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29화 (29/188)

# 29

029화 벤치클리어링 3

이름값이라도 하는 듯 공성진은 중외울프스 타자들을 삼진 둘과 내야 땅볼로 솎아내고 가볍게 1회 초를 끝냈다.

2연패를 할 동안 안방을 지켰던 강길만을 대신해 나온 이두열은 손바닥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2군에서 공이 빠르다는 선수들의 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볼 끝이 생생했다.

이두열은 글러브라도 마주치려고 종종걸음으로 공성진을 따라갔지만 공성진은 모르는 척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머쓱해진 이두열이 마스크와 장갑을 벗고 더그아웃에 앉을 때 성낙기가 다가왔다.

“공 좋아?”

“응, 죽여. 저렇게 빠른 공은 처음 받아봤어.”

“그래? 비싼 값을 하긴 하네. 고생해라.”

성낙기는 실없는 소리를 하고는 어느새 이중호에게 다가가서 타격 자세를 취해 보였다.

중외울프스와의 2연전 동안 9타수 1안타의 빈타에 허덕이는 이중호에게 한 수 가르치는 듯한 모션. 이두열이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두열의 그런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중호야, 내 폼 좀 봐봐. 너 말이지, 어깨가 너무 일찍 열리고 있어. 큰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선구안을 좁게 가져가 봐. 너 그러다 2군으로 쫓겨난다.”

“이런 엠병할… 넌 투순데 타자를 가르치냐?”

“시끄러. 가르쳐 주면 가르쳐 주는 대로 해. 형한테 개기지 말고. 그러다 한 대 맞는다.”

“헐… 니가 타자 해봐라. 아마 1할도 안 될 걸?”

“그래? 인정하지. 근데 까먹지 말고 형 말대로 해. 욕심 부리지 말란 말이야.”

-어깨가 너무 일찍 열리고 있어. 의욕이 앞서서 기본을 놓치면 안 되지.

사실, 이중호에게 한 성낙기의 말은 타격에도 일가견이 있는 실바의 조언을 토대로 한 것이었는데 이중호가 그걸 알 리 없다. 성낙기는 이중호에게 한 수 가르치고는 구문철에게 갔다.

“문철아, 있잖아. 오늘도 1회만 잘 막으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 너와 내가 필승조로 활약하자.”

“갑자기 무슨 소리……? 넌 불펜이 아니고 선발투수잖아.”

“너만 알고 있어. 감독님 허락이 떨어졌어. 마지막은 내가 막을 거야.”

“…….”

그러고는 다시 허봉호 감독에게로 갔다.

“저어, 감독님. 오늘 제가 필요하시면 마무리로 나가겠습니다.”

“네가? 필요 없어.”

허봉호 감독이 느닷없는 성낙기의 말에 뜨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선발로 자리를 잡은 놈이 갑자기 클로저를 하겠다고 나서다니.

“아니 근데 이 새끼가 1군을 뭘로 보고 지가 마무리를 하겠다는 거야. 그냥 확!”

“요즘 제 심신(心身)이 워낙 최고조로…….”

“주둥이 안 닫을래?”

그러는 동안, 1번 이정우가 내야 안타를 치고 나갔다. 2연패를 하는 동안 이정우도 2안타만을 때렸던 참이었다.

2번 타자 이한영의 타석 때 이정우는 2루로 진출했고, 3번 타자 오진추의 아웃 뒤에 4번 타자 김현웅이 타석에 섰다.

타율은 2.69에 불과했으나 작년 20홈런을 넘긴 타자였다. 상대 투수는 5번 타자 이중호와 상대하기 위해 최대한 어렵게 승부했다.

그만큼 2군에서 올라와 9타수 1안타를 기록한 이중호를 쉽게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몇 번의 볼질에 김현웅이 딸려오지 않자 마지막 공은 포수가 일어서서 받았다.

볼넷.

그리고 이중호가 타석에 섰다. 타석에 서자마자 귓속에서 윙윙거리는 말.

‘2군으로 쫓겨난다.’

성낙기가 타격 폼을 보이며 했던 말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 말만 남아서 이중호를 괴롭혔다. 상대 투수의 공을 기다리며 성낙기의 말을 되새기고 있자니 괜히 열이 뻗치는 이중호.

아니, 할 말이 있고 안할 말이 따로 있지 이제 갓 1군으로 와서 안타 하나 친 선수에게 할 소린가 그게?

‘저건, 친구도 아냐.’

이전 타석들은 투수의 구종과 타이밍 등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이번 타석에서는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지고 위기감만 잔뜩 몰려왔다.

오늘도 안타를 못 치면 정말 강등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잡놈의 새끼. 투수가 타자에게 타격을 가르쳐?’

가만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런 이중호에게 투수의 와인드업 동작이 눈에 들어왔고 공이 날아왔다. 이중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휘잉.

허공을 가르는 배트 소리. 초구 슬라이더에 당했다.

스트라이크를 먹은 이중호는 타석에서 한 발을 빼고 배트를 붕붕 휘두르며 더그아웃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손가락으로 사각을 그리고 있는 성낙기가 보였다.

이중호는 숨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몇 번 그러고 나니 머리에서 열기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투수의 와인드업과 함께 제 2구가 날아왔다.

이번 공 역시 오다가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이중호가 가까스로 참아냈다.

다음 공은 포심패스트볼을 커트하여 원 볼 투 스트라이크.

투수가 연달아 커브와 슬라이더로 이중호를 유인했지만 속지 않았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열기가 가시고 나니 평소보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성낙기가 사각을 그린 것은 분명 선구안을 좁게 가져가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 제스처가 통한 듯 연속으로 유인구를 골라내다 보니 공이 조금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따악.

그리고 이중호는 아웃코스로 파고드는 포심패스트볼을 결대로 밀어 쳤다. 이중호가 친 공은 우익수 키를 넘기고 펜스 앞까지 굴러갔다.

그사이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왔고 이중호는 2루에 안착한 후 더그아웃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2타점 적시타.

“이중호, 나이스!”

“야아! 드디어 한 건 하네. 내 저럴 줄 알았어.”

“굿.”

“가볍게 쳤는데 2루타야.”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이중호를 향해 손을 내뻗어 엄지를 추어올렸다.

2군에서 올라온 선수를 곧장 5번에 배치한 타순에 의아함을 느꼈던 기존 1군 선수들도 가볍게 밀어치는 이중호의 타격을 보고는 허봉호 감독이 중용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중호 다음 타자로 나온 안오순은 1루 땅볼 아웃을 당했지만 삼호슈퍼스타즈는 1회말 2득점의 리드를 안고 여유 있게 출발했다.

-오늘은 이기겠네. 투수가 공성진이니까.

-공성진이 잘 던지면 뭐해, 어차피 불펜에서 불지를 텐데.

-공성진 완투 가자. 그것도 못하면 돈 게워 내야지.

-됐어. 이제 연승 가는 거다. 오늘도 지면 접시 물에 코 박고 뒈져야지.

공성진은 팬들의 기대대로 5회까지 볼넷 둘에 3안타 무실점으로 버티고 있었다.

다만, 93개의 투구 수는 다소 많다.

중외울프스 타자들이 끈질기게 볼을 커트해 냈고 선구안을 좁게 가져간 결과가 투구 수로 나타난 것.

공성진처럼 치기 힘든 볼을 던지는 투수에게 맞는 전략을 짰고 그 결과 일찍 끌어내리기 위한 조건이 만들어졌다.

공성진이 책임 질 수 있는 이닝이 7회 안팎으로 제한된 상황에서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코치는 머리가 아파왔다.

그들은 내심 완투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개막 3연전을 스윕하려는 중외울프스의 의지가 만만치 않다.

삼호슈퍼스타즈 정도는 이기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으므로 총력을 다 하는 면도 있다.

그러니까, 승점 자판기에서 최대한 승점을 올리고 나서 다른 팀과 붙는 전략이다.

언제부턴가 1군의 각 팀들은 삼호슈퍼스타즈를 만나면 기본적으로 2승 이상을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혀 있었다.

3연전에서 1승 2패는 치욕적이고 2승은 본전, 3연승으로 셧아웃 시켜야만 하는 상대로 판단하고 있다.

공성진은 6회에도 꿋꿋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공을 던졌다. 유격수 땅볼로 원 아웃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6회는 가볍게 막고 7회까지는 무난히 던져줄 걸로 사람들은 믿었다.

따악.

중외울프스 2번 타자 서용욱이 친 평범한 2루 땅볼을 2루수 안오순이 뒤로 흘렸다.

공성진은 의외의 상황에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 영향은 곧바로 다음 타자를 상대하면서 드러났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강속구로 빠른 승부로 간 것.

7회까지는 던져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과 도루 저지까지를 염두에 둔 승부였지만,

따악.

3번 지명타자로 나온 한선주는 그리 만만한 타자가 아니었다. 2할 8, 9푼은 늘 치는 타자인데다 빠른 볼에 강점이 있는 타자다.

그렇다 해도 투구 수가 70구 정도를 넘기지 않았다면 충분한 승부구였겠지만 어느덧 100구에 다다른 공성진의 공은 끝이 무뎌져 있었다.

한선주가 친 공은 1루수 키를 넘기고 우익 선상에 맞은 뒤 펜스까지 굴러갔다.

그사이, 서용욱은 빠른 스타트를 끊어 홈으로 들어왔고 홈 승부가 늦었다고 판단한 이중호는 2루로 공을 던져 발이 느린 한선주를 간발의 차이로 잡아냈다.

2실점을 하긴 했지만 이중호의 강견으로 타자를 아웃시켜 투아웃.

공성진은 다음 타자를 1구만에 1루 땅볼로 잡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2:1의 살얼음 리드.

상대 선발은 5회를 마치고 내려갔고 중외울프스는 일찌감치 불펜을 가동하고 있었다.

삼호슈퍼스타즈 타자들은 1이닝씩 끊어 던지는 불펜 투수들의 공을 공략하지 못한 채, 다시 7회 말 수비에서 공성진은 혼신의 역투로 딱 120구를 채운 뒤 마운드를 내려갔고 마지막 한 타자를 구문철이 잡아내고 7회를 마쳤다.

8회에도 구문철이 마운드에 오르자 성낙기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슬슬 일어나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이미 모창모와 진중결이 몸을 풀고 있어서 직접 던지지는 못하고 저 혼자 구석 자리에서 수건 하나를 들고 쉐도우피칭을 시작했다.

“이 코치가 시켰어?”

“뭘 말씀입니까?”

“저거 말이야. 저거.”

허봉호 감독은 성낙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이계현 코치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린 이 코치의 눈에 혼자 쉐도우피칭을 하다가 발을 구르더니 철망에 손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성낙기가 들어왔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휴~ 병이 도진 것 같습니다. 오라고 할까요?”

“냅 둬. 어차피 맛이…….”

허봉호 감독은 이어지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저건 꼭 무언가 조짐이 안 좋으면 저렇게 나대는 증상이 있다.

이건 마치 머리에 꽃을 꽂은 애들이 비가 오려고 하면 더 미쳐 날뛰는 것과 흡사하다. 그럴 때 말리면 더 심해지니까 그냥 둬서 제 풀에 지치게 하는 것이 답이다.

-아니, 근데 쟤는 왜 감독한테 또라이 취급을 받지? 평소에 행실을 똑바로 해야 오해가 안 쌓이지.

-이거 다 니가 가르친 거잖아. 저렇게 알짱대는 거.

-그건 당연히 해야지. 이젠 감독도 성낙기 중요성을 안단 말이야. 그럼 그에 맞게 동작 하나를 하더라도 무게 있게 해야 저런 취급을 안 받지. 진심을 다해서 하는 척을 해야 하는데 쟤는 너무 연기력이 없어.

-이미 늦었어. 자꾸 저러다 보니 이젠 루틴이 되어 버렸어.

실바와 존이 구시렁거릴 때 구문철이 8회를 무사히 막아내고 내려왔다. 2군에서의 철벽을 1군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삼호슈퍼스타즈는 9회초를 삼자범퇴 당하고 드디어 마무리 진중결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어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입을 꼭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마운드에 선 진중결의 모습에서는 어떤 결기마저 느껴졌는데… 그런 포스와는 다르게 공은 중앙으로 치기 좋게 제구가 형성되고 있었다.

따악.

따악.

연속 2안타를 맞은 진중결은 연신 손으로 땀을 훔쳤다.

노아웃 1, 2루 위기에 맞은 타자는 4번 김광우.

3회에 공성진으로부터 안타도 뺏어낼 만큼 컨디션도 좋다. 중외울프스 더그아웃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연 이틀의 불펜 붕괴가 재현될 거라는 믿음이 그들의 웃음에 묻어 있다. 1루 쪽 관중석 역시 신이 났는지 어느 때보다 응원의 함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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