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34화 (34/188)

# 34

034화 별종 투수의 탄생 2

“선수들이 패배 의식에 젖어 있습니다. 개막전 이후 좀 살아나는 듯했지만 승리보다는 패배가 익숙한 선수들 입니다. 전임 감독도 특타니 뭐니 정신 개조를 위해 힘썼지만 선수들이 보이지 않는 태업을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지?”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코치는 7연패 후 단장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마영진 단장은 약간 멘붕이 온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감독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전에 말한 정영훈을 데려올까요? 듣기론 고등학교 야구부와 훈련을 하고 있답니다.”

“그보다… 싹 갈아치워야겠소.”

“뭘요?”

“뭐긴. 패배 의식에 젖은 1군 선수들이지. 도대체 의욕도 없고 연봉만 축내고 있어.”

“어떻게 하시겠다는…….”

“백업을 대거 기용할 거요. 기존의 주축 선수들 트레이드 추진합시다.”

“그렇게 다 바꿔서 성적이 납니까?”

“이대로 가도 어차피 성적은 하위권이야. 그럴 바엔 모험을 하는 게 낫지.”

“험… 어이가 없네. 내 살다 살다 단장질 하면서 선수를 싹 바꾼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애초에 노장들 정리할 때 반대하시던 분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스프링 캠프 때 5:3 트레이드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받은 유망주 3명은 지금 뭐하고 있죠?”

“기용은 감독 권한이야. 아무튼 내 생각은 그거야. 정영훈 영입하고 김현웅, 오진추 외 몇 명 묶어서 트레이드 추진해 줘. 기왕 배린 몸 할 건 하고 후회나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래요?”

“…….”

마영진 단장은 허봉호 감독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초반이라지만 시즌이 시작된 마당에 선수단을 이렇게 흔들어 놓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게 마영진 단장의 생각이었다.

몇 게임 해보지도 않고 7연패 했다고 싹 갈아엎자는 허봉호 감독이 정상으로 안 보였다.

***

“허봉호 감독님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요?”

“네, 맞습니다. 이건 숫제 기둥뿌리를 뽑자는 얘긴데… 안 그래도 내, 외야 할 것 없이 흔들리는 선수들 멘탈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리고 트레이드는 뭐, 아무나 하나요? 상대가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럼… 그렇게 해 줘요.”

“네?”

“허 감독님 원하는 대로 해주시라고요. 어차피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이대론 죽도 밥도 안 돼요.”

“티, 팀장님. 그렇게 되면 작년에 뛴 선수들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구단 운영은 없어요.”

“지난 몇 년간 얻은 게 뭔가요? 없잖아요. 주전 선수들 굴릴 줄만 알았지 바꾸지는 못했죠. 현재보다 못할까봐 두려워서요. 우리가 노장을 몇 정리했지만 그 걸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신 거예요, 허 감독님은.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세요. 꼴찌나 다름없으니까 이런 것도 가능하지 중위권만 되어도 팬들 성화에 꿈도 못 꿀 일이에요.”

“이거 뭐… 도통…….”

마영진 단장은 김아경과의 대화에서도 본전을 못 찾고 입맛만 다셨다. 만약 허봉호 감독의 희망대로 선수들이 트레이드되고 나면 지난 시즌의 얼굴들은 거의 없어진다. 완전한 외인부대가 만들어지는 것.

“에이… 말 꺼낸 내가 바보지. 뒤집어엎는 거 좋아하는 애한테… 츱.”

마영진 단장은 김아경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삼호슈퍼스타즈는 트레이드 논의 이후 2승을 했으나 다시 4연패의 늪에 빠졌다.

그리고 4월 말, 전격적인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신생 팀인 KW치타스와의 4:4 트레이드.

삼호슈퍼스타즈는 즉시 전력감을 넘겨줬고 그 대신 젊은 유망주를 받았다.

KW치타스의 탈꼴찌를 향한 간절한 마음 덕분에 가능했던 트레이드였다.

삼호슈퍼스타즈는 김현웅, 오진추, 한상필, 등이 트레이드되었고 구종욱이라는 미완의 슬러거와 발이 빠르고 공을 맞추는 데 재질이 있는 하진수 등을 데려왔다.

하봉호 감독은 코치들과의 내부회의 결과 주전 엔트리를 짰다.

1번-이정우-유격수

2번-하진수-3루수

3번 엔서니페킨스-중견수

4번-이중호-우익수

5번-구종욱-1루수

6번 지명타자-정영훈

7번-김석문-2루수

8번-강길만-포수

9번-김화성–좌익수

엔트리 중 구종욱, 하진수, 김화성이 이번 트레이드로 데려온 선수들이다.

트레이드되자마자 주전으로 기용해야 할 만큼 삼호슈퍼스타즈의 1군 백업이 약했다는 뜻도 된다.

포수 이두열은 아깝지만 프레이밍과 볼 배합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그나마 어깨는 약하지만 여러모로 안정적인 강길만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다. 37세의 노장 정영훈 영입도 같이 추진되어 6번 지명타자를 꿰찼다.

노장이지만 타격이 좋고 체력 관리만 되면 충분히 제 몫을 해줄 선수.

그러므로 지명타자는 정영훈에게 더할 나위 없는 포지션이다. 2군에서 가끔씩 한 방을 쳐주던 김석문도 새롭게 엔트리에 합류했다.

“휴우~ 어렵다, 어려워. 뭔가 착착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보다는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인데…….”

“그래도 이 정도가 최선 아닐까요? 느낌은 좋습니다만.”

“그래? 두고 봐야지.”

이렇게 진용이 갖춰졌을 때는 4월 27일. 팀 승률은 4할 1푼 2리에 허덕이고 있었다. 연진맘모스와 KW치타스가 있었기에 그나마 가능했던 수치. 이대로 가면 비슷한 승률의 연진맘모스에 따라잡힐 기능성도 있다.

***

“안녕하십니까, 베이스볼 이브닝의 이슬비입니다. 여러 전문가들 모시고 말씀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중략…….

“허봉호 감독의 오판으로 보입니다. 시즌 중에 이러면 선수들은 집단 무기력에 빠질 수 있어요. 리빌딩을 저렇게 하는 법은 없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즌 전에 해야지요. 잘 뛰고 있는 선수들 연패 좀 당했다고 물갈이 해버리면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야구가 막무가내로 되는 게 아닙니다.”

중외울프스 전 감독 오재봉이다. 성적 부진으로 감독을 사퇴하고 해설자로 더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저도 동감입니다. mlb의 역사를 봐도 말이죠. 팀을 싹 바꾼 예는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노장이 이끌어주는 가운데 조금씩 기회를 주면서 크기를 기다리는 게 정석입니다.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보냈다가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선수들이 칼이 되어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90년대 교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강남철. 그가 보기에도 허봉호 감독의 선택은 둑 쌓으려다 터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런 우려를 안고 5월 1일, 삼호슈퍼스타즈는 강호 세화스쿼럴스와의 3연전을 시작했다. 공교롭게 성낙기의 등판일이었다.

4월 한 달은 타선의 몰락에도 성낙기가 불펜 역할을 잘 수행하며 2홀드 3세이브를 따냈다. 선발로도 2승을 챙겼다.

그는 어느새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어 있었고 한 가지만 빼면 허봉호 감독의 전폭적인 믿음을 얻어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타격.

행크아론의 스탯을 얻은 이후 틈만 나면 배트를 휘두르며 설치는 통에, 감독의 믿음 위에 미움도 함께 쌓고 있는 중이다.

2군에서 자기를 내보내 달라고 글러브를 들고 어슬렁거리던 때와 똑 같았기 때문에 감독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대타로 내보내 달라는 성낙기의 의중이 빤히 보였기 때문인데 그것만 빼고는 모든 게 좋다. 이계현 코치나 허봉호 감독은 오늘 경기로 성낙기의 투수로서의 역량이 드러난다고 봤다.

상대가 전년도 한국 시리즈까지 진출한 세화스쿼럴스.

투수보다는 타격이 더 막강한 팀이었으므로 이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냐에 따라 경쟁력이 판가름 난다.

타선을 새롭게 정비한 후의 첫 경기이니 팬들 또한 걱정과 기대감을 갖고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길만 선배, 오늘 끝나고 막걸리나 한잔할까요?”

“너, 또 그 소리냐? 전에도 마셨잖아. 막걸리 못 먹어서 죽은 귀신 있어?”

“있습니다.”

“알았다. 오늘 이기면 내가 산다. 니가 좋아하는 닭볶음탕도 같이.”

“하하, 그럼 사인은 제가 낼게요.”

“뭐, 마음대로 하셔. 그러다가 점수 주면 내가 리드한다.”

성낙기는 마운드에 올라 씩씩하게 공을 던졌다. 팡, 팡, 하는 소리가 오늘따라 상쾌하다. 성낙기는 기분이 좋은지 공을 던지면서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강길만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 세화스쿼럴스 투수는 연준후.

특이한 계약 조건으로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궜던 선수다. 한국 시리즈에서 팀을 우승시키고 선수가 원하면 해외 진출을 추진한다는 조건부 계약을 맺었다.

구단으로서는 한국 시리즈 우승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위해 양보했다. 하지만, 한국 시리즈 우승이 밥 먹듯 되는 것도 아니고 운도 따라야 해서 연준후의 꿈이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게 세화스쿼럴스 단장의 생각이다.

결국 선수와 구단은 동상이몽을 꾸는 셈이었다. 우승에 도전하는 각오를 새롭게 한 연준후는 작년, 다승과 삼진왕을 휩쓴 에이스 중의 에이스.

그런데 그런 선수와 맞닥뜨린 성낙기의 표정은 너무나 한가하기만 하다.

***

경기 전날,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코치의 대화.

“이코치, 내일 연준후 선발인데 로테이션이 어떻게 되지?”

“5일 휴식을 지킨다면 1, 2, 3선발까지는 어렵고… 김도진이 나올 차례인데 요즘 좋지 못합니다.”

“김성윤은 어때?”

“김성윤도 작년만큼 구위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쯔읍… 작년보다 못하면 8승을 기대하기 어렵단 소리고 5점대 방어율도 어렵단 말인데… 투수 파트가 왜 그래.”

“그게… 김성윤 같은 경우는 몇 년째 날이 더워져야 스피드가 살아나는 스타일이라서…….”

“성낙기는?”

“그저께 25구 던졌습니다.”

“물어보긴 했어?”

“네,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던지겠답니다. 연준후와 맞짱을 뜨고 싶다면서 꼭 내보내 달라고 저에게 빌기까지 했습니다.”

“휴… 그놈이 엉뚱한 구석은 있어도 전투력 하나는 좋아서 마음에 들어. 내일 성낙기로 하지.”

성낙기는 그렇게 마운드에 올랐다. 구장은 강릉에 있는 삼호필드파크.

오랜만의 홈경기인 만큼 삼호슈퍼스타즈의 팬들이 경기장 한쪽을 절반 이상 메우고 있었다. 연습 투구를 마치자 세화스쿼럴스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김수권.

지난 시즌 0.322의 타율에 32도루를 기록한 리그 최고의 1번 타자라고 불리는 왼손 타자. 홈런은 8개에 그쳐 홈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타자지만 일단 1루로 나가면 포수 강길만의 어깨로는 2루 도루를 잡기 어렵다.

아니, 3루까지 무사 통과일지도 모르지.

김수권은 성낙기가 좋은 공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제 영상을 돌려본 결과, 패스트볼의 볼 끝이 아주 좋고 슬라이더와 커브도 각이 예리하다.

뜬금없이 빠른 공을 던지기도 한다. 가끔 공이 가운데로 몰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못 때릴 공은 아니다.

김수권은 그런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큼 끈질기고 눈이 좋으며 강속구 투수에게도 강하다. 오늘 선발로 나서는 연준후가 늘 하는 말은, 같은 팀이라서 김수권과 상대하지 않아 좋다는 거였다.

김수권은 2군에서 올라와 아직 철모르고 씨익 쪼개고 있는 성낙기에게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두어 개의 공을 보면 적응이 끝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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