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022화 나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4
130km, 132km, 133km… 이상한 강속구 하나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성낙기를 여전히 느린 볼 투수로 생각했던 모연비퍼스 타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퓨처스리그에서 130km대의 공을 줄기차게 뿌려대는 투수를 느린 볼 투수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볼 끝이 좋아서 140km에 가까운 공의 체감 속도에 타자들은 1회를 삼자범퇴로 물러났다.
“쟤 공이 저렇게 빨랐어? 동영상과는 많이 달라.”
“변화구는 거의 던지지도 않았어.”
모연비퍼스 타자들은 3회까지 안타 하나도 뽑아내지 못하고 타이밍 맞추기에 급급했다. 성낙기의 포심패스트볼 강약 조절과 드물게 섞여 들어오는 체인지업에 제 스윙을 해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타격이 이어졌다. 나름 성낙기를 연구했던 이규신 투수 코치는 체인지업과 커브, 슬라이더 등의 변화구 위주로 승부할 거라던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저 자식이 뭘 믿고 패스트볼만 계속 뿌려대지?”
그런 패스트볼에 타점을 찾지 못하는 모연비퍼스 타선이었다. 성낙기는 130km대 초 중반의 공을 던지다가도 갑자기 120km대의 공을 구석구석에 찔러 넣고 있었다. 130km 대의 공에는 구위에 밀리다가, 겨우 타이밍이 맞을라치면 120km대의 느린 볼이 몸 쪽이나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 걸쳐서 들어왔다.
“내가 삼호 투수를 잘못 봤다. 잘 들어. 올스타 브레이크 후유증이 있는 너희들에게 지금의 성낙기는 쉬운 투수가 아니다. 전부 힘이 들어간 타격을 하고 있어. 힘을 빼고 간결하게 승부 해. 3회까지 30구밖에 던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돼? 9회까지 90구 던진다는 얘기야, 말이 돼? 최대한 오래 보고 끌어내려, 알겠어?”
4회부터 모연비퍼스 타자들이 달라졌다. 초구나 2구에도 공격적으로 덤벼들던 패턴을 버리고 투 스트라이크가 되도록 움찔거릴 뿐, 반응이 없다. 1번 타자 이용학은 투 스트라이크 원 볼에 성낙기의 체인지업에도 딸려오지 않았다. 투, 투의 볼 카운트.
‘응? 달라졌네?’
성낙기는 달라진 타자의 반응에 무언가 작전 지시가 내려졌음을 알아챘다. 오늘 경기에서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진 체인지업에 속지 않은 건 이용학이 처음이었다. 0.313의 타율에 13도루가 거저 얻어진 수치가 아니라는 듯 이용학은 공격 본능을 제어하고 있다.
‘이제 승부다.’
그리고 이용학은 느꼈다. 이제 승부구가 들어오리라는 것.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볼을 던지기엔 투수도 부담이 크다. 선두 타자에게 볼넷은 투수가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용학은 배트를 짧게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 공이 왔다.
휘잉.
방금 전과 똑 같은 체인지업. 하나는 간신히 참아냈으나 두 번이나 연속된 체인지업에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이런… 개색…….”
성낙기가 앗싸! 하면서 주먹을 움켜쥐는 게 이용학의 눈에 보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다음 타자 한영철도 굳은 마음으로 타석에 임했다. 결과는 3구 삼진. 초구와 2구를 느린 체인지업으로 던져 투 스트라이크를 만들더니 몸 쪽 포심패스트볼로 정면 승부. 오다가 가라앉으리라 예상했던 한영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러날 때 성낙기는 번쩍 뛰어올라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해댔다. 길길이 날뛴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모션이었다.
“저런, 씨박새끼가…….”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 모습을 본 모연비퍼스 타자들이 저마다 욕을 쏟아냈다. 보다 못한 장덕수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나와 주심에게 다가갔다.
“어이, 주심. 저거 경고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쟤가 왜 저렇게 깝치지?”
“그러니까 경고를 주던지 퇴장을 시키든지 하라고! 저딴 식으로 약 올리면 벤치클리어링 나간다, 알았어?”
“아이 참, 장형이 좀 참아요.”
“참기는 뭘 참… 자, 장형? 야, 너 선배한테 게기냐? 장… 혀엉?”
“거참, 아무리 선배라도 이 경기에선 내가 주심이요. 심판한테 반말하고 그러면 기분이 좋겠어요?”
“근데, 이 새끼가……!”
성낙기의 모션에 항의하러 나왔던 장덕수 감독은 주심하고 엉겨 붙었고 모연비퍼스 코치와 3루심이 뜯어말린 뒤에야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선배 좋아하네. 술 한 잔도 안 사면서 어디서 행세하려 들어!”
주심이 구시렁거리며 경기를 속개했고 성낙기는 다음 타자를 3루 땅볼로 잡고 100미터 날리기를 하듯 더그아웃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 행동 또한 모연비퍼스 선수들에게는 고깝다 못해 처 죽일 놈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야, 낙기야. 왜 자꾸 약을 올리고 그래. 그러다가 한 대 맞으면 어쩌려고. 4번 뚱땡이 눈빛 못 봤지? 너 아주 죽일 기세드라. 5회 선두 타자야.”
4번 뚱땡이 오동균. 188cm의 키에 120kg가 넘는 거구. 정확한 체중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앞에 서면 산이나 다름없다. 그놈이 나를 벼르고 있다고?
“그으래? 그럼 총 맞은 멧돼지 구경 좀 해야겠군.”
성낙기의 이런 모습은 시스템을 얻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모습, 아무래도 자살 시도 후 가까스로 살아난 뒤 뇌가 개조된 게 틀림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놀람과 공포, 즐거움과 슬픔 등의 희로애락을 느끼게 마련인데 성낙기는 앞일에 대한 걱정 따위는 머릿속에 아예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두열은 성낙기의 천진난만한 대꾸에 할 말을 잃고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악!
때마침 이중호가 상대 에이스에게 투런 홈런을 안겨주고 있었다.
천재범. 전반기 성적 7승 2패 ERA 2.73으로부터 말이다.
2:0으로 앞서던 5회 말, 성낙기는 마실 나가는 것처럼 글러브를 낀 채 뒷짐을 지고 마운드로 나갔다.
오동균은 벌써부터 나와 배터 박스 땅을 고르고 있다가 성낙기가 올라오자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개대가리 같은 새끼, 내 앞에서 주접떨면 죽는다.”
오동균의 말을 들은 이두열은 포수 마스크 너머로 쳐다봤다. 마운드의 성낙기는 눈을 예쁘게 뜨고 헤헤거리는데 타자라고 들어선 놈은 그런 놈이 밉다고 지랄이다.
가만 생각하니 열이 오른다.
아니, 성낙기가 지한테 멧돼지라고 놀리기를 했어, 안타 치고도 죽는 거북이새끼라고 비웃기를 했어. 저렇게 좋은 인상으로 좋을 공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는 애한테 너무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
“꿀꿀.”
“너, 방금 뭐랬어.”
“뭐가요?”
“방금 낸 소리 말이야. 꿀꿀, 그랬잖아.”
“내가요? 에이, 잘못 들으셨겠죠. 여기 돼지새끼가 어딨다고.”
“…….”
오동균이 말문이 막혀 붉으락푸르락 하는 사이에 성낙기의 공이 들어와 꽂혔다.
이두열은 말을 하는 중간에 사인을 냈고 오동균이 자세도 잡지 않은 상태에서 성낙기의 공이 날아왔다.
스트라이크.
“아,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말하는 사이에 공을 던지다니.”
“누가 말하랬어?”
오동균이 주심에게 따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쿨했다.
사실, 오동균은 힘 하나는 메이저리그 급인 데다 타격 자질도 있는 편인데 그놈의 성질 때문에 2군에서 헤매는 선수였다.
조금만 약을 올려도 제 풀에 나가떨어지는 유형. 워낙 다혈질이라서 벤치클리어링이라도 벌어지면 조폭처럼 난폭하게 굴었다.
빈볼로 의심되는 공이 몸을 맞추기라도 하면 멧돼지처럼 마운드로 돌진하기 일쑤였는데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어서 투수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오동균을 잡는 방법은 남부 리그의 팀들은 모두 공유하고 있었는데 몸 쪽으로 위협구를 두어 개 던지면 열폭해서 아무 공이나 마구 휘두른다는 거였다.
자신을 위협한 투수에게 홈런으로 복수하려는 것인데 그런 때 변화구로 살살 꾀면 붕붕,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럼에도 특유의 힘과 유연한 몸, 그리고 타격 자질은 우수한 편이어서 2.72의 타율에 15홈런을 기록 중이었다. 이 페이스면 후반기가 짧다 해도 25홈런까지 노릴 수 있으니 4번 타자의 역할은 충분히 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말하는 사이에… 좋아, 그랬다 이거지?’
성낙기는 마운드에서 씩 쪼개면서 공을 돌려받았다. 배터 박스에 꽉 차는 오동균의 몸이 정말 한 마리 멧돼지 같다. 200근은 족히 나가는 성체 말이다.
이쯤에서 기를 완전히 꺾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광석화(電光石火).”
나지막이 읊조린 다음, 포심패스트볼을 몸 쪽으로 던졌다. 이미 (68/100)에 다다른 성낙기의 최고 속도는 133km. 이 정도면 2군에서는 만만한 수치가 아니다.
더구나 볼 끝도 좋아서 쉽게 때려내기 힘든 공. 그런 공의 기본 위에 전광석화 모드가 가동된 공이 성낙기의 손끝을 떠나 포수 미트로 날아갔다.
팡.
140km. 전광판에 찍힌 숫자였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오동균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성낙기는 연달아 같은 공을 뿌렸다. 140km. 이번 공 역시 오동균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스피드. 성낙기가 마운드에서 한 손을 올리고 하늘을 가리켰다.
성낙기 나름으로는 오동균에게 하늘의 심판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인데, 오동균이 그걸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연달아 던진 전광석화의 공에 오동균은 물론이고 모연비퍼스 타자들의 기가 꺾였다.
저런 강속구 투수가 힘을 쭉 뺀 130km대의 공으로도 4회까지 안타 하나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 그러나 그들이 보는 성낙기는 어쩌지 못하는 구름 위의 투수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평소보다 훨씬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감히 엉길 수조차 없다.
“저런 투수가 왜 2군에 있어?”
“낮도깨비 같은 게 튀어나와서 우리 팀에 엿을 먹이네.”
그들은 결국 성낙기가 2군에 머무르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기가 죽은 타선이 터질 리 없고 성낙기는 최소한의 공으로 6, 7, 8회를 2안타로 막아냈다. 2안타라지만 내야 땅볼의 코스가 좋았거나 유격수의 보이지 않는 에러로 만들어진 안타였다.
“아, 9회 말에도 성낙기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정말 대단한 구위를 보여주네요. 알 수 없는 투수입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말을 뒤로하고 마운드에 오른 성낙기가 마지막 타자를 파울플라이로 잡는 순간, 와아 하는 함성이 일제히 터졌다.
올해 들어 삼호슈퍼스타즈에 첫 완봉승을 성낙기가 안겨주는 순간이었다. 모연비퍼스 타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멧돼지처럼 씩씩대던 오동균도 땅만 보면서 퇴장했다.
-완봉을 축하한다. 아우야.
-됐어. 이제부턴 날아오르는 거야.
[첫 완봉승을 축하합니다.]
[체력이 (70/100)으로 오릅니다.]
[세기의 강속구가 (70/100)]으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63/100)]으로 오릅니다.
[커브의 제구력이 (65/100)]으로 오릅니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60/100)]으로 오릅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65/100)]으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30/100)]으로 오릅니다.
[포크의 제구력이 (35/100)]으로 오릅니다.
[퀘이크볼이 (3cm/5)]으로 오릅니다.
라이징패스트볼이 (4cm/10)]으로 오릅니다.
팔 근육 강화(3/10)단계.
어깨 근육 강화(3/10)단계.
악력(4/10)단계.
전광석화(電光石火) + 7km. 9이닝 5구.
성낙기는 뿌듯한 마음으로 눈앞에 뜬 상태 창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나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이제 누구와 붙어도 쉽게 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