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033화 별종 투수의 탄생 1
문을 여니 서희와 장하연이 서 있다. 교복이 아닌 하얀 티에 청바지 차림의 장하연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서희는 원룸에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혼자 사는 남자 냄새가 난다고 타박을 하고는 방바닥에 앉았다.
“이렇게 살고 있었어? 좁지 않아?”
사실은 서희도 처음 와보는 원룸이다. 전에도 놀러 온다는 거 극구 말렸기 때문인데 오늘은 바쁘다면서도 승낙했으니 겸연쩍다.
“괜찮아, 나 혼자 살기는 딱 좋아.”
“저도 마음에 들어요. 아늑하고 분위기 있어요. 음악만 있으면 딱이겠다.”
역시 하연이는 서희랑 다르다. 매사에 긍정적이잖아. 저러니 공부도 잘하지. 장하연이 음악 이야기를 꺼내자 성낙기는 저스틴 비버를 좋아한다고 했고 장하연은 어머, 저도 그래요, 하면서 장단을 맞췄다. 곧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우리 야시장 갈까?”
“야시장요?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거기 가면 없는 게 없어, 막걸… 아니, 신기한 것도 많고 재미있는 오락도 많아.”
“와아! 그럼 가요.”
그렇게 해서 도착한 야시장에서 성낙기는 닭 꼬치 하나씩을 손에 쥐어주고 자기는 캔 막걸리를 하나 손에 쥐었다.
돌아다니다 보니 다트게임, 농구게임, 펀칭게임, 주사위 굴려 사다리타기 게임도 있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건 야구공 던져 과녁 쓰러뜨리기였다.
열 번 던져 맞힌 개수대로 상품을 지급하는데, 열 번 다 맞히면 하얗고 커다란 곰 인형을 준단다.
“꺄악! 곰 인형 너무 예뻐.”
때마침 장하연이 곰 인형을 보고는 탐을 냈다. 성낙기는 돈을 지불하고 야구공을 바구니에 받아왔다. 생각보다 과녁이 작다. 하긴, 아무나 다 맞히면 장사 망하겠지.
여기선 와인드업도 셋 포지션도 없다. 그냥 어깨로 던지는 거다. 성낙기는 심호흡을 했다. 장하연이 보고 있기 때문일까. 실제 경기를 할 때보다 더 떨렸다. 거리는 7미터 남짓,
‘신이여.’
성낙기는 저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경기에 나서면 포수 미트가 원숭이 엉덩이만 하게 보이는데 이건 겨우 몇 미터인데도 날아가는 참새 똥꼬만 하다.
-아, 지랄 신이여? 애가 드디어 완전히 정신 줄을 놨구먼.
-내 말이 바로 그거라니까. 이상한 놈 옆에 있지 말고 철수하는 게 답이야. 안 그럼 우리가 먼저 돌아버릴 수 있어.
실바와 존이 또 배가 아픈지 구시렁거렸다. 성낙기는 떨리는 손으로 공을 잡았다. 어떻게든 곰 인형을 따야만 한다. 이건 인형을 사서 선물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물질이 오가면 선물을 받는 상대도 부담을 느끼게 마련이다. 단판 승부로 임팩트 있게 곰을 따내는 것이야말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휙-
따닥-
휙-
따닥-
“오빠 최고야.”
“멋져요.”
과녁이 넘어갈 때마다 서희와 장하연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고 성낙기는 신이 나서 계속 공을 던졌다. 과녁이 계속 쓰러질 때마다 게임장 주인 여자는 울상이 되어갔다.
정말 다 맞추면 손해가 막심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과녁마저 쓰러뜨리자 팡파르가 울러 퍼졌고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 있수. 다음부턴 오지 마요.”
주인 여자는 자기 상반신만 한 곰 인형을 내주며 말했다. 곰 인형을 받아든 장하연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성낙기는 자기만 인형 안 준다며 울상인 서희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나서 기분 좋게 헤어졌다.
“저 오빠 좋아해도 돼요?”
헤어질 때 장하연이 한 말이었는데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음과 동시에 눈앞이 잠시 안 보였다. 헤어져 돌아오는 내내 비몽사몽을 헤매다가 실내 야구장에서 원 없이 타격을 한 후에야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
그리고 다음 날부터 성낙기는 글러브 대신 배트를 들고 더그아웃 밖에서 스윙 연습을 했다.
오늘 상대는 지난 시즌 페넌트레이스 3위의 안강피그스였는데 근래 몇 년 동안 가을 야구는 도맡아놓고 하는 팀이다.
투타의 조화가 좋아서 연패가 많지 않고 김 진 감독의 영향으로 작전 야구가 많다.
그래서 상대하는 팀은 까다롭다.
상대 선발은 허덕수였는데, 안강피그스의 2선발로 12승에 ERA 3.44의 수준급 투수였다.
1회가 시작되자 허덕수의 변화구에 이정우의 배트가 춤을 춘다. 성낙기는 멀리서 허덕수의 투구에 타이밍을 잡아보면서 간결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박코치, 혹시 성낙기에게 타격 가르쳐줬어?”
“아, 아닙니다. 제가 투수에게 타격을 왜 가르치겠습니까.”
“그래? 그런데 왜 저러지… 저놈이 저러는 건 내보내달라는 무언의 협박 같은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딴엔 고등학교 때 타격을 좀 했답니다.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니 구석에서 쿠샵이나 하라고 할까요?”
“정신 사나우니 내 눈앞에서 치워 줘.”
그렇게 해서 성낙기는 허봉호 감독이 안 보이는 곳으로 끌려가서 박종태 코치에게 주의를 받았다.
말이 주의지, 실제로는 배트로 한 대 때릴 듯한 느낌이었다.
삼호슈퍼스타즈의 선발로 나선 마크 트웰은 첫 경기 퀄리티스타트의 좋은 기억을 다 까먹고 있었다.
1번 타자 김교민을 주축으로 안강피그스 타자들의 끈질긴 승부와 도루 허용, 히트앤드런과 세이프티 번트 등의 다양한 작전에 흔들리면서 5회까지 3실점했다.
안강피그스 허덕수의 5이닝 무실점에 비하면 고전이었다.
삼호 타선은 허덕수의 커브와 슬라이더 등의 변화구에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타선은 물을 먹은 듯 흐느적거렸고 마크트웰은 6회에 추가 1실점을 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6회까지 107구를 던져 더 이상은 던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첫 경기도 그랬지만 몸값에 비해 아쉬운 활약이다.
겨우 6이닝을 막으려고 170만 불을 쓴 건 아닐 터, 강속구를 자랑하는 마크트웰이고 변화구도 수준급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다 싶으면 달려드는 mlb의 타자들과 달리 KBO타자들은 최대한 참으면서 팀을 위해 출루하는 걸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든 주자를 한 베이스씩 더 보내려고 하고 스트라이크 비슷한 볼은 커트해 내면서 여차하면 볼넷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들이다.
마크트웰은 더그아웃에 앉아 땀을 닦고 나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질렸다는 듯이.
그날의 경기는 그렇게 끌려가서 불펜에서 2실점을 더 한 뒤 6:1로 마무리되었다.
개막전 이후 두 경기에서 4승 2패로 힘을 내던 때와는 다른 타선의 침묵이었다.
오늘은 유망주 이정우와 이중호도 안타를 쳐내지 못했다.
그만큼 안강피그스의 투수들은 노련했고 타자의 성향에 따라 적절한 투구 패턴을 가져갔다.
가령, 배트스피드가 빠르지 않은 이정우 같은 타자는 속구 위주로, 홈런 타자 이중호 같은 슬러거에게는 낮게 깔리는 브레이킹 볼 위주의 볼 배합으로, 삼호 타선을 잠재웠다.
2차전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필 서든이 7회까지 4실점으로 괜찮게 던졌지만 타선은 상대 4선발을 상대로 6회까지 2득점으로 끌려갔다.
그 2점도 안강피그스의 에러가 나왔기에 기능했던 점수였다.
이정우와 이중호는 1군 투수들의 각이 큰 변화구에 고전했고 2차전 역시 2:5 패배.
“휴, 벌써 타선에 슬럼프가 온 거야? 아무리 안강피그스가 괜찮은 투수를 갖고 있다 해도 이렇게 헤매다니.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무기력한 타선이 이해가 안 가네. 아니면 이게 본래 실력인 거야? 이래가지고 시즌을 어떻게 풀어나가겠어.”
“슬라이더를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2연패 후, 허봉호 감독의 말에 박종태 코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가 보기에도 이전과는 다른 무기력한 플레이다.
벤치클리어링을 하면서 이어가던 기세가 갑자기 확 꺾였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다.
달라진 점이라면 벤치클리어링 이후 오진추와 김현웅이 출장 정지를 당했다는 것.
그뿐이다.
두 선수가 그렇게 선수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선수였단 말인가?
박종태 타격 코치의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박종태 타격 코치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양 허봉호 감독이 말을 이어갔다.
“김현웅 빠졌다고 저럴 리도 없고… 이 코치, 뭐가 문제 같아?”
곁에서 듣고만 있던 이계현 코치에게 허봉호 감독이 물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는 정도의 얼굴 표정과 물음의 뉘앙스다.
“제 생각엔… 실력도 실력이지만 팀의 구심점이 될 만한 선수가 없습니다. 노장이라고 다 정리해 버려서 말이죠. 김현웅은 이타적인 선수가 아니라서 선수들이 잘 따르지도 않고…….”
“어차피 프랜차이즈는 없다고 봐야지 않겠어? 우리가 쳐낸 노장중에 그런 선수가 있었다는 거야?”
“쳐낸 선수 중엔 없습니다만,”
“?”
“타 팀에서 방출당한 선수는 있습니다.”
“누굴 말하는 거지?”
“정영훈 선수입니다. 전 경기 출장은 못했지만 지난 시즌 타율 3할에 62타점을 기록했는데도 리빌딩 때문에 모연비퍼스에서 나온 선수입니다. 삼호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가 눈에 띄는 활약으로 주전을 꿰찬 선수인데 프런트 판단미스로 트레이드 당했었죠.”
“정영훈은 내가 좀 알지. 하지만 나이가 37세라면 선수로서는 환갑 아닌가? 우리 팀도 리빌딩 하겠다고 노장들을 내보낸 마당에 정영훈을 영입하면 모양새가 엉망이 되지 않겠어?”
“정영훈은 노장이지만 아직 2년 정도는 활약할 체력이 되는 데다가 리더십이 있고 선수들이 따라할 만한 모범적인 선수입니다.”
“흠… 요는 정영훈이 팀의 균형을 잡아줄 선수라는 말이군. 생각을 해봐야겠어. 일단은 시즌 시작이니 좀 더 두고 보도록 하지.”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고도 타선의 침묵은 죽 이어졌다.
박종태 코치의 상대 투수에 대한 분석력과 타자들의 노력에도 점수는 좀체 나지 않았다.
1경기로 보면 안타는 그럭저럭 때려내는데 도무지 연결이 안 된다.
기존 1군들은 수비력은 있지만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2군에서 날렸던 이정우와 이중호도 1군 투수의 공에 평범한 타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간혹 상위 타순이 출루해도 엔서니페킨스와 이중호까지만 연결되었고 하위 타선에서는 맥이 끊겼다.
즉, 앤서니페킨스나 이중호에게서 타점이 나오지 않으면 뒤가 없는 타선, 그게 삼호였다. 며칠 후, 김현웅이 돌아왔지만 게임 정지의 여파 때문인지 헛스윙만 남발했고,
-니미, 삼호 경기는 암 걸려서 못 보겠네.
-물 타선도 저런 물 타선이 있냐. 투수만 괜찮으면 뭐 해? 점수가 안 나는데.
-김현웅이 뭐하냐. 게임 정지 먹고 술만 퍼마셨나.
-딱 보면 모르냐, 올해도 글렀어.
나중엔 오진추도 가세했지만 개막전 이후 4승 2패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타선이 터지지 않자 투수진도 흔들렸다.
공성진은 그의 두 번째 등판에 6이닝 2실점으로 잘 던졌지만 타선의 침묵에 패를 안았고, 지난 시즌 에이스 역할을 한 김도진은 은성캣츠를 맞아 4이닝 7실점으로 무너졌다.
흥이 안 나기는 성낙기도 마찬가지여서 안강피그스 전 3연패와 은성캣츠 3연패 후 맞이한 성진재규어스와의 경기에 7이닝 4실점했다.
내, 외야수들의 실수로 투구 수가 늘어났고 집중력이 흔들려 홈런도 맞았다.
투수들이 잘 던져봐야 야수들이 에러를 범하거나 타선이 터지지 않아서 쉽게 경기를 내주고 있었다.
화산래빗스 전을 스윕하던 그때가 머나먼 전설처럼 여겨졌다. 불과 얼마 전인데도 말이다. 화산 래빗스와의 3차전 승리 이후 7연패.
팬들로부터는 도대체 동계 훈련을 어떻게 했느냐는 불만이 폭주했고 선수들은 자신감을 잃어갔다.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을 보였고 마영진 단장은 전전긍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