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023화 베이스볼 시리즈 1
“모연비퍼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뒀다고? 오, 제법이군. 이름이 생소한데?”
“이번에 입단한 친구입니다.”
“그래? 속구는 얼마나 나오지?”
“그게… 평상시는 130km대인데 느닷없이 140km를 던지기도 하면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올려. 다음 추천 선수는?”
“이세환입니다. 현재 구위가 아주 좋습니다.”
“흠, 이세환이라… 구위는 쓸 만한데 제구가 어떤지 모르겠어.”
“이계현 코치가 투구 폼을 다듬어줬는데 잘 맞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타자로는 이정우, 이중호가 어떤가 싶습니다.”
“이정우는 올라올 때가 되었지. 이중호라는 애는?”
“거포입니다. 전반기 홈런이 13개. 거기에 배트질이 제법이어서 현재 타율이 3할이 넘습니다.”
“오, 좋군. 내일 당장 불러올려.”
서진 감독과 투수 코치 김경도, 타격 코치 이성훈이었다. 전반기 내내 8개 팀 중 7, 8위를 오가다가 가까스로 7위에 턱걸이를 하고 있다.
플래툰 시스템의 신봉자이며 번트를 즐기는 서진 감독은 정신무장을 가장 강조하는 감독이었고 연습만이 살 길이다, 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런 감독이기에 타선이 식었다 싶으면 야간 특타를 실시하는 일이 잦았고 제구가 잘 잡히지 않는 투수에게는 벌투도 마다하지 않는, 독재자 스타일이었다.
신인보다 베테랑의 경험을 우선시했고 2군 선수를 1군으로 불러올린 뒤, 몇 경기 내보내서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으면 벤치에 앉혀놓고 자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한 경기, 한 경기마다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전력을 쏟았기 때문에 작년에 꼴찌였던 팀이 한 단계 올라서 있었지만 주전 위주의 선수 기용으로 선수들은 지쳐 있었고 후보 선수들은 간혹 대타나 부상 선수를 땜빵 하는 정도였다.
개막전을 치르고 난 뒤 주전들이 잔부상에 시달리자, 2군에서 포수 최광규와 김석문, 그리고 강창선을 콜업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보름 만에 2군으로 다시 내려왔다.
포수 최광규는 주전 포수가 돌아오자 자동으로 내려왔고 김석문과 강창선은 서진 감독의 좌우놀이에 타격감을 잡지 못했다.
대신, 원정을 따라다니며 특타만 열나게 해댄 나머지 2군에 내려오자마자 퍼져서 제 컨디션을 찾는데 한 달 가까이나 걸렸다.
팬들의 반응도 엇갈렸는데,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서진 감독 스타일을 신봉하다시피 하는 팬들이 있는 반면,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팀 운영에 불만을 쏟아내는 팬들도 많았다.
서진 감독의 1군 콜업 소식은 허봉호 감독은 물론이고 마영진 단장, 김아경에게까지 들어갔다.
***
“1군 콜업이라고 하셨나요?”
이틀 후, 강릉 시내의 한 커피숍. 김아경과 마영진 단장이 마주 앉았다.
“네, 그게… 서진 감독이 2군에서 잘하는 애들을 보고 싶답니다.”
“잘하는 선수를 보겠다고요? 기용하는 게 아니고요?”
“원래 그 양반이 2군 기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시켜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제야 플래툰으로나 기용하는 스타일이지요.”
“그러다가 못하면 어떻게 되죠?”
“그야…….”
“다시 2군으로 내려 보내겠죠? 선수의 몸과 마음은 망가진 뒤 일 테고요. 난 그런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봄에도 그랬지만 선수를 키우는 게 아니라 죽이는 식이니까요. 다른 팀에서의 실적을 믿고 팬들의 성화에 모셔왔다지만 제가 생각하는 삼호슈퍼스타즈의 미래는 이런 식으로 완성될 리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올해는 1군과 2군을 분리 운영 하겠어요. 시즌이 끝난 후엔 다시 판을 짤 겁니다.”
마영진 단장이 듣기에 김아경의 말은 서진 감독을 시즌 후에 경질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생각보다 모질고 강단 있는 여자다. 마영진 단장은 속으로 놀라움을 삼키면서 뜨거운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
성낙기의 두 번째 선발 교류 경기는 세화스쿼럴스였다. 어느새 5승에 2홀드 ERA 2.23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성낙기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세화스쿼럴스는 강한 팀이다.
상무피닉스에 이어 남부 리그 2위를 기록 중이지만 두 팀의 게임차는 불과 3게임. 언제든지 역전이 가능한 수치인 데다가 1군에서 내려와 재활 중이었던 선수들이 컨디션 점검 차원에서 요 근래 세 명이나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이제 재활을 마친 그들은 경기 감각을 끌어올린 뒤 1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셋 중 하나가 오늘 선발로 출전한다.
도정식.
이름 그대로 공을 정식으로 던지는 우완 정통파 투수로 큰 키에 파이어볼러(fireballer)로 유명하다.
최고 구속 153km를 넘기는 볼 스피드에 예리한 슬라이더가 장기인데 번트 수비를 하다가 경미한 햄스트링 부상으로 보름 동안의 재활 후, 두 번째 등판이다.
오늘도 결과가 좋으면 1군에 바로 올라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첫 경기였던 화산래빗스와의 경기에서 4이닝 무실점으로 컨디션이 건재함을 드러냈고 투구 수를 조절했던 그 경기와 달리 오늘은 7이닝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는 감독의 인터뷰도 있었다.
그러니까, 삼호슈퍼스타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던질 만큼 던지겠다며 7이닝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은 곧, 7이닝 동안 삼호 타선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나 다를 바 없다.
스포츠나인의 이용진 기자가 경기 전 세화스쿼럴스 감독의 말을 허봉호 감독에게 그대로 전했고 소감을 묻자,
“우리 팀을 엿으로 보는구만. 도정식인가 뭔가 오늘 개박살 내겠다고 전해주슈.”
허봉호 감독이 발끈했고 자연히 선수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도정식의 연습구를 지켜보는 선수단 전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끓어오르는 투지도 함께였다.
박종태 타격 코치는 파이어볼러인 만큼 간결한 스윙을 주문했고 그 외의 기본적인 도정식의 공격적인 투구 성향과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유인 볼로 쓰는 슬라이더를 조심하라는 멘트를 곁들였다.
“야, 아까 들었지? 저 새끼 무조건 5회 안에 끌어내려야 한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 핏불 테리어가 한 번 물면 안 놓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야, 놓으면 지가 물어뜯기니까 그렇겠죠.”
“틀렸어. 그 이유는 핏불 테리어이기 때문이야. 물었다가 놓으면 그건 핏불 테리어가 아니고 똥개란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5회까지 물고 늘어져서 끌어내리자는 주장 강창선의 말은 좋았지만 그 뒤에 핏불 테리어를 들먹이는 바람에 듣는 선수들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헷갈렸다. 거기에 똥개까지 나오니 더 그랬다.
“핏불 테리어처럼 삼호도 삼호만의 색깔이 있어. 그걸 보여주자는 말이야. 절대 쉽게 물러서지 않는 우리만의 기질. OK?”
에이스 이세환이 약간 새나간 강창선의 뜻을 요약해서 말했다.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뜻이었군.’
삼호슈퍼스타즈 타자들은 굳은 결기를 갖고 타석에 임했다.
딴엔 눈을 이글거리면서 도정식과의 승부에 임했지만, 도정식은 타자들의 그런 투지만으로 쉽게 넘어서기 힘든 투수였다.
삼호에서 가장 컨택 능력이 우수한 이정우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 슬라이더 하나를 파울로 걷어냈지만 거기까지였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슬라이더는 각이 더 크고 예리하게 타자 앞에서 떨어졌다.
휘잉.
이정우의 삼진으로 첫 기세가 꺾였고 3번 조성진이 간신히 공을 건드려 내야 땅볼을 만들었을 뿐, 1이닝 2삼진의 깔끔한 투구였다.
도정식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머금고 더그아웃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팽팽한 투수전이 5회까지 이어졌다. 도정식-2안타 1볼넷 6삼진 무실점 78구. 성낙기-5안타 1실점 2삼진 65구.
삼호슈퍼스타즈 타자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덕에 도정식은 당초 계획보다 많은 투구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맞춰 잡는 피칭 위주의 성낙기가 경제적이다. 비록 실책과 안타가 겹쳐 3회 말 선취점을 내줬지만 이후로는 내야수비가 안정적이었다.
땅볼타구가 많다 보니 삼호슈퍼스타즈의 내야수들은 늘 긴장감을 유지했고 타구의 바운드에 집중력 있게 대응했다.
자꾸 땅볼 타구를 처리하다 보니 풋워크가 부드러워지고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5회까지 끌어내리진 못했지만, 저 새끼도 이제 지쳤어. 이번 회에 내려 앉히자.”
6회가 되자, 강창선이 다시 말했다.
6회 초 공격은 다시 이정우부터 시작, 처음 140km대 중후반을 던지던 도정식의 공은 140km 초반 언저리에서 맴돌았고 볼 끝도 한결 죽어 있다.
6구까지 승부하던 이정우가 1, 2루 사이를 가르는 안타로 1루 진출. 가장 좋은 기회를 잡았다.
2번 서상천은 정석대로 보내기 번트를 시도하여 성공. 이정우는 2루에 안착했다. 3번 지명타자 조성진이 어이없이 1루수 파울플라이 아웃.
드디어 주장 강창선이 타석에 섰다.
앞선 두 타석 모두 삼진 아웃을 당한 상황. 이번 타석도 결과를 내지 못하면 선수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다른 선수들에겐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고 해놓고 또 삼진을 당하면 다음부턴 말발도 먹히지 않을 거다.
‘짧게 치자. 절대 슬라이더에 속으면 안 돼.’
강찬선이 스스로에게 되뇔 때 공은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와 박혔다. 도정식의 얼굴엔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인다.
아무려면 니가 내 공을 치겠냐,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그 사실이 강창선을 화나게 만들었다.
“후우, 후우.”
강창선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2구는 슬라이더.
볼.
가까스로 참아냈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는 이걸 휘둘렀었다. 3구는 몸 쪽 살짝 높은 볼이었는데 이번에도 참아냈다.
몸 쪽 높은 볼은 강창선이 늘 당하는 패턴이었는데 의외라는 듯 세화스쿼럴스 포수가 힐끗 곁눈질을 했다.
‘어쭈. 안 속네.’
도정식의 표정이 변했다. 연달아 던진 유인구가 볼이 되면서 투 볼 원 스트라이크. 4구는 승부를 해야만 한다.
이 부분에서 그는 약간 흔들렸다.
강창선이 특별한 타자는 아니라지만 홈런 순위권에 있는 타자다. 자칫 제구가 안 되면 걸리는 수가 있다.
강창선은 분명 포심패스트볼을 기다릴 것이다.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마음먹은 대로 넣는 건 쉽지 않다. 더욱이 도정식은 제구력이 좋은 투수가 아닌 파워로 승부하는 투수다.
‘어쩔 수 없다.’
도정식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포수의 사인 역시 포심패스트볼이었다.
포수 역시 슬라이더가 빠지면 볼카운트가 불리해 진다는 걸 의식할 수밖에 없다.
강창선 다음 타자가 오늘 볼넷을 고르고 안타를 때려낸 이중호이므로 볼넷은 절대 금기 사항.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그동안 자신만만했던 도정식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2루 주자 이정우가 스타트를 끊었고 도정식이 이를 악물고 공을 뿌렸다.
따악.
포심패스트볼을 기다렸던 강창선의 배트가 돌아갔다.
바깥쪽 높은 코스의 공이었는데 배트가 밀릴 만한 스피드인데도 강창선은 손목 힘으로 그걸 이겨냈다. 우익수 앞 안타.
스타트를 빨리 끊은 이정우는 우익수가 던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빠르게 홈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와아-
관중들이 일어섰고 이정우는 홈플레이트를 밟음과 동시에 번쩍 뛰어오르며 더그아웃을 바라보았다. 선수들이 뛰어나와 이정우를 반겼고 더그아웃 뒤의 관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1:1 동점 상황에 이중호의 타석. 벤치에서 세화스쿼럴스 감독은 쉽게 승부하지 말라는 사인을 내보냈다.
삼호슈퍼스타즈 타선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타자가 이중호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정식은 애초에 이중호를 거를 마음이 없었다.
4회에 볼넷을 내주고 자존심도 상한 터다. 제구를 완벽히 하려다 보니 볼넷까지 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게 뻔했다.
실제로, 이중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포심이 작용한 결과라고 성낙기도 생각했다.
‘거르라고? 거르고 6번과 승부? 2군에 와서 할 짓이 아니지.’
도정식은 몸 쪽 꽉 찬 볼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