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026화 베이스볼 시리즈 4
[체력이 73입니다.]
“으크크. 드디어 풀로 찼네. 좋아.”
성낙기는 눈앞에 떠오른 글귀를 보면서 이제 오늘로 결승을 가는구나, 생각했다.
결승의 상대 경찰청은 남부 리그 2위 팀 세화스쿼럴스를 셧아웃 시키고 결승에 선착해 있었다. 기본 전력이 막강한 데다 지금 경기를 치르는 두 팀의 승자보다 하루 더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다.
상무피닉스나 삼호슈퍼스타즈는 오늘 지면 내일도 없으므로 총력전이 불가피하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성낙기의 선발 등판도 그랬다.
아니, 1차전에 던져서 완투한 투수를 3차전에 또 올리다니.
이런 80년대 식 야구가 어디 있는가.
저렇게 굴리다가 혹사를 당해 팔에 칼을 댄 선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성적이 좋기로서니 2군에서 우승해 봐야 얼마나 큰 명예를 얻겠다고 어린 투수 하나를 아작 낸단 말인가.
이게 성낙기의 선발 등판을 바라보는 야구인들과 팬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김아경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단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아, 네, 팀장님. 저 경기장에 나와 있습니다.”
“경기장에 나가 계시면서 성낙기 선수 선발 그대로 두고 보세요? 1차전에 던졌잖아요.”
“그게 저… 선수 본인이 괜찮다고 자꾸 던지겠다고 한답니다. 그래서…….”
“선수가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면 감독이 필요가 없죠. 제가 될 수 있으면 서포트만 하고 현장에 간섭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건 누가 봐도 심하잖아요. 2군 베이스볼 시리즈 우승 안 해도 상관없어요. 목표는 이미 달성했으니 성낙기 선수 내리라고 하세요.”
“아, 아가씨. 이게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선수 기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기도 하고… 또 이미 선발이 정해진 마당에…….”
“정말 이러실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물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
전화를 끊은 마영진 단장은 얼굴에 스팀이 올랐고 김아경은 김아경대로 씩씩거렸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2군 선수 누구도 성적을 위해 희생하면 안 되었다.
상무피닉스와 대등하게 싸운 전력 그대로 1군으로 모셔가서 거기에서 성적을 위한 포텐을 터뜨려야 한다.
2군에서 아무리 잘해봐야 알아주지도 않고 KBO 역사에 남지도 않는다.
1군을 위한 2군의 성장, 그거면 되는 거였다. 북부 리그 2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과정에서 선수들은 스스로 성장했고 내년엔 1군 주전으로 뛸 만한 선수가 여럿이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이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틀 쉬고 던지겠다고? 니 팔이 고무 팔이냐?’
‘감독님, 수술 후 팔이 비약적으로 좋아졌습니다. 체력 회복도 빠르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야, 성낙기. 난 말이지, 야구를 삼십 년이나 한 사람이다. 어디서 약을 팔아.’
‘그럼, 3회까지만 던져볼게요. 구위가 좋지 않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시끄럽고. 니 방으로 돌아가.’
1차전 끝나고 모텔에서 성낙기가 허봉호 감독을 찾아가 나눈 대화였다.
3차전은 안민기의 차례였는데 무더운 여름부터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베이스볼 시리즈에 들어와서도 회복되는 기미가 없다.
스피드는 그런대로 나오는데 종속이 떨어져 공에 힘이 실리지 않는 상태. 허봉호 감독은 이계현 코치와 상의한 뒤 성낙기의 선발 오더를 짰다.
‘저놈 3회까지만 지켜보고 구위가 떨어지면 바로 교체하는 걸로 하지고.’
죽을 고생을 해서 2위까지 치고 올라왔는데 맥없이 물러나기는 억울한 허봉호 감독이다.
그가 성낙기의 선발을 허락한 이유는 지금까지 보여준 성낙기의 도깨비 같은 모습 때문이 컸다.
상식을 초월하는 초강속구(성낙기의 평소 구위로 봐서는)를 던지질 않나. 130km대의 공으로 라이징패스트볼과 정체를 알기 힘든 흔들리는 공을 던지기도 한다.
성낙기의 투구가 아니었으면 북부 리그 2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공헌도가 컸다.
그런 선수의 말이니,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었다. 상상 이상을 보여주는 투수, 그게 허봉호 감독이 생각하는 성낙기였다.
성낙기는 1회 말 쇼핑이라도 하는 듯 경기장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뒷짐을 지고 마운드에 올랐다. 언젠가부터 성낙기의 공은 130km대의 평범한 공을 던져도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어졌다. 투구 폼이 이중키킹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와인드업을 하고 왼발을 내디딜 즈음에 발을 올렸다가 다시 한 번 내딛는 동작이어서 타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반 템포 정도 오래 공을 가지고 있었고, 일단 뿌려진 공은 스피드건에 나타나는 스피드보다 빠르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도루를 허용할 만한 폼도 아니다. 말이 와인드업이지 사실은 실바처럼 셋 포지션 동작에 가깝기 때문.
성낙기는 상무피닉스의 타자들을 가볍게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상무피닉스는 3선발 김대위가 던지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1선발 민영준의 불펜 투입을 생각할 만큼 총력전이었다.
성낙기는 겨우 이틀을 쉰 투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유 있게, 그리고 강하게 공을 던졌다.
성낙기와 허봉호 감독이 말했던 3회까지 투구 수는 29개로 짠물 투구.
마음먹고 올라가서 던지는 투수를 겨우 29개로 내리기에는 아쉽다.
다만 문제는 김아경의 압력이다. 하지만 허봉호 감독은 개의치 않았다.
‘지가 회장 딸이면 딸이지, 감히 어디서 수작질이야. 확 그냥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엉덩짝을 때려 버릴라.’
허봉호 감독은 성낙기를 내리지 않았고, 성낙기는 호투를 이어갔다. 마침, 삼호슈퍼스타즈 타선이 터져 4회 2득점, 6회에 1득점을 추가했다.
성낙기는 꿋꿋이 투구를 이어가 8회 말까지 83구로 7탈삼진에 안타는 2개만을 허용했다. 완봉을 눈앞에 두고 허봉호 감독이 성낙기를 불렀다.
“그 정도면 됐어. 설마 완봉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지금까지 던졌는데 10구정도 더 던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깨끗하게 처리하고 내려오겠습니다.”
“끄응.”
성낙기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완봉으로 매조지 했다.
3:0 삼호슈퍼스타즈 승리.
야구단 창단 이래로 결승에 오른 건 처음 있는 경사였다. 아나운서와 해설자, 관중들은 물론이고 포털 사이트마다 삼호슈퍼스타즈의 승리를 앞다퉈 실었다.
아무리 2군이라 해도 꼴찌 후보였던 팀의 2위로의 비상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슈퍼스타들 일을 내다>
<성낙기의 완벽한 투구,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누구인가?>
완벽한 승리 앞에서는 김아경도 할 말이 없었다.
성낙기의 기용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던 김현중 회장조차도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축하 전화를 받고 기분이 들떠 있다.
좀 있다가는 자신이 직접 전화를 돌리더니 오늘 같은 날은 한잔 마셔야겠다며 회장실에서 나가 버렸다. 나가면서 한마디는 잊지 않았다.
“딸아, 시즌 끝나고 선수단 자리 좀 마련해 봐.”
***
“성낙기가 너무 많이 던졌어. 전문가라는 놈들이 난리지?”
“뭐… 약간의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그 사람들이야 원래 그렇지 않겠습니까.”
“3일 후면 베이스볼시리즌데 1선발로 누가 좋겠어?”
“안민기 컨디션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래… 이세환 아니면 안민기겠지. 그런데 말이야, 성낙기 외에는 아무도 경찰청 타선을 막을 수 없어. 걔네들 팀 타율이 거의 3할인데 견뎌 나겠어?”
“애초에 2군이 아니잖습니까. 적어도 1.5군은 되는 팀이죠.”
이계현 투수 코치의 말처럼 경찰청은 2군 팀이 아니다. 승률이 7할에 근접하는 넘사벽 팀이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이중호 같은 유망주와 성낙기의 원맨쇼 덕분이다. 하나, 혹사 논란이 불거진 성낙기를 계속 올릴 수는 없다.
“저 1차전에 또 나가도 됩니다.”
물론 성낙기는 나가도 된다고 했다.
선수의 승부욕이야 이해를 한다지만, 어깨는 다르다.
의지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또 올렸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상무피닉스와의 3차전에 많은 이닝을 소화한 것도 허봉호 감독의 똥고집이 아니었으면 턱도 없었을 것이다.
이계현 코치의 말대로 경찰청과의 1차전엔 안민기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들쭉날쭉하던 제구가 돌아왔고 속구 역시 145km를 찍을 정도로 컨디션도 괜찮았다.
“플레이 볼”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5판 3선 승제. 안민기는 경찰청 강타선을 맞아 4회까지 1실점으로 막다가 5회에 대거 4실점을 했다.
그럼에도 허봉호 감독은 안민기를 내리지 않았고, 안민기는 6회에 연속 볼넷을 허용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미 경기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허봉호 감독이 필승조 대신 추격조를 불펜으로 썼지만, 진종갑, 위대준, 김용찬 등이 차례로 무너졌다.
1차전은 12:0으로 경찰청의 완전한 승리.
2차전도 이세환이 6이닝 2실점으로 나름 호투했지만, 구문철, 이오수, 임병주가 사이좋게 1실점씩을 나눠가지며 5:1 경찰청 승리.
3차전은 성낙기가 7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고 불펜이 분전하면서 3:2로 승리하여 한 경기를 잡아냈다.
시리즈 전적 1:2.
4차전에 허봉호 감독은 성낙기를 제외하고 투수를 풀가동했지만, 베이스볼 시리즈 우승은 경찰청으로 넘어갔다.
선수들은 한 경기라도 건져서 영패를 면한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비록 졌지만 팬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몇몇 관중들은 경기장으로 난입하여 삼호슈퍼스타즈의 준우승 세리머니로 외야를 마구 달렸다.
보안 요원과 쫓고 쫓기는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관중들은 영화 슈퍼맨 주제곡을 부르며 즐거워했다.
어쨌거나 이로서 한 시즌이 끝이 났다.
삼호슈퍼스타즈로서는 대성공이었다. 비록 2군이지만 구단 창단 이래로 최고의 성적이었고 2군은 물론 1군에게도 하면 되는구나, 라는 자각을 심어준 2018 시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1군의 페넌트레이스에서 삼호슈터스타즈 1군은 꼴찌에서 두 번째인 8위에 머물렀다. 9, 10위는 신생팀인 KW치타스와 연진맘모스 두 팀뿐, 실질적인 꼴찌는 삼호슈퍼스타즈나 다름없었다.
퓨처스리그의 베이스볼 시리즈가 끝나고 열린 KBO 한국 시리즈에서는 모연비퍼스와 은성캣츠가 맞붙어 모연비퍼스의 4:2 승리로 끝이 났다.
두 팀 모두 서울에 적을 둔 팀으로 몇 년 전부터 서울 팀들이 우승을 돌아가면서 차지하고 있다.
거대 재벌사들이 서울 연고를 선점했고 지방 팀들은 재계 순위에서 많이 밀렸기 때문에 돈 씀씀이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
2018년 한국 시리즈를 끝으로 야구 시즌이 끝났다.
스토브리그 시작과 함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삼호슈퍼스타즈 1군의 서진 감독은 경질되었고 그가 데려온 코치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마영진 단장은 2군 코치진이 거의 그대로 1군에 올라오는 놀라운 명단을 발표했다.
감독-허봉호, 투수 코치-이계현, 타격 코치-박종태, 수비 코치-차영수, 주루 코치-조진철. 배터리 코치-최광규.
다른 건 그대로이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배터리 코치 최광규는 의외였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 기로에 섰다는 말이 들리자마자 1군 배터리 코치로 2군 포수 최광규가 스카우트되다니. 파격이었다.
다소 걱정스러운 외부의 시선과 달리 허봉호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타격이 늘 시원찮고 어깨도 강한 편이 아닌 데다 나이도 있어서 선수 경력을 이어가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 외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프레이밍이나 상대 타자에 따라 달라지는 볼 배합 능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 투수의 멘탈을 잡아주는 능력도 탁월하다. 마무리 훈련이 끝난 12월 성낙기는 집으로 돌아와 모처럼의 휴식을 취했다.
1군은 한창 FA로 시끄러웠다. 투수 둘에 타자 둘, 이른 바 빅 포로 불리는 그들의 향방이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모연비퍼스의 공성진과 세화스쿼럴스의 연준후, 거기에 더해 올해 43홈런을 기록한 천강조와 3.24의 타율에 23홈런 21도루를 기록한 이교민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내년 성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