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35화 (35/188)

# 35

035화 별종 투수의 탄생 3

팡-

스트라이크.

거리낌 없이 꽂히는 성낙기의 공. 김수권은 미트를 바라보았다. 몸 쪽을 파고드는 정직한 공이 그를 지나쳐 갔다.

살짝 어이가 없다. 이토록 평범한 공을 던지다니. 포수의 공을 받으면서 투수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김수권은 오른발을 배터 박스에서 뺀 채 두어 번 스윙을 하고 타격 자세를 잡았다. 그는 다음 공으로 슬라이더나 커브를 예상했다. 볼 카운트가 조금이라도 유리해지면 변화구로 배트를 유인하려는 것이 강길만의 습성이다.

슬라이더라면 아마도 가운데로 오다가 몸 쪽으로 휘어질 것이다. 커브라면 상대적으로 느려서 상황에 따라 가볍게 내야를 넘긴다는 계산. 그러나 김수권의 예상은 빗나갔다.

팡-

스트라이크.

아까와 똑같은 코스에 포심패스트볼이 들어왔다. 김수권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공이 들어오자 움찔, 했지만 배트를 내밀지는 못했다.

자신을 상대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도 당연한 듯 포수의 공을 잡고 여유롭게 로진백을 만지는 성낙기의 모습이 보였다.

‘이것 봐라? 글러브가 거기 있으니 던진다 이거야?’

표정으로 보나 몸짓으로 보나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것 같은 성낙기를 보고 김수권은 조금씩 피가 끓어올랐다. 이건 기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잘 모르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는 만난 적 없는 성낙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1군에 올라온 지 한 달 된 견습 투수를 아는 마당에, 이미 리그를 주름잡는 자신을 성낙기가 모를 리 없다. 김수권의 개막 이후 4월 한 달 타율은 무려 3할 8푼8리였다.

‘김수권, 자존심 뭉개지는 날이네. 저런 B급한테 무시를 당하다니.’

김수권은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성낙기의 다음 공은 슬라이더. 가운데를 향하다가 몸 쪽으로 뚝 떨어졌다. 김수권은 배트를 내밀다가 가까스로 거둬들였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포심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슬라이더를 던질 때의 폼이 구별이 안 된다.

이런 디셉션(deception)은 그가 알기론 A급 투수들이나 가능하다.

슬라이더 하나를 보고 김수권은 성낙기가 만만한 투수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리그 최고의 타자다운 분석력과 순발력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셈이다.

성낙기가 와인드업을 했다.

팡.

볼.

성낙기는 성낙기대로 놀라고 있었다. 방금 던진 공은 포심패스트볼이라고 믿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체인지업이었다. 릴리스포인트도 일정했고 익스텐션(extension)-공을 끌고나와 던지는 위치-도 완벽했다. 그럼에도 속을 듯 속지 않는다.

-네 공은 좋았어. 저 타자가 알고 안 따라 나오는 게 아니다. 저건 그냥 느낌이야. 재능으로만 알 수 있는.

실바의 말을 뒤로 하고 성낙기는 사인을 보냈다. 포수 강길만은 사인이 맞는지 확인 사인을 다시 보냈다. 성낙기가 고개를 끄덕였고,

따악.

5구째 김수권이 친 공은 중견수 플라이였다. 공을 치고 궤적을 올려다보던 김수권은 믿기 힘든 표정으로 1루로 달리며 성낙기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에 솟아올랐어.’

김수권은 KBO리그에서 이런 라이징패스트볼을 상대한 적이 없었다.

볼 끝이 살아 있다는 공성진이나 연준후, 공성진과 짝을 이뤄 지난 시즌 우승을 일구었던 모연비퍼스의 언더스로 투수 김길환 정도라야 던지는 볼을 신인인 성낙기가 던지고 있다.

그 쟁쟁한 투수들보다 더 떠오르는 라이징패스트볼을.

‘우와, 저걸 쳤어.’

놀라기는 성낙기도 마찬가지. 회심의 라이징패스트볼이었다. 2군에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누구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볼을 김수권은 쳤다.

비록 외야 뜬공이지만 타이밍은 정확했고 무엇보다 떨어지는 볼 두 개를 연달아 보고 나서 솟아오르는 볼에 저런 타격을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성낙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2번과 3번을 연달아 내야 땅볼로 잡았다. 삼호필드파크에 모인 팬들이 막대 풍선을 마구 두드리며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성낙기를 응원했다.

***

세화스쿼럴스의 연준후는 예상대로 1회에 마운드에 서자마자 유격수 땅볼과 2삼진으로 간단하게 끝냈다. 엔서니페킨스는 뚝 떨어지는 포크볼에 삼구 삼진을 당하고 나서 허벅지에 대고 배트를 부러뜨렸다. 삼구 삼진을 당한 기억은 근래에 없었다.

“푸우… 쉴 틈이 없네.”

삼호슈퍼스타즈의 공격이 빨리 끝나서 성낙기는 더그아웃에 앉자마자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관중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TV중계화면에 장비를 갖춘 여럿의 외국인들이 비춰졌기 때문이다. 캐스터는 그들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라고 소개했다.

“아마, 연준후 투수를 보기 온 것 같습니다. 단기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연준후 선수가 포크볼 투수임에도 이렇다 할 부상도 없이 몇 년을 꾸준히 던져왔기 때문에 내구력은 입증이 되었거든요.”

“실제로 계약 직전까지 갔었죠?”

“그렇습니다. 신분 조회를 통해 오퍼를 한 몇 구단이 있었죠. 그런데 그 조건이 그렇게 높은 수준이 아니었어요. 연준후 선수라면 충분히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만하거든요. 어쩌면, 운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지난 시즌 끝나고 거물 FA가 워낙 많이 풀려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단기 계약을 한 이유도 아마 재도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보입니다. 올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더 좋은 조건으로 오퍼가 올 가능성이 높거든요. 메이저리그 시장 상황도 올해가 훨씬 나을 겁니다. 아마… 우승을 못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구단도 고민이 될 겁니다. 계약대로 갈 수도 있고 대승적으로 풀어줄 수도 있겠죠. 어쨌든 몇 년 동안 팀에 공헌도가 높은 선수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동안, 성낙기는 리그 최고의 타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1번 김수권이 테이블 세터로 리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면 4번 여태호는 대표적인 슬러거였다. 슬러거이면서도 3할이 이르는 타율을 꾸준히 유지하는 타자다.

2018년 성적은 3할 2리에 38홈런 118타점이었다. 키는 180cm 정도인데 워낙 장사형 체구에 강골로 소문났다. 팔씨름에서 져 본 적이 없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강길만은 초구부터 바깥쪽 커브 사인을 냈다. 약속과 다르다. 분명 성낙기가 사인을 주도하기로 했는데. 그만큼 여태호의 힘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성낙기가 다시 사인을 포심패스트볼로 바꿔냈다.

타임.

“야, 너 어쩌려고 포심패스트볼이야? 쟤가 누군 줄이나 알아?”

“알죠.”

“알면서 그래? 지금 니 속구로는 맞아나가기 딱 좋다. 그래도 변화구가 가장 나은 구질이야.”

“정면 승부 하겠습니다. 피해 다니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요. 도망자보다는 추격자가 되고 싶습니다.”

“영화를 너무… 그래 알았다. 니 맘대로 해 봐.”

강길만이 툴툴거리며 내려갔다. 성낙기는 바깥쪽 포심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팡.

틱.

스트라이크!

“응?”

여태호가 믿어지지 않는지 포수 미트를 빤히 바라본다. 파울 팁.

느리고 평범한 볼이라 여겼는데 제대로 맞지 않았다. 감각도 좋았고 볼의 궤적도 일반적인 포심패스트볼이었다. 여태호는 조금 전의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배트에 맞기 전, 공이 약간 흔들렸던 것 같다.

공을 받은 강길만도 의외의 결과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서 분명 공이 흔들렸고 배트에 빗맞은 뒤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팡.

따악.

두 번째 공을 여태호가 맞췄다. 공은 배터 박스를 맞고 바운드가 된 채 1루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여태호가 주심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배터 박스에서 벗어나 배트를 붕붕 돌렸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여태호. 성낙기가 연속으로 던진 퀘이크볼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그게 포심패스트볼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TV중계 화면에는 미세하나마 퀘이크볼의 떨림이 보였고 중계진은 느린 화면을 반복해서 재생시켰다.

1, 2cm에 머물 땐 잡아내지 못하던 공의 움직임이 3cm에 이르자 보였다. 2군 경기를 중계하던 카메라와 질적으로 다른 고 해상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슨 저런 공이 다 있냐?

-분명 흔들렸어. 배트 앞에서 위 아래로 흔들렸어.

-와… 신기해. 정말이네.

-많이 던지다 보면 저런 공도 생기는 모양이다. 이거 새로운 변화구 아니야?

-아마, 투수는 무슨 공을 던진 줄도 모를 걸?

성낙기는 여태호가 만만치 않은 타자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연속 두 개의 전력을 다한 퀘이크 볼이 들어갔는데도 공이 배트에 걸리고 있다.

1구는 파울팁이었지만, 2구는 좀 더 정확히 맞았다. 아무리 위력이 있는 공이라도 눈에 익으면 맞는다는 걸 여태호는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답게 2구만에 증명해 보이고 있다.

-드디어 체인지업을 사용할 때가 왔다. 여기서 체인지업이면 아마 오줌이라도 지릴 거다.

존이 나름대로의 볼 배합을 생각한 뒤 말했다.

-아니지, 저 정도의 타자는 이미 그 정도의 볼 배합은 읽을 거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타자 몸 쪽으로 파고드는 투심이면 바로 아웃이다. 내 말을 믿고 그대로 던져.

실바는 실바대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던졌던 구질을 강조하고 나섰다. 두 가지 구질 모두 좋은 선택일 수 있다.

체인지업은 퀘이크볼과 같은 속도로 날아가는 듯하다가 급격히 느려지면서 가라앉으니 타자가 속을 확률이 제법 되고 투심 역시 퀘이크볼과 공의 속도는 비슷하지만 궤적이 판이해서 제구만 되면 스윙이거나 먹힌 타구가 나올 가능성이 많다.

성낙기도 두 사람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말씀이 맞네요. 이 순간의 볼 배합에 어울립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거기서 하지만이 왜 나와. 잡생각 말고 그냥 던져. 투심으로.

쉬익.

성낙기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 쪽으로 날아가다가 급격히 바깥쪽으로 휘면서 떨어졌다. 여태호는 자신의 목 부위를 향해 볼이 날아오자 움찔했고 공은 그대로 홈프레이트를 통과해 포수의 바깥쪽 낮은 코스에 걸쳤다.

바로 헤이드 존의 슬라이더.

체인지업과 더불어 수많은 강타자들을 잡아냈고 전설의 반열에 오르게 한 바로 그 슬라이더다. 비록, (68/100)의 스탯이어서 아직 강속구가 완성되지 않았고 볼 궤적이 다소 밋밋한 단점은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존의 최전성기와 비교한 위력일 뿐, 오늘 던진 성낙기의 슬라이더는 누가 보더라도 날카로운 궤적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강타자 여태호가 삼구 삼진으로 물러났을 때 경기장은 잠시 조용해졌다가 3루 쪽 삼호슈퍼스타즈 관중석부터 환호성이 타졌다.

“와아아! 이거 실화냐?”

“크아… 죽인다. 저걸 성낙기가 던진 거야?”

“내 진즉에 알아봤지. 저놈은 KBO 씹어 먹고도 남을 놈이라니까.”

“그래? 언제부터 알았는데?”

“언제긴… 개막전부터지. 몸 푸는 거만 봐도 대충 각이 나오걸랑.”

***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연준후와 성낙기는 5회까지 2안타, 3안타만을 허용하며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갔다. 어느 누구도 성낙기가 세화스쿼럴스라는 강팀을 맞아 호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성낙기를 잘 모르던 세화스쿼럴스 팬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연준후를 보기 위해 미국에서 날아온 스카우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톰. 저 17번 말이야. 알고 있었어?”

“아니. 오늘 처음 알았어. 생각보다 좋은데? 특별한 공을 던져.”

“그렇지? 자세히 보면 그냥 직구가 아니야. 끝이 휘면서 솟아오르는 유형… 마치 살아 있을 때의 헤이드 존처럼 말이지.”

“오, 잘 봤군. 볼 스피드는 느려도 흡사한 구석이 있어, 특히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가 닮았어. 게다가 커브는 낙폭이 아주 좋아. 한국에 저런 선수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동감. 성낙기라는 투수도 스카우팅 리포트에 올려놔야겠어. 연준후를 보러 와서 흥미로운 투수를 보게 되는군. 나이도 아주 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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