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020화 나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2
“허봉호 감독 대단한데? 거기서 이세환을 투입할 줄이야. 승부를 아는 감독이다.”
“맞아요. 성격이 까칠하긴 해도 뚝심도 있고 선수들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이 있어요.”
“내일은 누가 선발이지?”
“로테이션대로라면 안민기죠. 잘하면 3연승도 가능할지 몰라요.”
“경찰청을 상대로 3연승? 하하, 정말 그대로 된다면 내 거나하게 한턱 쏘지.”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은 한껏 고무되어 있다. 1군 선수가 즐비한 경찰청을 상대로 3연승은 올해 들어 어느 팀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날이 밝았다. 안민기가 예정대로 선발로 나섰고 씩씩하게 1회를 맞이했다. 하나, 1회부터 난조. 첫 타자에게 볼넷을 주고 나서 다음 타자의 보내기번트가 절묘하게 3루선상으로 흐르면서 올 세이프. 1회부터 위기를 맞았다.
그런 다음 3번 김동선과 김대균의 연속 안타로 2실점을 했고 5번 타자 허갑술의 보내기번트와 6번 타자의 희생플라이로 추가 1실점을 하고 투아웃 2루에 또다시 3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1회 4실점.
안민기 최악의 날이다.
경찰청 타자들은 조그마한 실수도 없이 작전대로 잘 움직였고 간결한 팀 배팅으로 주자들을 불러들였다. 보다 못한 허봉호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포수 이두열이 마운드로 뛰어왔고,
“야, 이두열. 밋밋한 슬라이더 사인을 자꾸 내면 어쩌자는 거야. 직구가 좋은데 그걸로 승부를 해야지.”
“죄송합니다.”
이두열이 멋쩍게 말했지만, 투피치 투수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직구와 슬라이더뿐인데 유일한 변화구인 슬라이더가 긁히지 않으면 답이 없다. 허봉호 감독이 안민기의 공을 빼앗아들고 더그아웃을 바라보았다.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아, 여기서… 성낙기 선수가 나오나요? 1회에 구원으로 투입되는 성낙기 선수입니다.”
“도깨비투수 성낙기의 등장이네요. 불펜 투수들이 대기 중이었는데요. 어제에 이어 또다시 선발을 구원으로 돌리는 허봉호 감독, 뭐랄까요. 정말 독기가 느껴집니다. 오늘 경기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거죠. 대단합니다.”
유시진 캐스터와 장종운 해설자의 말을 뒤로 하고 성낙기가 마운드로 향했다.
[체력 60입니다.]
체력은 풀로 차 있는 상태. 관중들이 소리 지르자 성낙기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면서 마운드에 도착했다. 언뜻 보면 마치 승리를 따내기라도 한 모습이어서 허봉호 감독은 그런 성낙기를 보고 한 대 때리려다 참았다.
1회 4실점한 마당에 저러고 싶을까. 평소에 또라이 끼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눈치도 뭣도 없는 놈이다.
“정신 안 챙길래?”
“네? 죄송합니다. 그 대신 모조리 아웃시켜 버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독님.”
“점수 주면 뒤질 줄 알아.”
허봉호 감독이 내려가고 성낙기는 포수 미트를 노려보았다.
이두열이 슬라이더 사인을 낸다.
안민기에게 슬라이더 사인을 내고 감독에게 꾸중을 듣고도 슬라이더 사인을 내는 이두열, 보기보다 똥고집이다.
고개를 젓는 성낙기의 뒤에서 실바의 목소리,
-야, 성낙기 3루 주자 리드가 너무 길다. 견제로 잡아.
아니나 다를까. 슬쩍 곁눈질로 보는데 정말이다. 홈스틸이라도 할 것 같다.
성낙기는 이두열에게 주자 견제 사인을 보냈고 이두열의 손 모양을 본 3루수 안학규가 베이스로 급히 들어왔다.
성낙기도 거의 동시에 공을 던졌다. 중심이 홈으로 쏠린 주자는 역모션에 걸려 귀루가 늦었다. 태그아웃으로 비명횡사.
그렇게 1회가 끝났다.
“저거 뭐 있단 말이야. 위기에 올라가도 운이 좋은 건지 상대가 알아서 죽어주는 건지.”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허봉호 감독이 혼잣말을 했다.
그가 보기에도 성낙기는 묘한 놈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경력도 일천한 투수가 어떻게 3루 견제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단은 성낙기가 불을 껐고 경찰청 마운드엔 여상우라는 경찰청 3선발이 올라왔다.
고교 시절 유망주로 은성캣츠에 드래프트 된 뒤 곧바로 입대한 미래의 선발 자원이었다. 올해 성적은 6승 3패 ERA 3.86으로 나이에 비해 변화구와 제구가 안정적이다.
‘주자가 나가면 멘탈이 흔들리는 투수니까 볼을 길게 보고 최대한 괴롭혀라. 후반에 현호석 나오기 전에 승부를 걸어야 해.’
박종태 타격 코치는 여상우 상대하는 법을 타자들에게 말했다.
주자가 없을 땐 안정적으로 잘 던지다가도 일단 주자가 출루해서 득점권에 들어가면 장점인 제구가 흔들리는 경향이 있는 투수다.
와인드업에서의 구위와 셋 포지션의 구위가 확연히 차이난다는 점도 여상우의 단점이다.
1번 이정우는 초구와 2구 모두 변화구를 던지는 여상우의 공에 반응하지 않았다.
‘안 따라 나와?’
여상우는 3구와 4구 연달아 포심패스트볼을 던져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이정우는 스윙 동작 한 번 없이 배트박스에 발을 뺏다, 들였다를 반복했을 뿐이다. 5구째는 변화구로 볼.
투 스리 풀카운트에서 여상우는 주 무기인 커브를 던졌다. 타자 바깥쪽에서 뚝 떨어지는 커브.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면 거의 배트가 따라 나오는 구질이었다.
하나, 이정우는 뭔 일 있었냐는 듯 떨어지는 커브를 바라보다가 배트를 던지고 1루로 슬슬 뛰어나갔다.
1루까지 가는 속도도 지나치게 느려서 여상우는 힐끗 이정우를 째려보았다.
‘좋아, 이정우. 잘하고 있어.’
박종태 타격 코치가 이정우에게 사인을 보냈다. 최대한 리드 폭을 길게 가져가서 흔들라는 것. 첫 타자부터 볼넷을 내준 여상우는 내심 속이 상해 있다.
‘그냥, 승부를 했어야 했나?’
머릿속에 마지막 커브볼에 대한 잔상이 남아 다음 투구에 대한 집중을 방해했다. 거기에 곁눈질로 보니 주자의 리드 폭이 너무 크다.
여차하면 2루로 뛸 기세.
경찰청 포수를 맡고 있는 서일현은 도루 저지율 2할 8푼 5리가 말하듯 어깨에 약점이 있다. 여상우가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
퍽.
여상우는 1루로 견제구를 던졌다. 리드를 크게 했던 이정우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귀루한 뒤 아까보다 리드 폭을 더 크게 하면서 오른팔을 축 늘어뜨린 채, 왼발의 스파이크로 땅을 팠다.
스타트를 빠르게 하기 위한 동작인데, 동작만으로 보면 영락없이 뛰게 생겼다.
이정우의 그런 모션은 투수와 포수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고 어깨에 자신이 없는 포수 서일현은 직구 위주의 사인을 냈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에서 피치아웃을 한 뒤 던진 강속구가 볼 판정을 받아 원 스트라이크 스리 볼로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가 만들어졌다. 다음 공은 어쩔 수 없이 볼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배팅 찬스에서도 한가운데 볼을 바라만 보는 2번 타자 서상천.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타격 코치의 사인은 참으라는 거였다.
서일현 포수는 몹시 헷갈렸다.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리라 봤는데 미동이 없다.
볼카운트는 스리 투 풀 카운트.
1번 이정우의 타석 때와 비슷한 서상천의 반응에 서일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더불어 아까 커브를 던졌다가 타자가 속지 않아 볼넷을 내주었던 일이 눈앞에 떠오른다.
‘하는 수 없어. 맞는다고 다 안타가 아니지.’
사인은 포심패스트볼이었고 이정우는 셋 포지션 때 스타트를 끊었다. 여상우는 여력이 닿는 한 최대의 강속구로 타자 바깥쪽을 향해 던졌고 제구가 흔들린 공은 한가운데로 쏠려 들어왔다
따악.
타구가 우익수 앞에 떨어질 때 1루 주자 이정우는 벌써 2루에 다다라 있었고 안타를 확인한 후 3루까지 내달렸다. 순식간에 노아웃 1, 3루의 황금 찬스를 맞았다.
다음 3번 지명타자 조성진의 3루 땅볼 때 이정우의 홈인, 4번 강창선의 안타로 2점째를 뽑은 삼호슈퍼스타즈는 바닥에서 빌빌거리던 예전의 그 팀이 아니었다.
새로 가세한 얼굴들이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자 빠졌던 이가 채워지듯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갔고 선수들은 자신감을 갖고 경기에 임했다.
-와, 삼호가 언제부터 타선이 저랬어?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러게. 포텐 터지네.
-실점 후에 바로 따라 붙는 건 좋은 징조. 역전 가자.
-오늘 경기하고 푹 쉬니까 물량 다 쏟아부어.
-이중호 또 한 건 하나?
인터넷 대화창에도 댓글들이 넘쳐났다. 그만큼 삼호슈퍼스타즈의 타선은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한 모습을 선보이는 중이다.
그리고 원아웃 1루에 이중호가 타석에 섰다. 투수 여상우는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 거포를 상대로 쉽사리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그러다 투 볼까지 몰리자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여지없이 맞아 나갔다. 몸 쪽 다소 높은 코스.
따악.
여상우는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직감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볼 것도 없이 그라운드에 떨어질 공이 아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시팔…….”
이중호의 투런 홈런에 4:4 동점.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이중호를 반겼다. 성낙기는 뛰어 들어오는 이중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목을 길게 빼고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아우우우!”
“이 코치, 저거 가만 좀 있으라고 해. 곧 던질 놈이 저렇게 설치고 그래.”
이계현 코치가 계속 늑대 울음소리를 내는 성낙기를 잡아 의자에 앉혔다. 다음 타자들은 내야 땅볼로 연달아 아웃, 삼호슈퍼스타즈는 동점을 만들어 놓고 수비에 나섰다.
***
“오오, 저 선수가 전에 네가 말하던 그 선수냐?”
“네, 맞아요. 이중호. 슬러거 중의 슬러거인데 컨택 능력도 수준급이죠. 스윙이 좀 더 간결해지면 1군에서도 통할 거라고 봐요.”
“우리 딸 선수 보는 눈이 좋은데? 아주 좋아. 뭔가 착착 맞아 들어가고 있어. 후반기가 기대된다.”
“그렇죠, 헤헤. 조금 있어 보세요. mlb에도 우리 선수를 진출시키고 말테니까. 괴물들만 모인다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삼호슈퍼스타즈 출신 야구 선수, 어때요?”
“그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 근데 성낙기라는 애는 어디서 구했지?”
“저 선수요? 그냥 제 발로 굴러 들어왔죠. 저한테 1패도 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치던데요? 그러고는 정말 1패도 하지 않았죠, 아직까지는. 도깨비 같은 선수예요.”
“도깨비?”
“원래 최고 구속 130km 던지던 선수인데 엊그제는 느닷없이 137km의 공을 던졌어요. 하도 놀라서 졸도할 뻔했다니까요?”
“그래? 그건 불가능한데… 스피드건이 잘못되지 않고는 말이지. 갑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어.”
“그러니까, 도깨비라는 거예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가장 흥미로운 투수예요.”
“그것 참.”
성낙기는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의 관심을 알기라도 한 듯 2회를 삼자범퇴로 끝냈다. 뭔가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경찰청은 2회부터 여상우를 내리고 막강 불펜을 투입했다. 필승조 3명의 ERA가 무려 2.82로 일단 리드를 잡으면 거의 역전을 허용하지 않는 무적의 불펜.
선발이 6회까지만 리드를 잡으면 7회부터는 빗자루처럼 이닝을 지워 나갔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경찰청 불펜은 2, 3회를 무실점으로 넘기고 4회부턴 두 번째 투수를 투입, 5회까지 던지고 6회에 마무리 투수를 올렸다.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투수 운용이다.
마무리가 길게 던진다 해도 나오자마자 최선의 구위로 승부하는 불펜투수의 속성상 2이닝 이상은 무리다.
성낙기는 6회까지 호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자그마치 5이닝 동안 산발 6안타 무실점으로 허봉호 감독의 선택을 탁월하게 만들고 있다. 감독이 의외의 선택을 했을 때 선수가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면 그 감독은 승부사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성낙기가 7회에도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아, 허봉호 감독 승부사 기질을 보여줍니다. 바꾸지 않고 성낙기로 밀어붙이네요.”
“요즘 들어 선수기용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백업도 자주 기용하면서 선수단에 활력이 넘칩니다. 그러니까 이게, 누구나 언제든 경기에 나갈 수 있다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주전들은 잘못하면 제외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주게 되고요. 오늘 성낙기의 구원 기용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는데 현재까지는 결과가 아주 좋습니다.”
유시진 캐스터와 장존운 해설자는 흥미진진한지 목소리 톤이 올라가 있다.