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031화 벤치클리어링 5
경기 다음 날 삼호 그룹의 회장실에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나쁘지 않다.
야구광인 두 사람은 개막전부터 빠짐없이 경기를 시청했다.
회장실 옆방에 따로 대형 TV와 아늑한 소파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다. 물론 방음장치까지 되어 있어서 소리를 질러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부녀는 얼굴이 많이 알려진 탓에 경기장에 가는 대신 응원방을 따로 만든 것이다.
“이번 3차전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강력한 선발과 불펜의 조합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공성진 정말 잘 데려왔고 실력이야 알고 있었는데 성낙기는 뭐냐? 2군에서 던지던 것보다 더 잘 던질 줄이야.”
“저도 늘 놀라요. 2군에서 잘 던지길래 쫌 던지나보다 했는데 시즌 막바지부터 엄청난 구위를 보이더니 1군에 와서도 타자들을 마음대로 다루고 있어요. 제가 데려온 투수는 아닌데 정말 낮도깨비 같은 투수예요.”
“그러게 말이다. 앞으로가 더 궁금해지는군. 어쨌든 우리 삼호도 이제 강력한 마무리를 하나 얻은 셈이니 남부럽지 않다. 허허.”
“약속대로 제주콘도 주실 거죠?”
“암, 난 북부 리그 2위를 말했는데 2군 전체 2위를 했으니 당연하지. 흠… 1군에선 어디까지 끌어올릴 생각이냐?”
“일단 가을 야구를 해야겠죠. 리빌딩이 2년은 갈 거 같아요. 3년 후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올해는 플레이오프면 만족할게요.”
“그래? 난 기왕이면 한국 시리즈 진출을 바라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지?”
“외인들이 좋고 공성진에 구문철, 성낙기가 있어서 투수는 대충 갖춰진 모양새인데 타력이 좀 약해요. 외인 타자 한 명과 이정우, 이중호가 잘해준다 해도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는 느낌이에요. 노장은 다 정리해 버렸고 백업이었던 선수들이 클 시간이 필요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리더의 역할이야. 타선이 문제라면 전력 보강을 해봐. 얼마든지 밀어줄 테니까.”
김현중 회장은 여전히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조급증 때문에 거액을 FA에 투자하고도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야구는 스타 몇 명으로 강팀이 되는 스포츠가 아니다.
공격력을 극대화했더라도 수비나 주루, 그리고 투수력 등에 구멍이 생기면 강팀이 될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을 야구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FA선수들은 나이 들어 방출됐고 2군 유망주와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을 주력으로 삼은 삼호슈퍼스타즈의 전력으로 한국 시리즈는 언감생심, 꿈을 꿀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김현중 회장의 조급증은 늘 단장과 코칭스태프에게 부담이 됐고 성적에 급급한 나머지 될 성 부른 싹을 전혀 키우지 못한 것이 현재 삼호슈퍼스타즈의 모습이다.
김아경의 리빌딩 작업에 동조하면서도 성적은 내기를 바라는 다분히 이율배반적인 김현중 회장의 마음을, 김아경은 이해는 하면서도 전임 단장이나 감독들처럼 끌려다닐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보면 또 즉시 전력감만 경기에 출전시키게 되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김아경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김아경이 아버지와 다른 점이었고 그녀는 회장의 입김이 현장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힘이 있었다.
아무리 야구광이라지만, 야구는 하나 있는 딸에 비하면 한참 아래였다. 그걸 잘 아는 김아경은 그러므로,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게 단칼에 자를 수도 있는 것.
그날의 첫 세이브로 성낙기는 전국구가 되어버렸다.
진정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떠나 미래의 국가 대표 마무리가 등장했다며 기뻐했을 정도로 성낙기가 준 임팩트는 넓고 깊었다.
“성낙기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어떤 상황에서도 쫄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1군 타자들을 상대로 만루에서 말이지.”
“후후, 저도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저런 놈이 우리 구단에 들어왔는지 말입니다. 그때 감독님이 받아주지 않았으면 야구 판에서 떠날 신세였잖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감독님 선수 보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하아, 아니야. 이 코치가 쓸 만하다고 했잖나. 불펜이 전혀 버텨주지 못하니 컨디션이 올라올 때까지라도 성낙기에게 마무리를 맡겨야겠어.”
김현중 회장처럼 성낙기의 투구를 보고 고무된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코치의 대화였다.
그들은 어느새 성낙기를 마무리로 낙점하는 분위기였다.
외인 투수 둘에다 공성진과 지난 시즌 12승을 거둔 김도진과 안민기 이세환도 있으니 선발은 어느 팀 부럽지 않다.
이게 다 든든한 외인을 데려온 효과다.
다만, 불펜은 현재까지 구문철이 잘 던지고 있고 성낙기가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필승조 두어 명은 더 있어야 한 시즌을 치를 수 있다.
또한, 불펜도 불펜이지만 타선은 더 심각했다.
1번-이정우-유격수
2번-이한영-3루수-백업 안학규
3번-앤서니 페킨스
4번-김현웅-1루수
5번-이중호-우익수
6번-오진추-지명타자
7번-안오순-2루수-백업 김석문
8번-강길만-포수-백업 이두열
9번-한상필-좌익수-백업 최일현
대타-김유혁.
앤서니 페킨스는 한국 생활에만 적응하면 염려할 게 없고, 이정우, 이중호는 1군 투수들의 공에도 어느 정도 적응할 것 같고, 김현웅도 펀치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맞지만 나머지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이정우와 이중호가 꾸준히 잘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지명타자로 나오는 오진추가 지난 시즌 0.275에 머무니 말 다했다.
다른 팀들의 지명타자들은 3할에 20홈런은 기본인데 14홈런을 기록했을 뿐이다. 나머지 타자들은 대부분 똑딱이에다 발도 그리 빠르지 않고 2할 대 중반의 타율이 고작이다.
그나마 겨우내 박종태 타격 코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 그렇다 하더라도 곳곳에 구멍이 있어서 상위 타선과 하위 타선의 연결이 안 되는 게 문제다.
어쨌든 시즌 초반이니 성급한 결정은 금물,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두고 보면서 옥석을 가려내야만 한다.
***
“저 오늘 선발이죠?”
“아니? 필 서든이야.”
“필 서든요? 그럼 저는 언제 던집니까?”
“너? 넌 이제 우리 팀 마무리해야지. 당분간 네가 뒷문을 지켜야겠다.”
“뒷문도 지키고 앞문도 지키겠습니다.”
“선발로 나간다고? 아서라, 제 아무리 좋은 선수도 루틴이 흐트러지면 무너지는 거 순간이야. 잔말 말고 세이브 올릴 생각이나 해.”
경기 전 성낙기와 이계현 코치의 대화.
어제 이미 선발을 공표했는데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딴소리를 하는 성낙기다.
워낙 예측 불가라서 이계현 투수 코치도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오늘 삼호슈퍼스타즈의 상대는 화산래빗스.
지난 시즌을 7위로 마무리했지만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을 야구를 하겠다는 단장의 발표가 있은 이후, 비싼 외국인 투수와 타자를 영입했고 나름 거물급인 FA를 둘이나 계약했다.
올해 부쩍 높아진 전력으로 시즌 전 많은 전문가들이 다크호스로 지목할 정도로 투타의 짜임새도 좋아졌다.
삼호슈퍼스타즈의 오늘 선발은 필 서든.
26세의 젊은 나이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데려온 투수다.
KBO 타자들이 대체적으로 강속구에 약하다는 걸 감안한 영입이기도 했다.
투피치 투수라도 150km대의 강속구와 제구력 잡힌 슬라이더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계산인데 스프링 캠프에서 땀을 쏟았던 커브만 실전용으로 자리 잡는다면 금상첨화다.
1회 초 마운드에 올라간 필 서든은 강속구 투수답게 150km대 초 중반을 넘나드는 포심패스트볼로 화산래빗스 타자들을 윽박질렀다.
포수 강길만은 몸 쪽 깊은 직구를 유도했고 타자들이 공포감을 가질 만하면 바깥쪽을 공략해 카운트를 잡아나갔다.
그 결과 1회는 삼진 두 개와 내야 땅볼. 우려했던 제구력의 약점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고 필 서든 역시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오… 던지는 걸 보니까. 어쩌면 마크 트웰보다 나을 수도 있겠는데?”
“공이 존나 빨라.”
“공이 쫙쫙 뻗는 게 속이 다 시원하다.”
“간만에 좋은 투수 들어왔네. 나이도 어려서 몇 년은 걱정 없겠어.”
“스카우트가 바뀌었다더니 일 잘하네.”
“김현중 회장 딸이야. 걔가 선수 영입은 도맡아서 한다는 소문이 있어. 야구광이야.”
관중석의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은 필 서든의 투구를 보고 만족해했다.
요 근래에 만족할 만한 외국인 투수가 없었는데 기껏 비싼 돈 들여 영입해도 KBO의 기다림 야구의 참맛을 보고는 스스로 무너지기 일쑤였다.
지난 시즌 외국인 투수의 성적은 10승과 9승에 머물렀는데 방어율은 나란히 4점대 후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타자들의 성향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찌증을 내는 등, 볼썽사나운 모습만 보이다가 퇴출당했다.
이번에 영입한 두 투수는 인성이 괜찮고 마운드 위에서의 운영 능력이 수준급이다.
김아경과 전력분석 팀이 각 투수들의 동영상을 비교해 보며 기본적인 야구 능력은 물론 손짓 하나, 발짓 하나까지 연구해가며 낙점한 투수들이다.
필 서든은 4회에 볼넷과 도루에 이은 안타를 맞고 1실점했고 6회에도 같은 패턴으로 추가 실점을 했지만 7회까지 화산래빗스 타선을 잘 막아내고 6:2로 리드한 채 마운드 내려왔다. 8회 역시 구문철이 슬라이더 커브 등의 변화구로 삼자범퇴 처리, 승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일은 8회 말에 터졌다.
그동안 필 서든의 몸 쪽 강속구에 심기가 불편해 있던 화산래빗스의 불펜 투수 이원삼이 삼호슈퍼스타즈의 지명타자 오진추에게 빈볼을 던진 것.
이미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화산래빗스 감독 김영춘이 내린 지시였다.
오진추는 몸 쪽으로 깊이 들어오는 볼은 가까스로 피해내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이 야유를 보냈고 오진추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헬멧을 쓰고 배터 박스에 섰다. 상대 투수 이원삼을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타자는 투수가 일부러 자신은 노린 것인지 아니면 손이 빠졌는지를 안다.
빈볼일 경우 타깃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타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투수의 눈동자가 보이지는 않겠지만 타석에 선 선수는 그걸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아챈다. 오진추의 느낌은 분명한 빈볼.
사실, 삼호슈퍼스타즈와 화산래빗스는 감정이 좋은 편이 아니다.
작년 시즌 내내 5강에 들기 위해 총력으로 맞붙었지만 8승 8패의 호각이었다. 두 팀 모두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밟고 가야 그나마 성적이 나오는데 서로가 서로의 뒤를 잡아당기는 형국이었다.
특히 화산래빗스는 유독 자신들과의 경기에서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삼호슈퍼스타즈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배경엔 삼호의 서진 감독과 화산의 김영춘 감독의 경쟁도 한몫을 했는데 선수 시절, 서진 감독이 슬라이딩으로 2루를 훔치면서 2루를 맡고 있던 김영춘 감독의 정강이를 부러뜨린 이후, 두 사람은 앙숙으로 변했다.
그 일로 인해 김영춘 감독은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쓸쓸하게 은퇴의 길을 걸었다.
그런 마당에 서진이 감독이 되어서도 자신을 물고 늘어지니 악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다. 서진 감독이 물러났지만 삼호슈퍼스타즈에 대한 감정은 여전했다.
지난 시즌 벤치크리어링만 다섯 차례를 기록하는 동안 서진 감독도 그렇지만 삼호슈퍼스타즈라는 팀 자체에도 감정이 쌓일 대로 쌓인 상황.
오늘의 빈볼은 이번 시즌을 위한 선수들의 사기 진작 차원도 있다.
맥없이 물러나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도 없다.
시즌 전체를 생각할 때 어차피 진 게임, 여기서 뭔가를 해야 할 때라고 판단한 김영춘 감독은 연이어 빈볼을 지시했고 눈치를 채고 타석에서 조금 빠져 있던 오진추도 이번엔 빈볼을 피하지 못했다.
“으헉!”
빈볼이 등을 강타했고 오진추는 헬멧을 벗어던지고 마운드로 달려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화산래빗스 선수들이 달려 나왔고 삼호슈퍼스타즈의 이한영, 김현웅 등은 오진추가 빈볼을 맞자마자 달려 나와 1루 파울라인을 넘고 있었다. 성낙기와 이중호, 구문철도 뒤질세라 잽싸게 달려갔다.
“이런 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