야야, 성낙기. 피치아웃은 쓸데없는 짓이야. 지난 시즌 강길만의 도루 저지율이 18% 대인데 니가 아무리 퀵 모션이 좋아도 힘들어. 이럴 땐 기교부리지 말고 정면 승부 하는 거야.
마운드에 뒤에 선 실바의 조언이 그럴듯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깥쪽 포심패스트볼. 서일화가 번트 모션을 했다.
팡.
스트라이크.
배트를 거둬들인 후, 얼떨결에 몸 쪽 꽉 찬 스트라이크를 먹은 서일화가 의외라는 듯 성낙기를 바라보았다. 성낙기는 쉴 틈도 없이 퀵 모션으로 2구를 던졌다. 이번엔 몸 쪽으로 높게 오다가 뚝 떨어지는 슬라이더.
팡.
스트라이크.
또다시 스트라이크. 번트 모션을 취하고 있다가 볼일 거라 생각하고 배트를 거둬들인 서일화에게 세화스쿼럴스 팬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서일화는 노아웃 1루에 주자가 김수권이라면, 거기에 자신이 번트 모션을 취하고 있다면 함부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할 거라고 봤다.
번트를 피해가는 피칭이 이어지면 덤으로 볼넷을 얻을 생각. 하지만 자신의 판단 실수와 선구안을 지나치게 좁혀간 탓에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 말았다.
‘뭐, 뭐야. 이 상황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아?’
서일화의 안일한 플레이 때문에 제때 스타트를 끊지 못한 김수권. 도루를 할 때와 번트 동작에서의 스타트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도루는 어차피 리스크를 안아야 하는 만큼 최대한의 리드에 반 박자 빠른 스타트가 필요하지만, 그래서 가끔 역모션에 걸려 견제사를 당하지만, 번트는 안전한 2루 진루가 목적이므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김수권이 2루 도루의 타이밍을 놓친 이유라면 이유다. 어쨌든 이제 김수권은 2루를 훔칠 스타트를 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광석화(電光石火)”
팡.
스트라이크 아웃!
성낙기는 143km의 빠른 포심패스트볼로 서일화을 삼구 삼진으로 잡아냈고,
2루!
1루수 구종욱의 말과 동시에 강길만은 2루로 공을 던졌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퀵 모션은 최대한 짧았고 포심패스트볼은 가장 빠른 공이 들어갔다.
게다가 바깥쪽 스트라이크였다. 강길만의 손을 떠난 공이 2루로 향했고 2루수 김석문이 자리를 잡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뒤이은 김수권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세이프!
2루심의 양손이 좌우로 넓게 펼쳐졌다. 송구는 원바운드로 날아갔고 김석문이 잘 잡았지만 볼의 속도가 급격히 죽었다. 옷에 묻는 흙을 터는 김수권을 보고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쩝. 빠르긴 겁나 빠르네.’
성낙기가 속으로 툴툴댔다. 어쨌든 번트도 없이 2루까지 진출했으니 대단한 타자임엔 틀림이 없다.
세화스쿼럴스의 다음 타자는 3루수 김창범으로 나름 타격이 준수한 중장거리 타자였다.
2할 8, 9푼은 기본적으로 치고 20개 내외의 홈런을 기록하는 안정적이고 계산이 서는 타자인 김창범을 성낙기는 4구째 라이징패스트볼로 삼진 처리했다.
그리고 또다시 맞이한 여태호.
성낙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5회에 던진 퀘이크볼을 받아쳐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을 만큼 성낙기의 공에 적응했다. 코스만 좋았다면 외야를 꿰뚫는 2루타가 될 수도 있었다.
김수권은 2루에 가서도 여전히 리드를 넓히고 있다.
성낙기가 2루로 견제구를 던졌다.
촤아아악!
세이프!
아차, 싶었는지 슬라이딩으로 2루 베이스를 찍은 김수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역모션에 걸릴 뻔했다. 자연히 리드 폭이 아까보다 좁아졌다. 힐끗 2루를 본 뒤 셋 포지션에 들어가는 성낙기.
팡.
라이징패스트볼(6cm/10).
스트라이크.
여태호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마지막에 솟아오르는 공을 감각적으로 알고 평소보다 배트를 높게 휘둘렀지만 라이징패스트볼의 궤적은 생각보다 더 높이 떠올랐다.
다음 공으로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바깥쪽 낮은 볼. 여태호가 나가려던 배트를 다시 거둬들였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이제, 그 볼이 들어올 차롄가?’
여태호는 내심 퀘이크볼을 노리고 있었다. 포심패스트볼과 흡사하면서도 뭔가 흔들림이 있는 구종. 아마도 그 볼이 성낙기의 승부구이리라.
까다롭기 그지없는 공이지만 그나마 다른 변화구보다는 낫다고 봤고 어떻게든 쳐내야만 하는 공이다.
그런 여태호의 바람대로 성낙기가 던진 3구는 포심패스트볼과 비슷한 궤적으로 날아들었다. 몸 쪽이지만 바짝 붙지 않아서 잘만 맞으면 홈런으로도 연결할 수 있는 코스라는 확신이 들자 여태호는 망설임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휘잉.
스트라이크.
하나, 예상과 달리 성낙기가 던진 공은 마지막에 느려지면서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 여태호는 헬멧이 벗겨지면서 무릎을 땅에 짚었다. 마지막에 떨어지는 공을 최대한 따라가다가 중심이 완전히 흔들렸다.
“젠장, 못 던지는 게 뭐야.”
그런 뒤,
“전광석화(電光石火)”
낮게 읊조리는 성낙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마지막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와 있었다.
루킹 삼진.
전광판을 바라보는 관중들은 입을 쩍 벌렸다. 144km. 2군에서 갓 올라온 투수의 스피드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저런 선수가 왜 지금까지 2군에 있었는지 캐스터와 해설자도 이해를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늘 성낙기가 선보인 여러 가지의 구질도 놀라웠지만, 8회에 144km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메이저리그에서 온 스카우트, 톰과 울프 마이어도 놀라움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고, 여태호는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그렇게 8회 초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글귀가 떴다.
[체력이 8 남았습니다.]
‘아, 어쩐지 마음이 불안하더라. 하여튼 이놈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성낙기는 자진해서 그만 던지겠다고 했고, 허봉호 감독은 쟤 스타일이 아닌데? 하는 눈을 떴다.
그리고 9회 마무리로 구문철을 대기시켰다. 연준후는 8회 말에도 최고의 피칭을 이어갔고 그대로 이닝이 종료되는가 싶었는데 투아웃 이중호 타석에서 일격을 맞았다.
“아, 강속구의 힘이 떨어졌나요? 이중호 선수 몸 쪽 높은 공을 그대로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립니다. 홈-런!”
세화스쿼럴스 관중석은 싸늘해졌고, 역시… 이제야 이름값을 하나보다 생각한 성낙기는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이중호를 와락 껴안았고, 나머지 선수들은 팔짝팔짝 뛰었다.
잘하면 세화스쿼럴스를 이길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선수들의 눈에 가득했다.
그리고 9회 초가 되자 구문철이 마운드에 올랐다. 마무리를 한 적은 없지만 불펜에서는 최고의 투구 내용을 보였던 언더스로 투수.
140km 초반대의 속구에 까다로운 슬라이더와 커브를 장착했다. 강길만은 연습 투구를 받고 공을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이 좋다는 뜻.
세화스쿼럴스의 9회 초 첫 타자는 루이스 브래들리였다. 무려 120만 불을 주고 데려온 mlb 경력자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면서 쌓은 타율은 mlb 0.256. 트리플 A 0.288로 준수했고
특히 지난 시즌 트리플 A에서 17홈런을 때려낼 만큼 만만치 않은 중장거리 타자다.
188cm의 키에 102kg의 다소 큰 체구인데도 타고난 어깨와 빠른 위치 선정으로 우익수 수비에 강점이 있다. 루이스가 배트를 돌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굳은 표정으로 강길만의 사인을 받는 구문철.
-어… 쟤 이상한데?
“뭐가요?”
-보면 모르겠냐. 얼굴 표정이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거나 평소와 달라.
“무슨… 설마요.”
벤치 뒤에서 둥둥 떠다니는 드랙 실바의 말에 성낙기는 피식 웃었지만 그 말을 듣고 마운드를 보니 어쩐지 실바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구문철이 강길만에게 받은 사인은 커브.
성낙기에게도 빗맞은 타구를 힘으로 이겨내며 텍사스 성 안타를 만들어낸 루이스였기에 조심스럽게 풀어나가려는 강길만이다.
구문철이 던진 커브가 정 가운데로 오면서 중간에 확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