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021화 나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3
[체력이 22 남았습니다]
성낙기가 7회에 마운드에 올라가자 상태 창이 떴다. 5회나 던졌는데 아직 22의 체력이라면 계산상 8회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경찰청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성낙기의 공이 눈에 익은 타자들은 원아웃 이후 연속 안타로 득점권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내야 땅볼 때 한 루씩 진루, 투아웃 2, 3루에 교타자 우민섭이 타석에 들어섰다. 4회에도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의 호수비에 잡힐 만큼 타격감도 무르익어 있다. 원 볼에서 퀘이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을 연달아 던졌으나, 파울로 걷어내는 우민섭.
커브와 체인지업에도 속지 않아 스리 투 풀카운트가 만들어졌다.
오늘 경기의 승부처라고 할 만한 장면이 만들어지자 경찰청 더그아웃이 시끄러워졌다. 그럴 만도 했다.
3할 중반의 기본 타율에 득점권에서는 4할의 맹타를 기록 중이었으므로. 성낙기는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낮게 읊조렸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성낙기가 뿌린 공이 우민섭의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의 타격대로라면 충분히 공략 가능한 코스. 우민섭은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다.
팡.
휘잉.
우민섭은 두 눈을 의심했다. 볼이 온다 싶은 순간 배트를 내밀었는데 공은 이미 포수 미트 안으로 들어가 있다.
팡, 하는 소리가 먼저 들렸고 배트를 휘두르는 휘잉, 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2구와 3구역시 퀘이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과는 차원이 다른 스피드의 공이 꽂혔다.
‘이럴 수는……!’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아웃 선언이 유난히 크게 들렸고 우민섭은 황당한 나머지 얼이 빠진 채로 배터 박스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적응되었던 공의 스피드가 아니다. 볼 끝이 살아오는 성낙기의 갑작스러운 강속구에 우민섭은 타이밍을 맞춰보기도 전에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웃!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헉!
-뭐가 저렇게 빨라. 내 눈이 잘못됐나?
-성낙기… 놀라운 공을 던졌어. 방금 공 성낙기가 던진 거 맞지?
경기를 시청하고 있던 포털 사이트에 댓글이 폭주했다. 관중은 관중대로 캐스터와 해설자조차 입이 얼어붙었다.
경기장의 전광판엔 139km라는 숫자가 또렷이 찍혀 있었다. 포수 이두열도 눈만 끔벅거렸다. 엊그제 137km를 던졌을 때만 해도 설마 했었는데 오늘 공을 받아보고는 그 볼이 진짜였다는 걸 알았다.
느닷없는 강속구. 그런 공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성낙기, 미쳤어……!’
삼호 그룹 회장실의 부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아빠 방금 보셨죠?”
“봐, 봤다.”
“강속구 맞죠? 자그마치 139km라고요.”
“이건… 평소에 구속을 숨겨왔다는 건가? 최고 구속 130km 선수가 갑자기 130km대 후반을 던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도 그 정도는 알겠지?”
“알죠, 너무 잘 알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한 선수라는 거예요. 평소에 일부러 130km를 던지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팽팽하던 게임은 7회 말에 변화가 있었다. 이번엔 삼호슈퍼스타즈 하위 타선이 제 몫을 해냈다. 6번 김석문이 노아웃에 안타를 치고 나갔고 투아웃이 되자 2루 도루 성공했다.
이어 9번 안학규 대신 나온 대타 윤후광이 적시타를 터뜨렸다. 5:4.
성낙기는 8회 초에 이렇다 할 위기 없이 잘 틀어막았는데 마지막 타자의 마지막 공에 또 전광석화 모드를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 공도 무려 139km.
-야야, 전광석화 모드 너무 쓰면 사람들이 너 오해하겠다. 빠른 공 숨겨 왔다고 하지 않겠어?
지켜보던 실바가 한마디 거들었을 정도로 성낙기 공의 반향은 컸다. 전광판에 찍힌 숫자를 보고 관중들이 술렁일 정도였다.
9회 초엔 삼호 타선이 침묵했고 드디어 9회 말, 허봉호 감독은 불안한 임병주 대신 이세환을 올려 보내 경기를 끝냈다. 삼호슈퍼스타즈의 5:4 승리.
성낙기의 전반기 4승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히어로는 단연코 성낙기였는데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기자들이 성낙기에게 3명이나 달라붙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던졌어요. 기분이 안 좋을 때 가끔 그러거든요.”
기자들의 질문에 남 얘기를 하듯 덤덤하게 말하는 성낙기.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의 의문은 커졌다. 누구나 자신의 몸으로 던질 수 있는 한계 스피드가 있게 마련인데 성낙기는 그걸 훌쩍 뛰어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며칠 전에 이어 두 번씩이나.
성낙기가 구속을 숨겨왔다고 보기에도 말이 안 된다. 139km를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지금껏 스스로 속도를 낮춰서 던졌다고?
고등학교 때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한 투수가 스스로 속도를 느리게 해서 실업 팀이나 다름없는 세븐윈터스에서 방출을 당하고 간신히 삼호슈퍼스타즈 2군에 입단한 후, 지금까지 던져왔다고?
방출을 당하면서까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숨겨서 야구 인생을 말아먹기 직전까지 가는 선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성낙기를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다.
그렇더라도 의문은 여전했다. 지구상의 동물 중 근육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는 존재하지도,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초능력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성낙기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경기의 승리보다도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은 성낙기가 어떻게 그렇게 던질 수 있는지를 궁금해 했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술렁거렸다.
그건 유시진 캐스터와 장종운 해설자, 삼호 그룹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 역시 마찬가지였고 성낙기의 투구를 가장 잘 아는 이계현 코치와 허봉호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자 그들은 각자의 머릿속에 이 상황을 정리할 낱말을 떠올렸다.
괴물.
저건 괴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결론은 그거였고 무언가 그 결론이 이상할 때마다 ‘괴물’이라는 똑같은 낱말을 떠올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야 혼란한 머릿속이 그나마 정리가 될 것이므로.
그래, 괴물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낙기는 소풍 나온 어린아이마냥 실실 웃으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의문을 품은 기자들은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대한 기사를 너도 나도 써서 올렸고 2군 경기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
<삼호슈퍼스타즈 2군 투수 성낙기의 불가사의 - 에잇 세븐.>
<성낙기, 믿을 수 없는 공을 던졌다 - 야구장 닷컴>
<2군에서 본 이상한 투수, 규칙을 거스르다 – 스포츠나인>
다음 날, 포털 사이트에 성낙기의 이름이 등장했고 1회에 구원 등판하여 8회까지 무실점의 성적보다는 갑자기 스피드가 늘어난 마지막 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거기에 달린 댓글들은 자연의 법칙을 배반하는 기묘한 일에 대해 말도 안 된다는 둥의 비아냥과 정말이라면 비상식적인 괴물 투수의 등장이라며 놀라워하는 관심을 함께 나타냈다.
그리고 올스타브레이크가 시작되었다.
그간의 좋은 성적에, 꽤나 재미있는 마지막 공의 이슈에도 불구하고, 성낙기는 올스타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린 투수라는 것, 몇 경기 반짝한 정도로는 올스타로 뽑을 수 없다는, 올스타 북구 리그 감독으로 뽑힌 경찰청의 이준구 감독의 선택 때문이었다.
-차라리 잘되었어. 쉬는 동안 투구 폼하고 체력 보강을 좀 하자. 스포트라이트는 올스타전에서 받는 게 아니야. 베이스볼 시리즈가 진짜지.
실바의 말대로 성낙기 역시 올스타에 뽑히지 않은 것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더 즐거웠다. 쉬는 동안 아버지와 막걸리도 한잔하고 국수도 삶고 간만에 효자 노릇을 할 생각에 부풀었다. 물론,
‘성낙기 선수, 올스타 브레이크 때 저랑 식사 한 끼 하시죠.’
김아경의 난데없는 데이트 신청에 함께하는 것도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김아경은 팀에 큰 힘을 주고 있는 성낙기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지만 성낙기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봤다.
자신의 공 단지는 모습에 김아경이 반하지 않고서야 1:1의 만남을 제안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성낙기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올스타 브레이크 첫날, 김아경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후다닥, 점심으로 나온 생선 구이에 공기 반 그릇을 먹고 도망을 갔고, 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 당분간 막걸리를 끊었고, 손님이 별로 없어서 국수 삶을 일도 없다는 연락이 왔다.
-자자, 운동장에 가자. 장비 챙겨.
-그래. 하루만 살다 죽을래? 사람이라면 먼 미래를 봐야지. 사람들은 우리 이름만 기억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그보다 몇 배는 가치 있는 거란다. 죽고 나서야 그걸 알게 되었지. 너도 곧 죽을 거니까 가치 있는 걸 해.
실바와 존의 닦달로 아무도 없는 마운드에서 줄기차게 공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공을 던지는 동안 실바와 존은 서로 자신들의 투구 폼을 성낙기에게 접목시키려 했고, 성낙기는 올스타 브레이크 마지막 날, 자신에게 맞는 투구 폼을 혼자 찾아냈다.
셋 포지션으로 던지는 동작은 실바와 같았지만, 공을 뿌리기 직전 이중키킹 비슷한 동작이 가미되었는데 이 폼으로 던지니 제구가 더 안정되고 몸의 균형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무릎을 펴고 던지다가 다시 살짝 무릎을 접었다 다시 펴는 동작. 실바는 못마땅해 했지만 성낙기는 새로운 투구 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가겠습니다. 더 이상 교정은 없어요.”
올스타 브레이크가 열리는 3일 동안 무려 3000회의 투구를 한 뒤 나온 결과였다.
그리고 성낙기는 후반기 첫날, 모연비퍼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투입되었다.
올스타전 뒤였고 홈런 레이스 결승에서 이중호가 무려 17발의 홈런으로 역사를 쓴 뒤였기 때문에 관중들의 열기는 상당히 뜨거웠다.
삼호슈퍼스타즈가 순위 경쟁에 뛰어들면서 게임마다 흥미진진, 게다가 도깨비 같은 성낙기의 등판일이었다. 성낙기는 마운드에 선 채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상태 창을 제 눈앞에 떠올렸다.
[체력(65)]
[세기의 강속구 (68/100)]
[포심의 제구력 (60/100)]
[커브의 제구력 (63/100)]
[슬라이더의 위력 (58/100)]
[체인지업의 위력 (60/100)]
[투심의 제구력 (19/100)]
[포크의 제구력 (21/100)]
[퀘이크볼이 (2cm/5)]
라이징패스트볼이 (3cm/10)]
팔 근육 강화 (2/10)단계.
어깨 근육 강화 (2/10)단계.
악력(3/10)단계
***
2018년 7월 20일. 모연비퍼스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반기 시작과 함께 갖는 교류 경기는 한 달 동안의 교류를 거친 뒤 다시 남부와 북부 리그의 경쟁으로 돌입한다.
북부 리그 팀들에게는 이 교류 경기 기간의 성적이 아주 중요했다.
경찰청이 거의 독주하다시피 하는 북부 리그와 달리 남부 리그는 상무피닉스와 세화스쿼럴스, 모연비퍼스가 3강을 형성하고 그 아래의 성진재규어스와 화산래빗스도 만만찮게 따라붙는 형국이었다.
현저한 약팀이 없는 남부 리그와의 교류전은 북부 리그에 달가울 리 없다. 참고로 작년에도 역시 각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던 남부와 북부 리그의 모연비퍼스와 안강피그스가 맞붙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4승2패. 모연비퍼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다른 팀의 결과도 엇비슷했다. 호사가들이 리그 수준이 안 맞다며 재조정을 주장할 정도였다.
그런 모연비퍼스에 선발로 나간 성낙기의 각오는 비장해야 옳지만,
“수준이 다른 팀이다. 어떻게든 5회까지만 막아. 4점까지는 바꾸지 않을 거다.”
라는, 이계현 코치의 말에 보통 선수 같으면,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는 정도인데 성낙기는 달랐다.
“저 성낙기, 모연비퍼스를 제물로 후반기 첫 승을 챙기겠습니다. 강속구가 뭔지 확실히 보여줄게요.”
말발이 먹히지 않자 이계현 코치는 성낙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현실 파악이 잘 안 되는 놈이다. 이계현 코치가 그러거나 말거나 성낙기는 1회 말 수비 때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강속구를 뿌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