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032화 벤치클리어링 6
오진추는 마운드에 선 이원삼에게 한마디 날리고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오진추는 벤치크리어링으로 잔뼈가 굵은 나름 베테랑이다.
지난 시즌 화산래빗스 선수들과 엉키면서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3게임 정지를 먹었을 정도로 한번 돌면 물불 안 가리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원삼도 만만치 않았다.
오진추의 주먹을 슬쩍 흘린 뒤에 뒤로 물러서면서 글러브를 면상에 집어 던졌다. 정통으로 글러브에 맞은 오진추가 눈을 찌푸리고는 다시 돌진해 왔다.
이원삼이 다시 물러서면서 주먹을 날렸고 무작정 달려들던 오진추의 턱에 꽂혔다.
덜컥.
오진추의 하체가 풀리면서 주저앉다가 가까스로 일어날 때 김현웅이 마운드로 달려와 이단 옆차기를 날렸고 이원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 있게 몸을 피했다.
“억…….”
그러나 몸을 피했다고 생각한 건 이원삼의 착각이었다.
어느새 성낙기가 이원삼의 뒤를 붙들었고 김현웅의 발이 복부에 그대로 꽂혔다. 이원삼이 충격을 받고 나동그라졌고 조금 늦게 마운드로 온 화산래빗스 선수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화산래빗스 선수들은 느꼈다.
‘뭔가… 다르다.’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의 벤치클리어링은 작년과 달랐다.
작년엔 같이 흥분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패턴이었는데 올해는 전문적으로 사람을 치고 힘으로 꺾는 느낌이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구성원이 바뀐 것인데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만만치 않다.
이중호, 구문철도 그렇고. 김석문, 이두열에 이세환, 안학규까지 각자 제 할 일을 아는 것처럼 포지션이 정확하다.
이중호, 이두열 같은 등치들은 몸빵을 서고 나머지는 교묘하게 화산래빗스 선수들을 말리는 척하면서 양팔을 못 쓰게 만들었다.
흥분해서 날뛰는 건 화산래빗스인데 정작 손해는 다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성낙기는 압권이었다.
처음엔 이원삼의 팔을 뒤로 묶어 김현웅의 발차기를 맞게 만들더니 화산래빗스 선수들이 나오자 한발 뒤로 물러났다가 실랑이를 하며 맞을 만한 선수에게만 다가가서 동작을 방해했다.
성낙기가 선수들 사이를 헤집으면서 말린 화산래빗스 선수들마다 한 대라도 안 맞은 선수가 없었다.
서로 주먹질을 하는 절묘한 순간에 성낙기가 나타났기 때문.
마치, 게임을 시뮬레이션이라도 하는 듯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혹자가 봤다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거기엔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야야, 어서 튀어 나가!
이게 처음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했을 때의 말이었고.
-이원삼 뒤로 돌아가서 못 도망가게 어깨 잡고 자세 낮춰!
그 바람에 이원삼은 정통으로 이단옆차기를 맞았고.
-문충식 오른팔 잡고, 뒤로 돌아서 천호준 다리 걸어. 앞으로 나가서 김오민 붙잡고… 장진석 왼 허벅지 잡아… 진동만 뒷무릎 밀어차고… 허리 굽혀서 빠져나와.
성낙기가 잡을 때마다 화산래빗스 선수들은 여지없이 삼호슈퍼즈타즈 선수들의 공격을 당했고 다리를 공격당한 선수들은 중심 이동을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할 일을 다 마친 뒤 성낙기는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 뒤로 몸을 숨겼고 맞거나 픽픽 쓰러진 화산래빗스 선수들은 기가 꺾인 나머지 벤치크리어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벤치클리어링에 도가 튼 실바의 조언 덕분에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은 의기양양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배를 정통으로 차인 이원삼은 자진 강판했고 뒤이어 올라온 투수는 기세가 오른 삼호슈퍼스타즈 타선에 맹폭을 당해 3점을 빼앗겼다. 스코어 9:2.
“이오수, 준비해.”
허봉호 감독은 성낙기를 내보내는 대신 아직 제 컨디션을 못 찾은 이오수를 투입, 원아웃을 잡은 후에 원래 마무리 임병주를 내보내 경기를 매조지 했다.
의욕을 잃은 화산래빗스 타선은 제구도 안 된 볼에 헛스윙을 남발하면서 제 풀에 무너졌다.
이날 경기로 삼호슈퍼스타즈는 개막전 이후 반타작을 했고 2차전 역시 이세환이 2이닝 3실점 했으나 이어 던진 안민기가 7회까지 1실점, 불펜을 총동원한 후 5:4로 신승했다.
이틀 연속 성낙기는 등판하지 않았다.
***
달라진 삼호슈퍼스타즈의 모습에 팬들은 열광했고, 미디어가 반응했다.
연일 적시타를 때려내는 이중호와 두 외국인 투수의 성공적인 데뷔, 공성진의 에이스다운 투구와 스윙맨으로 호투한 안민기를 조명했고 마무리로 나와 인상적인 공을 선보인 성낙기까지 관심을 보였다.
그런 미디어의 관심과는 달리 심판위원장 오대수는 심판 몇과 함께 동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 일어난 벤치클리어링 장면.
“시즌 초에 일어난 일이니 강하게 나가야 돼. 적어도 주동자급은 많은 게임을 정지시켜야 시즌을 풀어가기 쉬울 거야.”
심판위원장 오대수가 그날의 심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이 함께 보는 모니터 화면엔 서로 뒤엉켜서 치고 박는 장면이 고스란히 재생되고 있었다.
“참, 묘하네. 어째 하나같이 화산래빗스 애들만 쥐어 터지나.”
“그러게 말이오. 작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데? 삼호 애들이 태권도라도 배운 것처럼 싸움을 잘하네.”
“어디보자. 오진추가 한 대 맞은 걸 빼고는 죄다 삼호 쪽이 일방적인데… 이원삼이 김현웅에게 재대로 차였고… 잠깐 멈춰 봐.”
오대수의 눈에 이원삼을 뒤에서 붙드는 손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뿐, 얼굴은 이원삼에게 가려져 있었고 맞는 화산래빗스 선수들 곁엔 항상 성낙기가 팔을 잡거나 발을 거는 등의 장면도 포착했다.
“거참, 묘한 놈일세. 어떻게 얻어터지는 애들만 붙잡고 있는 거지? 우연의 일치겠지만 인과관계가 너무 절묘한데?”
심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성낙기는 폭행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결론을 내고 나서도 뭔가 찝찝한 기분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발표.
이원삼, 오진추-5게임 정지 및 벌금 200만원, 사회봉사 30시간.
김현웅-3게임 정지 및 벌금 100만원.
이중호, 성낙기 경고.
삼호슈퍼스타즈의 첫 벤치클리어링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화산래빗스 선수들을 맨 앞에서 겁박한 이중호와 교묘하게 양아치 짓을 한 성낙기는 경고를 먹었다.
성낙기 같은 경우는 혐의는 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케이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성낙기는 화산래빗스와의 3차전에 선발로 나와 9이닝 1실점, 경기 스코어 3:1로 완투승을 거두었다.
김현웅이 빠진 자리에 이중호가 들어갔고 4번의 중책을 맡은 이중호는 6회 말 스리런 홈런으로 어제 벤치클리어링의 기세를 이어갔다.
화산래빗스는 생각지도 못한 스윕을 당했고 예상외의 선전을 한 삼호슈퍼스타즈는 개막하고 나서 4승 2패의 전적으로 2승 4패였던 작년과 다른 출발을 알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선발투수진이 강했고 2군에서 올라온 타자들이 곧잘 안타를 쳐냈다.
확실한 외국인 두 투수가 첫 등판에서 모두 좋은 투구를 선보였고, 공성진의 이름값다운 투구와 빠른 볼을 자랑하는 안민기의 역투, 2군에서 올라온 성낙기의 놀라운 퍼포먼스로 단숨에 전문가들로부터 다크호스로 분류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선발투수는 진용이 다 갖춰진 모습, 다만 불펜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조금 아쉽다면 타자 쪽이 시원찮은데 이중호가 어린 나이에도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KBO 금방 씹어 먹고 mlb 진출하게 생겼어요. 그죠?”
-허… mlb가 그리 쉬운 곳으로 보이니? KBO도 그렇지 네 공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쳐낼 선수들은 분명히 나오게 되어 있어. 어제 김상진이라는 타자에게 너 홈런 맞았잖아. 안타도 6안타나 내줬지.
개막전 후 첫 휴식.
성낙기는 원룸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실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산래빗스를 상대해 보니 2군에서와 마찬가지로 타자들이 자신의 공을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거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풀어놓는 중이다.
“어쨌든 이겼잖아요. 그럼 됐지. 지금 최대 구속이 138km인데 앞으로 구속이 더 오르면 보나마나 아니겠어요?”
-138km로는 아직 멀었다. 난 한창 때 165km를 던졌는데도 주의하지 않으면 신들린 듯이 홈런을 쳐낸 타자들도 있었지.
“혹시, 베리본즈?”
-걔는 약물이니 제쳐두고 짐 토미라고 유독 내 공을 잘 쳤지. 마치 내 공에 특화된 선수처럼 말이지. 위기 상황에선 볼넷을 줄 수밖에 없는 선수였어. 그러니까 너도 자만하지 말라는 얘기야. 그리고 있지, 지금까지 내가 쭉 패턴을 봐왔는데 앞으론 스탯이 잘 오르지 않을 거야. 할수록 어려운 게 야구이듯이 속구가 빨라질수록 발전이 더디다는 거지.
“괜찮아요. 이제까지도 잘해왔으니까요.”
-그려, 속 편해서 좋겠다.
“라면 국물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싶네. 한 병 사다 먹을까?”
-애가 몸 망가뜨리려고 작정을 하네. 겨울 내내 훈련한 거 다 헛방 된다. 프로는 몸 관리가 기본이야. 우리가 괜히 전설이 된 줄 알아? 시즌 중엔 술은 입에도 안댔어.
성낙기는 라면을 먹고 스크린 야구 연습장으로 갔다. 행크아론의 타격이 몸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배트를 휘둘러보지 못했다.
타석에 서자 투수의 와인드업이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성낙기의 타격 폼이 수정되었다.
정말 행크아론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엉거주춤한 폼이 만들어졌다.
누가 봐도 초짜 티가 나는 그런 타격 폼이다.
성낙기는 몇 년 쉬기는 했지만 타격의 초짜가 아니다. 중, 고등학교 내내 에이스급 투수로 활약하며 중심 타자를 맡았던 선수였다.
타격에 눈을 떴던 고등학교 2학년 땐 황금사자기 대회 고타율로 이영민 타격상을 받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로 타격에도 남다른 기재가 있다.
거기에서 얻은 성낙기의 안정감 있고 FM적인 타격 폼은 온데간데없고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타격 폼이 만들어지자 성낙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놀라는 사이, 공이 날아왔다.
따악-
우익수 키를 넘어가는 2루타 성 안타다.
이어 따악, 소리가 날 때마다 외야로 공이 날아갔다. 어떻게 치는 공마다 거의 안타다.
아무리 스크린 야구라고는 하지만 행크아론이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땐, 절반쯤의 안타가 고작, 2루타 성 타구도 몇 개 없었다.
-이건 완전히 사기네. 투수 능력도 모자라 타격까지? mlb를 겨냥한 시스템이라고 쳐도 너무한데?
-내 말이… 나도 타격을 곧잘 했지만 행크아론은 차원이 달라. 별로 노력도 안하는 애한테 이렇게 퍼줘도 되는 거야?
“내가 무슨 노력을 안 해요? 날마다 500구 이상 던지게 한 게 누군데… 팔이 빠지는 줄 알았구먼.”
-겨우 그거 던지고 너처럼 발전한 투수는 없다. 이 배 아픈 새끼야.
행크아론의 타격이 들어온 후 실바와 존의 배 아픈 증상이 부쩍 심해졌다.
그러게 누가 술 마시고 일찍 죽으랬나.
다승왕 타이틀이라도 따내면 술로 한 번, 배 아픔으로 한 번, 두 번 죽을 태세다.
성낙기는 스크린 야구장에서 몸을 풀며 행크아론의 타격을 마음껏 즐겼다.
***
“오빠? 나 서희야.”
타격을 하고 원룸으로 돌아오는 중에 걸려온 전화.
“응, 너 웬일이냐.”
“웬일은, 하나뿐인 여동생이 전화하는데 고작 하는 말이 그게 뭐야.”
“나 지금 무지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피, 오빠 오늘 쉬는 날 아니야? 하연이랑 놀러 가면 안 돼?”
“어디… 여기 원룸에? 애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이 참, 하연이가 오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대. 괜찮을까? 바쁘면 말고.”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까 시간이 되네.”
성낙기는 전화를 끊은 뒤에 원룸 청소를 시작했다. 어질러진 빨래는 세탁기 안에 처박아 버리고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를 말끔하게 한 뒤, 수건에 물을 묻혀 먼지가 내려앉은 책상과 문틀과 화장실 청소까지 정신없이 했고, 겨우 한숨을 돌릴 때 딩동, 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